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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변화: 초기 한국 기독교와 가정

기사승인 2021.05.18  11:5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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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복음주의협의회 5월 정례회, 박명수 교수 논문

박명수 교수/ 한복협 교회갱신위원장, 서울신대 명예교수

 

한국복음주의협의회 5월 월례회가 ‘건강한 가정을 위한 기독교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지난 5월 14일 오전 7시에 한국중앙교회(임석순 목사)에서 열렸다. 이번 월례회에서 발표된 박명수 명예교수(서울신학대학교)의 ‘놀라운 변화: 초기 한국 기독교와 가정’이란 발제문을 게재한다. 이 발제문은 박명수 교수가 2006년 12월에 [역사신학논총]에 수록된 논문이다. 박 교수는 이 논문을 통해 기독교가 조선 후기에 전파되기 전에 차별과 핍절의 삶을 산 여성들의 삶을 조명하고,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파격적으로 달라지는 것을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그것이 가정에서 건강한 가정을 이루는 밑바탕이 된 것을 조명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가정을 이념적으로 바꾸려는 세태에 올바르고 건강한 가정을 조명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편집자 주-

 

   
▲ 박명수 교수

들어가는 말: 조선의 오두막집에 비춘 새로운 서광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 기독교의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장소는 가정일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간 가정은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형태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가정에서 시작한 변화는 곧 이어 사회의 변화로 이어졌으며, 더 나아가서 민족의 변화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교회사가들은 기독교가 사회와 민족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해왔다. 하지만 가정의 변화에 미친 영향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사회와 민족에 미친 영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사회의 가정은 남자 중심의 가정이었다. 남자는 가장 이었고, 남자를 생산하는 것은 여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으며, 여자는 그 남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의무였다. 소위 삼종지도라는 것이 그것이다. 여자는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젊어서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늙어서는 아들에게 순종하라는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여자의 일생은 한 많은 일생일 수밖에 없으며,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슬픈 일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와서 이런 개념이 깨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근대적인 의미의 가정이 시작되었다. 한 선교사는 기독교의 복음이 한국의 가정을 변화시킨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기독교는 한국남성들에게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 도박, 음주, 기타의 잘못된 죄악들은 완전히 중단되고 있다. --- 그리해서 [조선의] 작은 오두막집은 이 짓밟히고, 뭉개진 불쌍한 여성들을 위한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한 작은 항구가 되어갔다. 한국의 여성들은 이런 발전을 꿈꾸어 보지 못했다.”( “Wonderfull Transformation," Electric Messages (January 1909), 10.)

본 논문은 기독교가 이 땅의 가정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 글은 주로 선교사들의 글을 인용하였다. 선교사들은 당시의 한국여인들의 모습을 너무나 가슴 아프게 생각했고, 그리해서 여기에 관한 글들을 많이 남겨 놓았다. 초기 선교사들, 특히 여자선교사들이 한국 여성들과 그들에게 미친 기독교의 영향을 연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연구분야가 될 것이다.
 

I. 변화의 근거: 새로운 종교

한국의 남성 중심 세계관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동양의 종교였다. 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여성들은 해탈할 희망이 없다. 여성은 전생의 업보에 의해서 여성으로 태어났으며, 현생에서 선행을 쌓으면 남자로 환생할 수 있다. 따라서 선량한 여성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며, 운명을 거부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Lizzie Pearce, "Women's Work in the Orient," Oriental Missionary Standard (January 1918).

   
 

불교보다도 더 철저하게 여성을 차별한 것이 유교의 윤리이다. 유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다 격(格)이 있으며, 남자의 격과 여자의 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여자들을 남자들과 같은 차원에서 대우한다는 것은 유교의 근본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여자는 남자와는 다르기 때문에 여자는 유교의 가장 중요한 예식인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 이런 남여 차별의 철학적인 근거는 음양이론에 있다. 유교에 의하면 양은 남성적이고, 적극적이며, 긍정적이다. 여기에 비해서 음은 여성적이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다. 이 음양의 조화에의해서 세상은 이루어진다. 하지만 음양에 있어서 각자의 위치는 분명하다. 양은 지배의 위치에 있고, 음은 순종의 위치에 있다. 이것을 거역하는 것은 천리를 거역하는 것이다( Herber Jones, "The Status of Women in Korea," Korea Repository, vol 3 (June 1896), 223-229.

그러나 유교가 여자들을 철저하게 억압한 데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고려 말 불교는 타락했고, 성은 문란했다. 따라서 새로 시작한 조선은 유교를 내세워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제한하였다. 특별히 젊은 여자들의 활동은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어린 여자아이들과 늙은 여자들은 이런 제약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젊은 여자들은 가정에 갖혀 있어서 철저하게 통제된 삶을 살아야 했다.

감리교선교사 존스는 “조선에서 여성의 영역은 어떤 외부인도 들어갈 수 없고, 여인은 그곳에서 나갈 수 없다는 점에서 감방과 같다”고 말했다(Jones, "The Status of Women in Korea," 224-225).

하지만 기독교는 불교나 유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독교는 인간은 남자와 여자 다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되었음을 믿는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다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았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말세에 남종과 여종에게 다 같이 그의 영을 부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살던 한국 사람들에게 엄청난 복음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왔을 때, 그리고 남녀가 같은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을 때, 여기에 대한 여성들의 해방감은 대단하였다. 기독교 예배에서 여자들은 당당한 자기의 자리가 있었던 것이다. 여자들은 예배당에 모여서 목소리를 높여서 자기들을 구원하신 예수님을 찬양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예배당에서만 복음이 아니었다. 기독교는 남성 중심의 가정을 변화시켰다.

선교사들은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오기까지는 한국에서 서구식의 가정(family)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동양선교회 여자선교사였던 옥스(Annie Oakes)는 “한국에는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와 친교를 나누는 영어의 가정(family)에 해당하는 개념이 없다. 한국의 집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하나는 남자들을 위한 공간이요, 다른 하나는 여성들을 위한 별도의 공간이 있다”고 말한다( “Mrs. Kwak's Fearless Ministry," OMST (June 1918), 13.).
 

II. 없애야 할 습관: 조혼

조선의 여성들에게 결혼은 결코 기쁜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한 조선 여자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여인의 삶은 두 번 후회할 때가 있다. 한 번은 날 때이고, 다른 한 번은 시집갈 때이다.”(Janice Vere Hilburn, "A Popular Korean Product," Light of the East (Seoul: Sahn-Bo Publishing House, 1972), 180; 마서 헌트리, [한국 개신교 초기의 선교와 교회성장] (서울: 목양사, 1985), 154.).

조선 여자들에게 결혼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남편과의 만남이 아니다. 결혼은 시어머니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교육을 받은 여자일지라도 자녀에 대한 자신의 권리조차 행사하지 못한다.

여선교사 니스벳은 “한국에서 시어머니는 여왕벌에 해당된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했다(애너벨 니스벳, [호남 선교 초기 역사: 1892-1919] (서울: 도서출판 경건, 1998), 203.).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다른 집으로 팔려가서 아기를 낳고, 노동을 제공하는 것이다. 만일 여자가 아기를 낳지 않고, 노동이 시원찮다면 그것은 시집에 큰 손해를 끼치는 것이 된다. 선교사들에게 결혼이란 노예로 팔려가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되었다. 그들은 미국에는 흑인 노예가 있고, 조선에는 여성 노예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시집가는 날은 슬픈 날이 되는 것이다.

조선에서 결혼은 결코 개인의 일이 아니다. 남녀의 사랑은 결혼에서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다. 결혼은 종종 가문과 가문의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아내 될 사람은 결혼 전에 남편 될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많은 경우 결혼식장에서 여자는 처음으로 자신의 남편될 사람을 처음 보게 된다. 선교사들은 한국 결혼식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여자가 남자의 얼굴을 결혼식장에서 처음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불행한 결혼의 밑바닥에는 조혼풍습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의 풍습에 의하면 10살이 갓 넘으면 혼처가 정해지고, 자녀는 거기에 순종해야 한다. 초기 기독교는 이 조혼 풍습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펜셀러가 발행했던 [조선그리스도인 회보]에는 조혼은 자식을 죽이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지적하였다(“엡윗청년회: 조혼론,” [조선그리스도인 회보] (1899년 4월 19일). 유대영, “한말 기독교신문의 문명개화론,” [한국기독교와 역사] 22호(2005), 34.).

또한 언더우드가 발행하는 [그리스도신문]에도 또한 조혼은 ‘마귀에게 붙잡힌 자의 행하는 일’이라고 지적하면서 자식의 결혼을 부모가 좌지우지하는 것은 ‘멸망한 가운데’서 되어지는 것이며, 남녀가 대면하여 뜻에 합당한 대로 하는 것이 ‘참 이치’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지적한다(“결혼에 두는 악습,” [그리스도신문] (1902년 4월 10일), 유대영, “한말 기독교신문의 문명개화론,” 34-35.). 다시 말하면 결혼은 부모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결정해야 하며, 이것은 남녀가 서로 대면한 다음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결혼은 남녀가 다 같이 성숙한 다음에 행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스도신문]은 결혼은 몸과 마음이 다 성숙한 다음에 해야 하는 것으로 어린아이를 결혼시키는 것은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도 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런 조혼의 풍습은 미개한 국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조선은 빨리 여기에서 벗어나야 문명국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유대영, “한말 기독교의 문명개화론,” 35.).

초기 기독교 신자들 가운데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여 자신의 결혼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것은 한국 최초의 여자 의사인 김점동(박 에스더)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감리교 여선교사인 닥터 셔우드의 조수였던 김점동은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때 떠돌이 노동자였던 박유산(홀박사의 조수)과의 결혼을 강행하였다. 김점동은 신분의 귀천보다 신앙의 유무가 더 중요했고,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사람 박유산과 결혼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박 씨를 저의 남편으로 삼고자 하시면 저의 어머니가 반대하신다고 할지라도 저는 그의 아내가 될 것입니다. 저는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지체가 높거나 낮거나 개의치 않습니다. 제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을 줄을 당신은 아시지 않습니까?”(셔우드 홀, [닥터 홀의 조선회상] (서울: 동아일보사, 1985), 99.).

여기에서 우리는 결혼이 가정의 선택에서 개인의 선택으로 바꾸어지고 있으며, 그 중요한 기준으로는 신앙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김점동은 한국 최초의 여자 의사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조혼을 반대하고 새로운 결혼을 장려하였다. 1928년 베른하이젤 선교사는 새로운 결혼식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신랑과 신부는 결혼식 전에 한 번 만났고, 결혼에 동의했다. --- 둘 다 성년기에 이른 사람들로 신랑은 22세이고, 신부는 20세이다. 이러한 결혼은 교회 내에서도 조금 이상스러웠고, 교회 밖에서는 들어볼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나는 교회 내의 젊은 처녀들이 완전한 성년기에 들어선 후에 결혼하는 것이 여성들 자신에게 엄청나게 큰 이득이 온다는 것을 교회 내 처녀들에게 알려 줌으로서 점점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게 되었다. --- 조혼과 가족에 대한 책임을 일찍이 떠맡음으로 [조선여성들의] 완전한 성장에 큰 장애가 되었다. 이제는 충분한 교육도 받고, 육체적으로도 성숙해지고, 다른 면에서도 결혼에 적합하게 되었다.”( Bernheisel Letter (December 4, 1928); 헌트리, [한국 개신교 초기 선교와 성장], 164-165.).

이런 조혼에 대한 반대는 교회의 법으로도 규정되었다. 초기 성결교회의 헌법에는 이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성결교회는 국법으로 제정된 법률을 좇아 남자는 18세, 여자는 17세가 된 때에 행하는 혼인을 시행하고, 조혼(早婚)의 악습을 멀리할 지니라.”[조선야소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임시약법] (1933), 23.)
 

III. 고쳐야 할 관계: 부부

전통적인 한국의 가정에서 부부는 인생의 동반자가 아니다. 남편은 가장이고, 아내는 단지 그의 사람일 뿐이다. 조선의 양반이면 누구나 배우는 동문선습에 의하면 “남자는 아내를 지배함으로써 명예를 얻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함으로써 명예를 얻는다”고 되어 있다. 여자가 남자와 대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결혼 초기에 남편은 아내가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그래서 결혼 초의 잠시 동안의 동거 후에 오랫동안 여자로 하여금 혼자 있도록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 아내가 남편과 동행하는 일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Martha Huntley, To Start A Work: The Foundations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84-1919 (Soeul, Korea: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1987), 240.).

전통적인 조선사회의 가족관계는 부자의 관계였다. 여기에서 여성의 역할이라는 것은 부자관계를 돕는 위치에 불과했다. 기독교는 여기에 근본적으로 도전했다. [그리스도신문]은 부부관계가 인륜의 으뜸인데 조선 사회에서는 아내를 대접하는 자세가 친구 관계보다도 못하고, 심지어는 노복보다도 못하다고 지적하면서, 서양 남자들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보면서 이것을 조롱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유는 조선 사람들이 남녀의 귀천이 없다는 성서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론셜: 상쥬,” [그리스도신문] (1901년 1월 3일); 유대영, “한말 기독교의 문명개화론,” 35.).

초기 한국교회는 이런 잘못된 부부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무어 선교사가 [그리스도신문] 교회통신란에 기고한 글을 보면 황해도 평산 감바위 교인들이 모여서 결정한 것이 기록되어있다. 무어 선교사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골 풍속은 부인들이 모두 밥 먹을 때에 방에 앉아서 편안히 먹지 못하고 부엌에 나아가 흙 상에 놓고 먹는 것과 남편은 아내에게 항상 낮춤말을 하고 아내는 항상 남편에게 높임말로 대답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안다. 이 법이 처음에 어떻게 나타난 바 되었는가를 생각한즉 혹이 가로되 한 사람의 말이 여편네가 남편에게 매를 맞지 아니하면 여우가 되어 남편을 업신여기고 말을 듣지 아니한다 하니 그 뜻으로 여인들을 이렇게 대접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믿기 전에는 이렇게 조치하였다 할지라도 지금은 성경의 뜻을 안즉 이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동네 외인들이 흉볼지라도 이후부터는 이 두 가지를 버리고 밥 먹을 때에 부인들도 방에 들어와 남편과 같이 편안히 앉아서 먹기로 작정하자 한즉 일심이 되어 그대로 하자("교회통신,“ [그리스도신문] (1901년 6월 20일)).

무어 선교사는 이렇게 말한 다음에 참석한 여러 부인에게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하여 부인들은 찬성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대답이 없어 무어 선교사는 “다시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중의 한 여인이 “마음이 너무 기뻐서 대답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 아내가 남편과 대등하게 앉아서 부부간에 서로를 존중하여 대화하는 것은 복음이 들어오면서 생긴 새로운 모습이었다.

많은 남자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변화를 주도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남편은 아내를 같은 밥상에 초청했다. 그러면 아내는 “만일 내가 당신과 함께 식사를 하면 나는 이 동네에서 살 수 없어요. 사람들이 우리를 흉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한국기독교의 가정에서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기독교인의 가정에서는 남자들만이 먹을 수 있는 전통적인 밥상을 치우고, 온 식구가 함께 먹을 수 있는 새로운 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상에서는 아내와 어머니가 정당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남장로교의 니스벳선교사는 이 새로운 밥상을 볼 때마다 “모든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애너벨 니스벳, [호남 선교 초기 역사: 1892-1919], 202-204.).

전통적인 한국부부는 서로 말도 나누지 못하고, 함께 걷지도 못하는 관계였다. 이것은 동반자가 아니다. 특히 한국의 젊은 부인은 남편에게 말을 걸지 못하도록 되어있다. 남장로교 선교사 부인인 니스벳은 자기의 한국여자 친구가 “결혼 후 2년이 지나서야 남편이 자신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니스벳, [호남 선교 초기 역사], 203.).

하지만 기독교 가정에서는 새로운 일이 생겼다. 그것은 남편이 아내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이다. 아내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은 조선사회에서는 흉이 될 사건이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디선교사의 조사였던 윤선근은 자신의 아내를 사랑했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아내에 대한 사랑을 고백했다. 전통적인 한국인들은 이런 행동은 체면을 손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윤선근은 아내를 무시하는 것을 일상사로 삼는 조선 땅에서 진정으로 크리스천은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R. A. Hardie's Report," Minutes of the 8th Annual Meeting of the Korea Mission of the MECS (1904), 28-29.).

기독교인이 되어서 아내를 사랑하는 모습은 다음의 기록을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은 남편은 아내가 바느질을 잘 할 수 있도록 불을 밝혀주고, 창호지로 된 문에 유리창을 달아주어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해주고, 대문 가까이에 우물을 파주어 물 긷기가 좋도록 해주며, 아내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며, 아내를 사려 깊고, 비이기적인 사랑으로 대우하기 시작한다.”(“Wonderfull Transformation," Electric Messages (January 1909), 10). 초기 한국교회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했다.

전통적인 한국 가정에서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헌신해야 했다. 특별한 경우이긴 하지만 기독교 가정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헌신한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위에서 잠시 언급한 한국 최초의 의사 김점동의 경우이다. 1894년 12월 홀부인은 김점동과 그의 남편 박유산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김점동이 의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다음 해 2월 에스더는 공립학교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공부를 시작하였고, 또한 라틴어, 물리학, 수학 등은 개인교사를 고용해서 특별지도를 받았다. 이때 남편 박유산은 농장에서 일하며 아내의 학비를 마련했다. 결국 1896년 10월 에스더는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현 존스홉킨스 의대)에 입학하였다. 김점동이 의학을 공부하는 동안 남편은 볼티모어의 식당에서 일하며 아내를 도왔다. 그러다가 그는 폐결핵에 걸렸다. 결국 그녀의 졸업을 앞두고 박유산은 이국에서 세상을 떠났다(셔우드 홀, [닥터 홀의 조선회상] (동아일보사), 127; 144.). 아마도 그는 아내의 학비를 벌기 위해서 일하다가 죽은 최초의 한국남성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전통적인 남녀관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은 아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전통적인 의미에서 한국여성들은 남자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단지 남자들이 무서웠을 뿐이다. 하지만 예수를 믿고 나서 여성들은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이것은 아현성결교회에 다니던 최은애의 경우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그녀는 남편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편 몰래 패물을 감추어 놓았다. 이것이 사실 그 가정의 화근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안 남편은 끊임없이 그 패물을 내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최은애는 결사적으로 이것을 감추었다. 그러던 어느 날 최은애는 1923년 교회에서 열리는 부흥집회에 참여하게 되었고,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 패물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 패물을 팔고, 그것의 일부분으로 남편에게 옷도 사주고, 선물도 해주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진실된 사랑을 표현하였다. 이것으로 그 가정은 평화를 찾게 되었다(“토굴 속의 은총”은 [활천] 1915년 4월에서 6월호에 이르기 까지 3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IV. 잘못된 관계: 축첩

조선사회의 가장 비극적인 가족제도 가운데 하나가 축첩제도였다. 조선사회에서는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한 첩을 거느릴 수 있었다. 하지만 축첩제도는 가정의 불화의 근원이었다. 첩이 있는 한 본 부인은 평안하지 못하다. 그래서 시앗을 본 여인의 가슴은 멍들어 있는 것이다. 첩도 본 부인의 시샘과 차별 가운데 살아야 한다. 오죽하면 첩살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또한 본 부인의 자녀와 첩의 자녀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일어난다. 그래서 가족 간의 갈등은 대를 이어가며 지속된다.

구한말 축첩제도의 또 다른 근본적인 원인은 조혼이었다. 결혼은 거의가 집안의 어른이 결정해주는 배필과 아주 어린 나이에 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경우 부부 사이에 별다른 정이 없게 마련이다. 그래서 남자가 장성하여 자기가 어느 정도 결정권을 갖게 될 경우, 자기의 마음에 맞는 여자를 골라 다시 장가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이 축첩이다. 한국 초대교회의 문제는 이런 사람들을 교회 회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본 부인과는 정이 없는 반면에 첩과는 애틋한 사랑이 넘쳤다.

물론 기독교는 처음부터 축첩제도를 반대해 왔다. 일단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첩을 얻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미 본 부인과 첩을 데리고 사는 사람이 교회에 나오고자 할 때, 그런 사람을 받아주어야 하는가 거부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고민스러운 문제였다. 만일 첩을 보내야만 한다면 그 첩과 첩의 자녀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만일 그냥 용납한다면 성서의 일부일처제도는 무너지고 마는 것이 아니가?

한국교회의 초대선교사들 사이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한 심각한 논란이 있었다. 장로교선교사 스왈렌(William Swallen)은 성서는 일부일처제를 주장하지만 구약성서에는 일부이처의 경우도 있으므로 이미 첩이 있는 사람은 그대로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첩을 보내게 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축첩은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물론 인간적으로 생각해 볼 때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여인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첩을 보내야 교회에 입교할 수 있도록 결정하였다.

문제는 첩을 두고, 동시에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빠진 대표적인 경우가 김영진의 경우이다(니스벳, [호남 선교 초기 역사], 126-130.). 그는 서울에 본부인과 딸을 두고 목포에 내려와서 매력적인 젊은 여자와 결혼해서 아들, 딸 남매를 두었다. 그 뒤 그는 기독교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첩의 문제였다. 그는 첩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씨는 오랜 갈등 끝에 첩에게 자기의 결심을 말하고, 자기의 재산과 자녀를 첩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본부인을 내려오라고 해서 같이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첩의 가족은 분노하여 김 씨를 칼로 위협했다.

그러나 한번 믿음대로 살기로 작정한 김 씨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 김 씨는 비록 첩과 헤어졌지만 첩의 생활비를 모두 책임져 주었다.

결국 이런 김씨의 태도에 감화를 받아 첩과 그의 어머니까지도 다 같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김 씨의 첩이었던 여인은 기독교병원의 간호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뒤에 김 씨는 선교사 변요한(Preston)의 조사가 되어 순천으로 와서 순천지역에서 가장 유력한 기독교인이 되었고, 1918년에는 순천교회 장로가 되어 훌륭한 교회의 지도자로서 많은 일을 하였다. 순천으로 이사한 다음에는 한 번도 목포에 들리지 않았다. 교회의 지도자로서 악의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남자는 첩과 헤어져야 했지만 동시에 여자는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첩 생활을 해서는 안 되었다. 함경북도 웅기에 사는 어느 부잣집 소실의 이야기이다. 이 여인은 남편에게서 3남매를 두고 있는데 이 집회에 참석할 때까지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집회에 참석한 후에 첩으로 사는 것이 죄악이라는 것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서 남편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화가 난 남편은 이 여인을 빈손으로 쫒아 내 버렸다. 이 여인은 콩나물 장사를 하면서 묵묵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편이 세상을 떠날 병에 걸리게 되었고, 이 여인을 불러서 자신의 3남매를 위해서 자신의 재산을 절반을 나누어주었다. 이 여인은 이제 신랑되신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면서 살았다(이성봉, [말로 못 하면 죽음으로]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3), 71-72.).

기독교인이 된 본 부인도 첩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이성봉 목사가 만주 혜림교회에서 집회할 때에 들은 이야기이다. 이 교회에 나정순이라는 매우 마음씨가 고운 여집사가 있었다. 그런데 그의 남편은 이런 착한 아내를 놔두고 어디서 소실을 하나 데리고 왔다. 게다가 밤마다 나 집사에게 자리를 깔아 놓으라고 요구하고, 밤새 두 사람이 희희덕거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 집사는 조금도 남편을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 전도대상자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고 감사기도를 하고, 이 소실을 자기의 동생과 같이 여기며 교회에 데리고 나갔다. 또한 글도 가르쳐 주어서 성경을 읽게 하였다. 또한 남편이 소실과 더불어서 윗방에서 잠을 잘 때 이 나 집사는 이들의 영혼을 위해서 밤새도록 기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마음에 변화가 생겨서 갑자기 소실이 보기 싫은 생각이 들어 자신의 소실을 향해 나가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소실은 기뻤다. 사실 이 소실은 큰 부인을 따라 교회에 나가면서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남편을 떠나고자 했는데 남편이 놓아주지 못해서 헤어지지 못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나가라고 하니 얼른 짐을 꾸려 갈 준비를 하였다. 헤어지면서 이 소실은 나 집사를 붙잡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형님 집에 왔다가 이렇게 큰 구원을 받고 가게 되었으니 영감 떨어지는 것은 시원해도 형님 떠나는 것은 섭섭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울었다.

소실을 돌려보낸 다음에 나 집사의 남편도 마음을 돌이켜 이성봉 목사의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돼지만도 못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좋은 부인을 두고 더러운 행동을 했으니 천벌을 받아 마땅합니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통회 자복하였다. 이렇게 해서 온 가정이 구원을 받았고, 더 나아가서 교회도 크게 부흥하였다( 이성봉, [말로 못 하면 죽음으로], 72-73.).

첩 문제는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문제였다. 특히 대부분의 양반은 첩을 데리고 살았고, 현실적으로 첩과 헤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양반들은 처음에는 첩과 헤어지겠다고 약속을 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지만 다시금 본래의 상태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는 이런 경우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규암성결교회(당시는 전도관)를 세운 김성기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김성기는 구한말 찬정의 벼슬을 지낸 사람으로 첩의 권유를 따라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김성기는 본 부인에게도 교회에 나가자고 말했다. 본 부인은 이것을 거절했다. 그는 만일 자신이 교회에 가게 되면 죽어서 첩과 같은 곳에 갈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부인은 첩을 질투했고, 아편을 먹고 자살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마음을 바꾸어 신앙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다.

김성기는 고향으로 내려와서 이곳에 교회를 세우려고 결심하고 동양선교회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동양선교회는 김성기에게 첩을 데리고 사는 한 세례를 줄 수 없고, 김성기를 중심으로 해서 교회를 세울 수 없다고 말했다. 신앙으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첩과 헤어지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첩과의 사이에는 아이가 있었다. 결국 동양선교회는 김성기를 출교시켰다. 동양선교회는 기독교회는 철저한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믿었다(박명수, [초기 한국성결교회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256-260.). 분명히 축첩제도의 부정은 양반선교에서 매우 큰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과거의 잘못된 습관을 용인함으로써 얻는 약간의 유익보다는 한국교회가 바른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V. 만들어야 할 것: 이름

대부분의 여자아이는 축복 가운데 태어나지 않는다. 여자를 낳았다는 사실 자체가 슬픈 일이다. 어떤 선교사의 경험은 이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함흥 근처의 조그만 시골 마을 어두침침한 방에서 나는 아이를 받았다. 산모는 ‘무엇입니까? 무엇입니까?’라고 간절하게 물었다. 나는 ‘조그만 예쁜 딸’이라고 대답하였다. 산모는 얼굴을 벽으로 돌리고 ‘쓸데없는 것이 태어났다’고 말했다. ‘애기 아버지는 매우 슬플 거야’라고 말하고 슬피 울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을 낳으면 칭찬해 주려고 모인 동네 사람들을 보기가 너무 민망스러워 뒷길로 빠져나가 뒷동산으로 올라갔다.”(Florence J. Murray, "The Changing Status of Women in Korea," in Light of the East, ed. Jung, vol. 1: 161. Huntley, To Start A Work, 239.).

이런 조선의 딸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딸을 낳으면 첫째, 둘째라고 이름을 붙이다가 계속 나으면 그만 낳으라는 뜻으로 그만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막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기독교인이 된 가정은 자기 집의 여자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주었다. 전주에서 처음으로 신자가 된 유씨 부인은 기독교인이 된 다음에 그의 큰 딸에게는 “큰 보배,” 작은 딸에게는 “작은 보배”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쓸 데 없는 것”이 보배가 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능력이 아닐 수 없다(니스벳, [호남선교초기역사], 31.)

이런 조선의 여인들이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질 수는 없다. 대부분의 한국여인은 누구의 며느리이며, 누구의 아내이며, 누구의 어머니이다. 이렇게 독자적인 이름이 없는 여인들이 독자적인 인생을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단지 이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 자체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시대의 이름 없는 여인은 사실 존재 없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이런 조선의 여인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것은 세례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세례를 줄 때 목사는 이름을 부르면서 물을 뿌려 예식을 한다. 따라서 목사는 세례를 받으러 온 여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대부분 성서에 나와 있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남자 신자들과 비교해 볼 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남자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하지만 여자들은 새로운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한국의 여성들은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딸이 되는 동시에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강 도르카의 간증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여인이 50이 넘은 1898년 어느 날 예수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 이어서 그는 열심히 교회를 나가며, 성경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1899년 감리교 선교사 노블(W. Arthur Noble)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날은 그녀에게 매우 기쁜 날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더욱 기쁘게 만든 것은 “여인으로서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한국 땅에서 전파되기 시작한 날이 바로 여성들을 수천 년 동안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준 날이다. 전통을 따라서 여덟 살 이후로 나의 어릴 적 이름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 후로는 줄곧 이름을 가져 본 일이 없다. 생각해 보라. 근 50년 동안을 이름 없이 지낸다는 것을---. 그런데 나는 나의 세례 날에 도르카라는 새 이름을 선물로 받았다. 이 당시 북쪽 한국에서는 여인들은 여전히 흰 천으로 머리를 두르고 다녔다. 여인들이 세례를 받던 그 날, 제단 아래 엄숙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을 때 어느 누구도 우리들의 흰 수건을 벗겨 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세례식이 시작되어 노블 박사님이 한 손에 세례 잔을 받들고, 다른 한 손으로 머리에 세례를 베푸심으로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었다. 그 옆에는 노블박사 사모님이 따라오시면서 한 손으로는 머리의 흰 수건을 벗기시고, 다른 한 손으로는 새 이름이 적혀있는 카드를 내밀어 주시곤 하였다. 우리가 느낀 그 기쁨을 상상이라도 말 수 있겠는가?” 강 도르카는 이 날을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적고 있다(Mattie Wilcox Noble, Victorious Lives of Early Christians in Korea (Seoul: CLSK, 1927), 104-105.).

그러나 한국에서 여인이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낯선 일이었다. 무어 선교사는 1901년 어느 시골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어느 시골에 머물렀을 때 사람들의 토론의 제목은 가정에서 여성의 위치가 무엇인가에 모여졌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를 믿고, 세례 시에 이름을 받은 사람 가운데서 자기 이름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다고 말하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천국에서 여자들의 이름을 부를 때 자기 이름을 모르면 몹시 당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화제는 한국여인들의 이름 없음에 초점이 모아졌다. 사람들은 미국에서도 여자들은 남자와 같이 자신의 이름이 있냐고 물었다. 무어 선교사가 그렇다고 대답하니 더 이상의 질문은 그쳤다(Samuel F. Moore, "A Leaf from My Journal," Korea Review, vol. I (March 1901), 111-112; Huntley, To Start a Work, 244-245.).

이것은 목포 서쪽에 있는 비금도의 우 씨의 경우에서도 잘 나타난다. 우 씨는 여섯 개의 불운을 가진 사람이다. 그것은 아들 없이 딸만 여섯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운명을 동정했다. 그런데 우 씨가 기독교 신앙을 가진 뒤로는 딸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딸들에게 소(小)자가 들어있는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이 딸들을 모두 교육시키기로 작정하였다. 우 씨는 새로운 교육이 딸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딸 모두를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차례로 보냈다. 그의 딸들은 그 지역에 신문명의 창시자가 되었다(니스벳, [호남 선교 초기 역사], 150-151.).

선교사들은 한국 여인들에게 새로운 이름이 붙여지는 것을 보며 한없이 기뻤다. 남감리교의 무스(Robert Moose)선교사는 한국 여자들에게서 “섭섭이”라는 이름을 많이 보았다. 이것은 분명히 딸에 대한 부모의 서운함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되면서 사람들은 여자아이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것은 “이쁜 애”였다. 무스 선교사는 이런 새로운 이름이 늘어나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고 기록하고 있다(J. Robert Moose, Village Life in Korea (Nashville: Publishing House of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1911), 106; Huntley, To Start a Work, 238. ).
 

VI. 새로운 일들: 용감한 여인들

기독교의 복음을 들은 여인들은 이제 더 이상 남편에게 무조건 순종적인 삶을 살지 않았다. 전통적인 유교문화에서는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지배당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달랐다. 기독교는 남자나 여자나 다 같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가르쳤다. 이런 새로운 사상에 기초해서 여성들은 이제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한국의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서 남편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분명하게 밝힌 여성들을 알고 있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전주 최초의 여자 기독교인 유씨 부인의 경우를 살펴보자. 유 씨 부인은 전주에 여선교사 테이트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 집 구경을 갔다. 몇 번 구경을 갔다가 복음을 듣게 되었고, 결국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남편은 대노했다. 유 씨 부인은 남편에게 “예수의 가르침을 배우러 갔다”고 말했다. 남편은 말하기를 “생각하는 것은 남편의 일이다. 여자가 무엇을 배운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암소같이 영리한 짐승도 배울 수 없는데 여가같이 어리석은 것이 무엇 때문에 배울 생각을 한단 말인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유 씨 부인은 굽히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남편이 원하는 아들도 낳았다. 처음에 그녀는 제사를 위한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점점 신앙이 자라면서 그녀는 제사를 위해서 준비를 하는 것도 잘못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에게 제사준비를 하는 일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유교의 가장 중요한 예식인 제사를 거부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의 역사에는 없는 일이었다. 남편은 놀랐다. 그리고 칼을 가지고 와서 죽이겠다고 말했다. 유씨 부인은 “원한다면 죽이시오. --- 나는 결코 제사를 준비할 수 없소”라고 말했다(니스벳, [호남 선교 초기 역사], 30-33.). 이제 유씨 부인은 무조건 남편에게 순종하는 조선의 여자가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새 시대의 여인이 된 것이다.

이런 당당한 모습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이기풍목사의 아내는 원래 원치 않게 첩으로 팔려갔다. 시어머니 되는 사람은 이 여인에게 첩 생활을 강요하며, 동시에 굿을 하게 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여기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녀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시어머니되는 여인에게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괴롭히는 애굽 백성에게 어떤 벌을 내려 주었는지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자기를 괴롭히면 그런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던 중 그 남자가 병에 걸리게 되었다.

그녀는 시어머니되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를 내보내 주시지 않으면 그 병이 악화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나님은 저를 분명히 구해 주실 것입니다. 제가 애굽의 장자에 대해서 드린 말씀을 생각해 보세요.” 그 시어머니가 되는 여인은 이것이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시어머니 되는 여인이 밤에 몰래 그녀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 집을 조용히 떠나 줄 것을 요청하였다(니스벳, [호남 선교 초기 역사], 153-155.). 초기 한국교회의 여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 아래 당당하게 시어머니에게 맞서 자신의 주장을 할 수 있었다.

신앙을 가진 여인들은 더 이상 남자들의 뒤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집을 전부 기독교 집안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기독교 가정에서 당당한 리더쉽을 발휘하였다. 김제군 죽산면 대장리 교회의 최씨 할머니의 경우가 이것을 잘 설명해 준다. 복음을 처음 들은 최 할머니는 여기에 참 평화가 있다고 믿고, 집에 가서 아들들, 손자들, 며느리를 전도하였다. 그녀는 과부였고, 그의 아들은 최씨 문중의 장손이었다. 하지만 이 장손을 다스리는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그의 아들은 교회의 영수였다. 하지만 이것은 명목상일 뿐 실질적으로 이 교회의 영수는 최 씨 할머니였다.

당시 한국교회는 휘장으로 남자석과 여자석을 구분하여 놓았다. 어느 남자도 여자석에 갈 수 없었고, 어느 여자도 남자석에 갈 수 없었다. 하지만 최 씨 할머니는 예외였다. 그의 자손 가운데 70명이 그 교회의 신자였고, 두 아들은 장로였으며, 한 사람은 신학생이었다. 그는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남자, 여자 모두 볼 수 있는 자리에 가서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말하였다. 심지어 영수인 아들을 향하여 “영수!”라고 부르면서 조목조목 말하곤 하였다. 이 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바로 최 씨 할머니였다(니스벳, [호남 선교 초기 역사], 125-126.).

초기 선교사들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간 초기 한국여성신자들의 모습을 소설의 형식을 빌어서 표현하였다. 남감리교선교사인 왜그너가 쓴 [김서방의 사랑이야기]를 보면 신앙의 여인의 당당함을 찾아볼 수 있다. 원래 김서방은 도시에 나갔다가 전도지를 얻어 와서 첩과 함께 읽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목사는 첩과 헤어져야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민을 하던 중 그것을 첩에게 말하였더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은 헤어지기로 작정하고, 세례를 받았다. 첩은 마리아라는 이름을 얻었다.

마리아가 남편과 헤어져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예답영이라는 부자가 있었다. 그는 마리아에게 흑심을 품고, 마리아를 첩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는 온갖 말로 마리아를 유혹하였지만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불한당을 보내서 보쌈을 하려고 하였다. 그날 밤 불한당이 들이닥쳤다. 그녀는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을 향해서 당당하게 “난 너희들이 두렵지 않다. 난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하리라.’” 이제 놀란 것은 불한당들이었다. 이 일 후에 이 동네에서는 마리아보다 더 존경받는 사람은 없었다(Ellasue C. Wagner, Kim Su Bang and Other Stories of Korea (Nashville, TN: Woman's Board of Foreign Missions, 1909).). 조선의 여자들 가운데서 남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없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달랐다. 그녀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남자가 무섭지 않았다.
 

VII. 새로운 사랑 이야기: “십자가와 서방님”

초기 기독교 여성은 전통적인 가치관과 새로운 기독교의 가치관 사이에서 갈등을 느꼈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굿과 같은 우상숭배나 첩으로 사는 비도덕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반대했다. 하지만 전통적인 유교의 남성중심 사상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십자가의 길을 택했다. 묵묵히 고난의 십자가를 짐으로서 얼마나 전통적인 남성중심의 가치관이 잘못되었는가를 알려 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감리교 선교사 노블이 쓴 소설 [이화: 한국의 이야기]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이 소설에는 승요라는 남자 주인공과 이화라는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고 있다. 승요는 승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이화라는 이 부잣집의 종을 사랑하게 되었고, 이화와의 사랑을 위해서는 양반의 신분을 포기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전쟁(동학란) 때문에 이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었다. 승요는 사방으로 이화를 찾아 나섰고, 결국은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이화를 다시 찾게 되었다. 이때 이화는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다. 이화는 승요와 헤어진 다음에 자살을 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을 알고 다시금 용기를 얻어 살아가고 있었다. 기독교는 이화에게 순종과 희생을 알려주었다. 이 두 사람은 주인의 허락도 없이 예배당에 가서 기독교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 목사 앞에서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사랑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화는 주인에게 순종하는 전통적인 여자였지만 동시에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믿는 기독교인이었다. 여기에 이화의 갈등이 있었다. 전통적인 법을 따르면 아직도 이화는 소유권이 이 부자에게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개화사상에 의하면 그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당당한 인간이었다. 이화가 내린 결론은 자기 주인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응답을 구하는 것이었다. 승요는 여기에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과거의 법은 잘못된 법이고, 그 법은 지킬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화는 달랐다.

주인에게서 도주하는 것은 범죄자가 법으로부터 도망치는 것과 같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건 나의 새 신앙에 모독이 됩니다. 사람들이 야소교인들은 도둑놈들이고, 불법을 권장한다고 욕할 것입니다.”(W. 아더 노블, Ewa: A Tale of Korea [사랑은 죽음을 넘어서], 윤홍로 (서울: 포도원, 2000), 215.). 이화는 법을 파괴함으로써가 아니라 법의 희생자가 됨으로써 법의 부당성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일찍이 이 부자는 이화의 손에 십자가 모양의 문신을 그려주었다. 이것은 종의 신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화는 십자가 문신을 볼 때마다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서 죽어가는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화가 기독교신앙을 갖게 된 다음부터 이 십자가문신은 그의 자랑이 되었다.

저에게는 수치스럽고, 죽음으로 가는 그 십자가의 문신이 성스러운 상징이요, 승리의 상징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그리고 저는 십자가 위에 자기 생명을 버리신 분에게 충성을 바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십자가 안에서 조선의 희망을 보았습니다.”(노블, Ewa: A Tale of Korea [사랑은 죽음을 넘어서], 213.).

이것이 이화의 신앙고백이었다.

이화는 이 부잣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자신이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원래 주인은 이화를 자신의 첩으로 삼으려고 계획했다. 주인은 몹시 화를 냈다. 전통적인 습관에 의하면 주인은 종이 잘못했을 때 벌을 내릴 수가 있다. 결국 이 부자는 종들을 시켜서 이화를 치도록 했고, 이화는 매를 맞아서 죽게 되었다. 이화는 죽어가면서 승요에게 “저는 여종입니다. 서방님의 고발이 없으면 주인은 벌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나의 몫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고 말했다. 이화가 죽어가면서 마지막 남긴 말은 “십자가! 서방님!”이었다(노블, Ewa: A Tale of Korea [사랑은 죽음을 넘어서], 226-227.). 그녀는 한 남자를 죽도록 사랑했고, 동시에 주님을 죽도록 사랑했다.

우리는 이화에게서 전형적인 초기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본다. 그녀는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였다. 동시에 그는 자신을 첩으로 삼으려는 주인의 어떤 시도에도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첩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됨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화는 전통적인 습관을 파괴하기보다는 그 습관의 희생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다. 그 십자가를 짐으로서 그녀는 전통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역설적으로 입증했던 것이다. “십자가”와 “서방님”은 초기 기독교 여성이 사랑해야 할 두 대상이었다.
 

결론: 해방자 예수

본인은 이 논문에서 이런 변화의 근거를 먼저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보는 기독교의 복음에서 보았다. 그리고 이런 기독교의 사역이 구체적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 바로 조혼제도를 고치고, 부부관계를 평등하게 만들고, 축첩제도를 추방하고, 여성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고, 수동적인 여성들을 적극적인 여성으로 만든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였다. 마지막으로 전통윤리와 새로운 윤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노블의 소설, [이화]에서 찾아보았다.

기독교의 복음은 해방의 복음이다. 죄와 가난과 독재와 무지에서 한국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이런 해방의 복음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던 또 다른 영역이 바로 가정이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남성중심의 가정에서 여성들도 인간으로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가정이 되도록 만들었다. 아마도 기독교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역이 바로 가정일 것이다. 한국 기독교 신자의 70% 이상이 여성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오래 동안 교회의 대사회적인 역할을 강조하여 왔다. 물론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가정을 아름다운 공동체로 만드는 것은 다른 어떤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최근 한국교회에서는 활발한 가정사역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본 논문이 이런 가정사역에 자그만 공헌이라도 되기를 바란다.

박명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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