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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배려의 영성(1)

기사승인 2021.05.18  11: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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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동섭 교수의 선교 논단

방동섭 교수/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역임, 글로벌 비전교회 담임
 

   
▲ 방동섭 교수

몇 년 전 한국에서는 공정과 정의의 상징이며 또 참신성과 투명성의 상징이었던 한 시민운동가의 도덕적 몰락이 큰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가 딸처럼 생각하던 한 여대생을 성추행한 것이다. 그는 모 대학의 교수로서 환경 운동가로 일해 왔으며, 한때 총선 시민연대의 대변인으로 문제가 있는 국회의원 후보에 대해 낙천, 낙선 운동을 위해 열심히 뛰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늘 다른 정치인들에게 목소리를 높여 “바꿔야 한다”고 공격하던 사람이었지만 결국 자신이 바꾸어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그렇게 여대생을 성추행하고도 그의 대답은 “술김에 부인인 줄 알았다”고 대답하였다. 소매치기범도 남의 주머니 털다가 걸리면 “내 주머니인 줄 알았다”고 말하면 다 되는 것인가?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사람들을 죄악으로부터 건지시기 위해 오셨다. 따라서 예수님을 모신 곳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나 현재로 나타났으며 문제가 해결되고, 불완전이 완전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실천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선교 운동에도 때로 장애물이 있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2장에 보면 하나님 나라의 선교 운동에 있어서 장애물이 있다면 오히려 예수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장애물은 영어로 ‘obstacle’이라고 한다. 이것은 라틴어로 ‘길’을 의미하는 ‘ob’와 ‘서다’는 뜻의 ‘stare’의 합성어로 한마디로 “길을 막아선다”는 뜻이다.
 

무서운 영적 이기주의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길을 막아서고 방해하고 있었는가? 예수님이 가버나움이라는 도시에 오셨을 때 병 고침을 받기를 원하는 중풍병자가 있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만나고 싶었지만 스스로는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친절하게도 친구들이 그를 들것에 매어 예수님께 데려다주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곳에 그를 데리고 갔을 때 거기에는 큰 장벽이 놓여있었다. 예수님을 둘러싼 엄청난 인파가 그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단지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다 좋은 일은 아니다. 어떤 종류의 사람이 모였는지가 중요하다.

   
 

여기 예수님 주변에 모인 많은 사람들을 보면 주님께 보다 가까이 나가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들어난 모습일 뿐이다. 조금 깊게 들어가 보면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그 정체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이 한 집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그 집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는 정도로 복잡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 중풍병자가 마지막 소망을 붙들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 들것에 실려 온 것이다. 한 마디로 위급한(emergecy)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는 누구든지 도울 수 있다면 그를 도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무서운 영적 이기주의를 만난다. 예수님의 말씀을 한마디라도 더 듣기 위해 예수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나가려고 애를 쓰는 그 무리 가운데 약한 자를 위한 사랑과 배려의 공간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이기주의가 지금 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교인들이 설명하는 예수를 믿지 않고 그들이 보여주는 예수를 믿고 싶어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메시지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 교회가 보여주는 예수님의 모습은 무엇인가? 어느 큰 교회는 예배드리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 남의 집 앞이나 아파트 주차장에 무단으로 차를 세워 이웃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다. 예배를 드리러 온 것은 좋은 일이지만 남의 집의 주차 공간을 차지하고 길을 막고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잘못된 메시지를 그 이웃에 전하는 것이다.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힘들게 찾아왔던 그 현장에도 그를 위해 마련된 공간은 없었다.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었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더 이상 빈자리가 없었다는 뜻이지만 사실은 자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엄청난 무리 가운데 그 불쌍한 병자를 위해 자리를 제공할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다. 모두가 예수님에게는 깊은 관심이 있었지만 정작 예수님의 배려와 사랑의 마인드를 실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영적인 사기꾼이 되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하였다(약 1:22).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현장에서 모두가 그이 말씀을 듣는 것에 관심이 있었지만 모두가 영적인 이기주의에 함몰되어 있었다.
 

세속주의와 종교적 영성의 결합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은 영적 이기주의라고 생각한다. 영적 이기주의는 세속주의와 종교적 영성이 결합하여 화학적인 반응을 일으킬 때 나타난다. 사실상 이 두 가지는 극과 극인데 이상하게 그 두 가지가 교회 안에서 잘 결합되고 있다. 그래서 무늬는 매우 영적인 모습이지만 실제는 철저한 세속주의 경향을 가진다. 그런 경우 종교적 열심은 대단하지만 그러한 종교적인 열심은 단지 자신 안에 숨겨진 세속적 가치를 위해 사용될 뿐이다. 예를 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는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 자신의 다단계 판매조직을 위해 뛰고 있던지, 많은 헌금을 내고 앞장서는 것 같았는데 결국 자신의 비즈니스와 깊은 연관이 있으며, 자신의 어떤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과 말씀을 이용하는 사람의 차이

교수로 일하다 보니 상담을 자주 하게 된다. 어느 날 나이가 좀 있는 한 여학생이 상담을 요청했다. 그 학생은 경기도에 있는 유명한 장애인 시설의 원장 부인이었다. 그 남편은 장애인을 위해 태어났고 장애인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장애인의 자상한 아버지처럼 거룩한 모습으로 행세하고 있었지만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장애인을 학대하고 지금까지 많은 교회들이 헌금한 것을 유용하여 자신의 땅을 사들이고 있었다. 장애인들에게 식당에서 버리는 음식을 얻어다 먹이면서 장애인을 은밀하게 학대하였다. 그의 아내가 이것을 문제를 삼으니까 수없이 그녀를 구타하고 칼을 휘둘러 얼굴에 상처까지 있었다. 심지어 자원 봉사자인 한 여 집사와 불륜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심지어 목사안수를 받은 적도 없는데 목사라고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애인 시설에 대해 많은 교회 성도들이 방문하여 돕고 헌금하고 있으며 그때마다 자신의 남편은 은혜롭고 인자한 목사님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아내는 너무 무서워서 말도 못 하고 지금까지 숨죽이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제는 자신의 남편을 고발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 학생과 상담을 하는 중에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 이런 세속주의적 이기주의 혹은 반인륜적 죄악이 영적인 모습으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포장될 수 있는가? 장애인의 가장 큰 장애물은 때로 ‘장애인을 돕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가버나움 현장에서도 말씀대로 살려고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보다 그 말씀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이다. 재미있으라고 한 얘기일 것이다. 대충 이런 이야기이다. 등산을 좋아하는 여대생이 있었다. 차를 몰고 어느 산에 갔다. 주차 공간이 없어서 망설이는데 어느 장소에 차들이 쭉 서 있었다. 물론 주차금지 구역이었다. 차들마다 위반 딱지를 하나씩 차창에 붙이고 있었는데 이 여대생이 희한한 머리를 썼다. 주차금지 구역에 주차되어 있던 차에 이미 붙어있던 딱지를 떼어 자기 차에 붙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유히 산으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등산을 마치고 내려와서는 자기 차의 딱지를 떼어 그 차에 다시 붙이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야단칠 줄 알았던 어머니가 “잘했다. 역시 너는 머리 좋은 내 딸이야!” 하면서 칭찬하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의 한 단면일 수 있다. 그래서 요즘 머리 나쁜 사람들은 살기 힘들다고 한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핑핑 돌아가는 두뇌로 고차원의 사기를 치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소위 ‘왕따’를 당하는 사람 중에는 오히려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당하는 사회적 고난은 너무 크고 고통스럽다. 그들이 받는 가장 큰 충격은 “정직하게 살아도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가 아닐까 싶다. 희한하게 머리 쓰면서 ‘자기만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적 사고방식이 세상에서 지배 논리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회개 과정 없이 교회 안에 들어와 똑같은 방식으로 교회의 일군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를 위해 열심을 낼수록 하나님의 나라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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