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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의 영성

기사승인 2021.05.10  14: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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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동섭 교수의 선교 논단

방동섭 교수/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역임, 글로벌 비전교회 담임
 

   
▲ 방동섭 교수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엄밀하게 분류해 본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와 또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크게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고 해서 특별히 악하게 사는 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나는 하나님 없이 얼마든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미 그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살고 있는 것이다.

현상과 실제는 다르다. 사람들이 현상적으로는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살아가는 것 같아도 실제로 그런 인간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간단한 예로 우리가 매 순간 호흡하는 것조차도 우리는 공기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시편 기자는 인간에 대해 정의하기를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라”고 하였다(시 146:4).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숨을 쉬지 않고 가장 오래 버티는 것으로 세계 기록을 가지고 있는 자는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톰 시에스타’인데 그는 물속에서 숨을 쉬지 않고 15분 02초를 버티었다고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숨을 쉬지 않고 성인 남자의 경우는 50-90초까지 여자의 경우는 30-50초까지 버틸 수 있다고 한다. 숨 안 쉬고 길어야 1분 내외로 버틸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이 인간의 한계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아직도 생존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그의 숨을 거두어가지 않은 것뿐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호흡을 거두어 가시면 오늘 밤이라도 그는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을 모독하다가 죽음을 당했던 벨사살이라는 왕이 등장하고 있다. 그는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었다. 그는 이미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가는 바벨론의 국력을 다시 모아 바벨론 제국의 영광을 다시 떨치기를 원했다. 따라서 그러한 목적으로 귀족 1천 명을 궁전으로 초대하였고 화려한 잔치를 베풀어 그들로부터 관심과 정치적인 지지를 얻으려고 하였다. 얼마나 멋진 잔치였겠는가?

이것을 영화로 찍는다면 영화의 장면은 벨사살 왕의 화려한 궁전으로부터 시작하여, 바벨론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의관을 갖추어 입궁하는 장면, 그리고 왕이 왕후들을 거느리고 위엄 있게 등장하면 귀족들의 하례가 있고 궁전 안에서는 요리사들이 산해진미를 나르고, 악사들은 음악을 연주하고 무희들은 춤을 추며 성대한 파티가 시작되는 장면으로 이어져 갈 것이다.
 

거룩한 잔이 쾌락의 잔으로

   
 

다니엘서를 기록했던 다니엘은 여기서 이 성대한 파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는 그곳에서 그들이 마셨던 술잔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을 하고 있다. 다니엘이 이것을 기록했던 이유는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함께 순간의 쾌락을 위해 사용했던 술잔들이 파티용으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벨사살의 부친이었던 느부갓네살 왕은 유대 백성들을 잔인하게 정복했던 왕이었는데, 그는 유대를 정복하고 수많은 귀족들을 포로를 끌고 오면서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던 하나님께 사용하는 제사용 기구들까지 탈취물로 뺏어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날 파티를 위해 벨사살 왕은 바벨론 왕궁 창고에 보관되고 있던 그 성전 기구들 중에 금 그릇을 가져오게 하였고 그것을 자신들의 쾌락의 술잔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즉 그들이 사용했던 술잔은 인간의 쾌락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되는 거룩한 잔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술을 마신 후에는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우상 신들을 찬양했다고 하였다(단 5:4).

벨사살 궁전에서의 파티는 왕과 귀족들에게는 즐거움과 쾌락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하나님의 신성은 모독을 당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능멸 당하는 죄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이 술잔으로 사용했던 금 그릇은 성별된 그릇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외에는 아무도 사용할 수 없는 특별히 만들어진 그릇이었다. 그러나 그 귀한 그릇이 창고에 처박혀 있다가 인간의 즐거움과 쾌락을 위한 잔으로 마구 사용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잔으로 술을 마시며 사람들은 우상을 찬양하고 있었다.
 

거룩한 영역의 오염

그러나 바벨론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죄악의 모습은 그때와 별 차이가 없다. 이 시대의 사람들도 형식과 모양은 다르지만 내용은 유사한 방식으로 여전히 하나님을 모독하고 그 이름을 능멸하고 있다. 수년 전에 한국에서는 한 외국 영화를 상영을 두고 영화수입업자와 교회 사이에 한참 씨름하던 영화가 있었다. 결국 그 영화의 상영은 비참한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은 <최후의 유혹>이라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예수님을 나약한 한 인간으로, 성적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 승천하여 우주와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세상은 이렇게 모독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수많은 책과 영상 매체들이 문학과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영역을 오염시키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성호를 모독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문제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교회 공동체 안에 있고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도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2장 초두에 보면 예수님이 엄청난 분노를 쏟으시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노끈과 채찍을 들고 장사하는 사람들과 돈 바꾸어주는 자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시는 분노의 주님을 만난다. 사실 이렇게 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성경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토록 분노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당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세속적 이기주의로 성전이 오염되고 성전이 경건의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모욕을 당하는 현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장면을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성전 안에서 청결하신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노끈과 채찍으로 사람들을 쫓아낸 것은 아니다. 성전에는 사람이 자주 모여야 한다. 예수님이 쫓아낸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다만 사람들이 만들어 낸 잘못된 제도였다. 당시 성전 안에는 두 가지 잘못된 제도가 성전을 오염시키고 있었다. 하나는 편리주의이며 또 하나는 상업주의였다. 편리주의와 상업주의는 늘 연결되어 있을 때가 많다. 거룩한 성전 안에는 제사와 기도라는 성스러운 일보다 종교세를 위해 큰돈을 작은 돈으로 바꾸어주는 편리주의, 그리고 제사의 명목으로 양이나 소를 판매하는 상업주의가 아무런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예수님은 언제나 겉으로 들어난 현상뿐 아니라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다. 그는 성전이 물질주의로 오염되고 하나님이 오히려 성전 안에서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고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요2:16). 성전을 이름 그대로 거룩한 집으로 회복하라는 것이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교회는 오염될 수 있다. 세속적인 편리주의와 상업주의가 교회 안에 마구 침입해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교회가 이러한 종교 바이러스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채찍을 맞게 될 것이다.
 

용도 변경의 죄악

고전 6:19-20에서 사도 바울은 믿는 성도들을 ‘성령의 전’이라고 하면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다. 이것이 우리 믿는 성도들이 이 땅에 거하며 사는 유일한 목적이다.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말고 이 세상에 살아야 되는 다른 목적은 없다. 우리는 밥만 먹고 그저 편하게 살기 위해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것이 삶의 목표의 전부라면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을 대단히 실망시키는 일이다. 만일 성도가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만족, 자신의 쾌락을 위해 산다면 그것은 단지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 없다”고 하였다(롬14:7). 따라서 만일 성도가 자신의 쾌락을 위해 일생을 산다면 그것은 용도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용도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평생 사용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용되지 않으면 그것은 용도 변경이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쾌락의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던 바벨론 궁전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높이며 그를 진실히 섬기던 사람이 있었다. 다니엘이었다. 그는 B. C. 606년경 20세의 나이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와 꿈 많던 청춘을 이국땅에서 보냈던 유대 왕족이었다. 그는 비록 포로 출신이었지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 벨사살 왕, 페르시아의 다리오 왕과 고레스왕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네 왕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왕의 측근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은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이 바뀌어도 왕의 신임을 연이어 받을 수 있었다는 데 있지 않고 우상의 나라 한복판에 살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굳게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온몸으로 증거하던 사람이었다는 데 있다. 신앙인은 누군가? 단지 믿음의 형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분별하고 오직 하나님을 높이며 사는 사람을 말한다. 다니엘이 그런 사람이었다. 다니엘은 세속의 더러움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도전하여 그의 신성을 모독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신성을 여지없이 모독하고 하나님의 것을 인간이 범하여 자신의 쾌락의 도구로 즐기던 벨사살을 향하여 파티 현장 한복판에 하나님의 경고장이 날아들었다. 다니엘서 5:5에 보면 “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났는데 그 손가락이 궁전 벽에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그 순간 인간의 쾌락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던 연회장이 두려움과 공포의 현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얼마나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혔는지 벨사살 왕도 “그 즐기던 빛이 변하고 번민하게 되면서 넓적다리의 마디가 녹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혔다”고 하였다(단 5:6). ‘무릎이 부딪혔다’는 말은 그가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을 뜻한다. 인간의 권력, 인간의 쾌락이 영원한 것 같지만 일시적인 것이다. 벨사살과 귀족들은 파티를 다 즐기기도 전에 그들의 쾌락이 끝이 나고 두려움과 공포에 빠지게 된 것이다.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다니엘

벨사살 왕은 두려움 속에서 벽에 쓰여진 글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싶었지만 그 뜻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벨론의 술객, 점쟁이, 그리고 당시 바벨론 최고의 지성인, 학자들을 총동원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왕의 공포와 근심은 더 커져갔고, 모든 귀족들도 절망하게 되었다(단 5:9). 그러나 그때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이 그 곳에 있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었다”고 하였다(단 5:12). 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의 총명함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태후는 그를 왕에게 적극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한동안 바벨론에서 사라진 인물이었던 다니엘이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밤하늘의 별처럼 세상이 어두울수록 더 빛을 밝게 드러낸다. 이 세상이 깊이 절망할수록 오히려 진가를 나타내게 된다.

세상은 화려해 보이고 뭔가 지혜가 있어 무슨 문제든지 해결할 것 같이 보여도 영적인 일에는 무지하다. 당시 대제국 바벨론에는 엄청난 학자들이 많이 있었으나, 정작 위기의 때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무도 벽에 쓰여진 글자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세상의 지혜는 그렇게 무력하다. 세상 지혜로 하나님 뜻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원한 착각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절대 그렇게 인간의 지혜나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이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고전 1:21).

그때 세상은 다니엘을 필요로 하였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모습이다. 평상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우습게 본다. 그들을 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해 버린다. 그들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그들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세상은 언젠가 반드시 그들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의 주님은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하였다(벧전 3:15).

만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즉 친구나, 가족이나, 직장 동료 가운데 그 누구라도 지금까지 한 번도 나에게 찾아와 “왜 그렇게 열심히 예수를 믿는지”물어본 적이 없다면 아마도 나는 잘못 믿고 있는 사람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뭔가 자기들하고 다르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 대해 궁금해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일 우리를 궁금해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르게 산 것이 없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다르고 또 그들이 가질 수 없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중국의 한 농부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돌아왔다. 그는 매우 성실한 농부였으며 예수를 믿은 다음에는 더욱 열심히 농사일을 하였다. 그해 가뭄이 들었을 때 그 농부는 열심히 강에서 물을 퍼 올려 그의 논에 물을 대었다. 그런데 잠을 자고 일어나면 그 논에 있던 물은 다 빠지고 옆에 있는 논으로 물이 흘러 들어가 있었다. 하도 이상해서 어느 날은 밤을 새면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 원인은 바로 옆 논의 주인이 논의 물꼬를 터서 자기 논에 물을 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몹시 분노했던 그 농부는 목사님에게 찾아가 상담을 하였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은 한참 생각하다가 “먼저 그의 논에 물을 대십시오. 그리고 형제의 논에도 물을 대면 좋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후에 그 농부는 옆 논에 물을 먼저 댄 후에 자기 논에 물을 대었다. 시간과 노력이 두 배나 들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옆 논의 주인이 그 농부가 다니는 교회에 찾아온 것이다. 그는 그 농부가 믿는 예수님이 대체 누구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농부는 그에게 예수임이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단지 예수를 믿는 자의 삶을 성실하게 살았을 뿐이다. 그에게는 그의 삶이 메시지 그 자체이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전도는 그런 방식으로 될 때가 많다. 이 세상은 믿는 자들에 대해 궁금해한다. 자기도 힘들 것인데 남을 도우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도 어려운데 남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살기 때문이다. 자기도 가난한데 남에게 뭔가 나누어주고 싶어서 못 견디기 때문이다. 자기도 심히 괴로울 것인데 남을 위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벨사살 왕은 다니엘이라면 그들이 당하고 있는 두려운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다니엘은 세상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반드시 찾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다니엘은 왕에게 불리어 가게 되었다. 벨사살 왕은 “네가 우리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물었다. “너에게는 신들의 영이 있어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으며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고 하는데 벽에 쓰여진 이 글을 읽고 해석하면 자주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드리우고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의 제안에 대해 5장 17절에 보면 “예물은 왕이 취하시고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하면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뢰리이다”고 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면 더 많은 예물과 상급을 왕에게 요구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 모든 것을 사양하였다. 왜 그랬을까? 만일 다니엘 이렇게 왕에게 예물을 받고 말씀을 해석하여 준다면 그는 바벨론의 점쟁이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점쟁이는 다 복채를 받고 하지 않는가? 요즈음 교계에도 기독교 무당의 수준급의 목사들이 있다고 한다. 그 연초가 되면 그 목사의 집에는 사람들이 돈을 싸 가지고 와서 줄을 선다는 것이다. 한 해의 사업이나 승진의 문제, 자녀의 문제가 잘 풀리도록 예언 기도를 받기 위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이 그 모든 것을 사양한 것은 손가락을 보내 글을 쓰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정확하게 해석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에 예물을 사양했던 것이다. 벨사살 왕은 다니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놀랐을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바벨론의 점쟁이들과는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이 시대의 목사들도 이 세상 종교인들이나 점쟁이들과는 그 차원이 본질적으로 달라야 한다고 본다.

다니엘은 그 글자의 해석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바벨론의 과거의 역사에 대한 것부터 말하기 시작했다. 다니엘 5:18절에 보면 다니엘은 벨사살 왕에게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업을 주셨다”고 하였다.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느부갓네살 왕이었지만 그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과 위엄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을 다니엘은 분명하게 선포하였다. 다니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니엘서의 주제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권을 가지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벨사살 왕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의 권세를 얼마나 크게 하셨는지 다니엘서 5:19절에 보면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다”고 하였다. 온 세상이 두려워할 정도로 그의 권세는 커졌다. 그러나 이렇게 왕의 권세가 높아지자 그는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해졌다. 결국 하나님은 “그의 왕위를 폐위시키고 그 영광을 빼앗기게” 하셨다. 그 결과 그는 쫓겨나 들판에서 살았고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에 젖었다”고 했다. 느부갓네살 왕은 이런 과정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즉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다.

다니엘이 “왜 벨사살 왕에게 이 같은 느부갓네살의 역사를 말하였는가?” 한 마디로 경고의 메시지이다. 벨사살의 왕권도 벨사살의 미래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려주고 그런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살지 말라고 왕에게 권면한 것이다.
 

영원한 슬픔의 세계로

왕궁의 벽에 쓰여진 것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이었다(단 5:25). 하나님을 대적하던 교만한 벨사살을 심판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들이 잔치하던 궁전 벽에다가 손가락을 보내 경고의 메시지를 쓰게 하신 것이다. 25절에 보면 그 기록된 글자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었다. 여기 ‘메네’(םנא)는 '마나'(םנא)라는 동사에서 온 분사형으로 “숫자를 카운트했다”는 뜻이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카운트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데겔'이라는 단어는 아람어로 '타칼'(תקל)이라고 하는데 ‘무게를 달다’는 뜻이다. 또 '우바르신'이라는 단어는 '우'는 '그리고'라는 뜻이다. '바르신'은 아람어로 '파라스'(פרס)라고 하는데 ‘나누다(divide)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은 직역하면 “숫자를 세고, 또 숫자를 세고, 무게를 달아보니 나뉘어졌다”는 뜻이다. 다니엘의 이 글에 대해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하나님이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왕의 나라가 나뉘어진다"는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결국 하나님이 보내신 손가락이 썼던 그대로 바벨론은 '메데'와 '바사'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벨사살에게는 매우 두려운 말씀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의 이런 해석을 듣고 벨사살 왕은 분노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다니엘에게 ”자주 옷을 입히고, 금 사슬로 그의 목에 드리우게 하고,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았다“고 했다. 그러나 벨사살은 그 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하나님이 그의 호흡을 거두어 가시므로 죽임을 당했다.

성경에는 그가 죽임을 당하게 된 이유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께 마음을 낮추지 않고 스스로 높여 하나님을 거역하였을 뿐 아니라, 성전의 그릇으로 술을 마시고 우상을 섬기면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단 5:22-23). 한마디로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살던 벨사살을 급하게 거두어가신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가 세운 계획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의 계획대로였다면 벨사살은 성대한 파티를 마치고 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조를 얻어 바벨론 제국의 힘을 결집시켜 제국의 영화를 다시 회복하는 기쁨을 맛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기쁨 대신에 한순간에 죽임을 당하고 다시 올 수 없는 영원한 슬픔과 고통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하나님이 호흡을 거두어 가시면 누구나 거기서 인생을 즉시 끝내게 된다.
 

하나님의 메신저 다니엘

다니엘은 하나님의 메신저였다. 세상을 향한 그의 메시지는 분명하였다. 그이 메시지는 언제나 하나님께 초점이 머물러 있었다. 하나님이 모든 인생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는 것을 선포하였다. 또한 만일 “인생이 하나님을 모독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할 수밖에 없음”을 선포하였다. 다니엘은 왕에게 불려가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자신의 출세를 위해 입에 발린 말로 아첨하지 않았다. 그저 왕이 듣기에 좋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본 것을 그대로 말했고 그가 깨달은 것을 분명히 전달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역시 거짓을 말하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하게 되었을 것이다. 거짓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다니엘의 위대한 점은 상대가 누구이든지 상관없이 언제나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데 있었다.

‘15분’이라는 제목의 연극이 있다. 스토리는 이렇다. 한 유망한 청년이 박사학위 청구 논문을 제출하고 그만 중한 병이 들었다. 의사의 진찰 결과 그는 15분 후면 죽는다는 것이다. 시간은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쉴 틈이 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의사에게 계속 묻고 있었다. “이제 몇 분 남았습니까?” “14분입니다.” “이제 몇 분 남았습니까?” “13분입니다.” 그때 전보 한 장이 날라 왔다. 억만장자인 그의 삼촌이 죽었는데 자식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재산을 상속하라는 유언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갈 수 없었다. 째깍째깍 계속해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이제 몇 분 남았습니까?” “9분입니다.” 그때 두 번째 편지가 날라 왔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패스했다는 통지였다. 그리고 또 조금 있다가 세 번째 편지가 날라 왔다. 그의 애인으로부터 그와 결혼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는 그가 바라던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었다. 엄청난 유산도, 학위도,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도 다 얻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인생이 다 끝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벨론 제국의 왕 벨사살 그는 모든 것을 소유한 인생이었다. 돈, 명예, 권력, 그에게는 인생이 바라는 모든 것이 주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독하다가 인생이 꺼져가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모든 것을 다 얻었어도 하나님 없이 살거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의 인생의 용도를 잘 못 사용하면 그 인생은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인생도 아무리 길어 보이지만 어쩌면 15분짜리 인생일지 모른다. 마지막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수많은 유혹이 그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세상 한복판에서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 일생을 살 수 있었던 영성을 지니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가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이나 세상의 권력을 믿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믿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유대 왕족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왕의 총애를 받고 제국의 총리가 되었던 사람이다. 그것도 바벨론에 이어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많은 왕들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세상 권력이 충돌할 때 권력에 기대지 않았다, 그는 아무리 높은 권력에 있어도 그 권력에 노예가 되지 않았다.

사자굴에 들어가는 상황에서도 일시적으로 살기 위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 이유는 다니엘은 제국의 흥망성쇠를 눈으로 보면서 땅의 나라가 아무리 강해도 영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 영원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바벨론이나 페르시아 제국이 아무리 화려하고 거대한 나라일지라도 언젠가 무너질 날이 있기에 그는 세상 나라에 기대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니엘이 보여준 영성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의 한복판에서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성으로 제국을 능가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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