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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이단의 정체(3)

기사승인 2021.06.02  15:3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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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훈 교수의 성경 논단

김정훈 교수 / 영국 글라스고(Glasgow) 대학교 신약학 박사, 백석대학교 신약학 은퇴 교수, B and C Mission Center 현대표
 

   
김정훈 교수

2.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단

1) 금송아지 사건에 나타난 이단적 요소(지난 원고)

2) 발람 사건에 나타난 이단적 요소

발람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가까이에 당도했을 때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가 이단자의 한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은 신약성경 저자들이 그를 거짓 선생의 예로 언급하기 때문이다(벧후 2:15-16; 유 1:11; 계 2:14). 실제로 발람은 물질과 명예에 매수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할 목적으로 먼 출장길에 나섰으므로 그가 거짓 선생의 아류로 간주되는 것은 적절하다. 당시 발람은 브돌에 거주하였는데(민 22:5), 이곳은 유프라테스강 근처의 시리아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여기서 모압까지는 약 650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는 보통 “발람 선지자”라고 불리는데, 이는 그가 모압 평지까지 진격해 온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예언 활동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민 23:1-27). 더구나 민수기에 보면 발람은 선지자처럼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의 사자와도 만난다.

발람이라는 이름은 요르단의 데이르 알라 유적지에서 발견된 B.C. 8세기 비문에 나온다. 이 비문 초두에는 “신들의 예언자 브올의 아들 발람”이라는 문구가 나온다(『스터디 바이블』, 349. 민 22:1-6 해설). 많은 사람들은 이 인물이 민수기에 언급된 발람과 동일인이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민수기의 발람을 “발람 선지자”라고 칭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자칫 구약성경의 거룩한 “선지자들”처럼 들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발람은 예언활동을 했기 때문에 그러한 호칭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택하신 선지자들과는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호칭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더구나 그는 복채를 받으며 점술활동을 한 자이기 때문에 그 호칭은 부적절하고, 따라서 나는 “복술가”라고 부르거나 여호수아서에 있는 대로 “점술가”(수 13:22)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발람 사건은 정치권력과 결탁한 점술가가 주술(呪術)을 이용해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운동(하나님 나라 운동)을 제압하려 한 사건이다. 발람 사건은 모압의 패권자 발락이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달라는 요청으로부터 시작된다. 발락은 자기가 지배하고 있는 영토에 이스라엘 군대가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해치운 후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에 불안하였다. 발락은 이스라엘 군대가 아모리 왕 시혼을 처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고소하고 통쾌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시혼이 자기 영토를 침범한 일로 인해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발락은 새로운 민족 세력(이스라엘)의 등장에 심히 당황하였다. 그는 자기가 가진 군력(軍力)으로는 대항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하였다. 발락은 미디안 장로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미디안 족속은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아들들 중 하나인 미디안의 후손이고(창 25:1-2), 모압 족속은 롯이 자기 큰 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모압의 후손이다(창 19:37). 두 족속은 이와 같은 혈연 관계와 또한 사업관계(미디안 사람들은 장사꾼. 창 37:28)로 인해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미디안 장로들은 브돌에 거주하는 발람에게 사신을 보내어 다음과 같은 말로 그를 초청해 보라고 조언하였다.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주하였고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민 22:5하-6).

이 조언은 팔레스타인이나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지역민들에게 있어 정신적으로 술사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는 것을 반영한다.

발락은 미디안 장로들의 조언을 주저함 없이 받아들였다. 발락은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꾸려서 복채와 함께 발람에게 보냈다. 사신들은 브돌에 있는 발람에게 찾아가 발락의 말을 전했다. 발람은 사신들의 말을 듣고 그들에게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민 22:8)라고 말했다. 그날 밤 사신들은 발람의 집에 유숙하였다.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발람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거론한다는 것이 의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여호와를 언급한 것은 그가 여호와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주술사(呪術師)로서 어느 신(神)이든 가리지 않고 다 수용하는 자였다. 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족속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모압까지 진군해 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사이에는 낙타를 타고 사막을 오가는 상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는 여호와에 대해서 충분히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우연히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점술을 행하다가 효과를 보기 시작했을 것이다(참조. 민 24:3-4, 16). 하지만 혹시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점을 볼 수 있나?”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이 말씀은 주의 이름을 빙자하여 이적을 행하는 일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그런 자는 불법자로 판정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날 밤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민 22:9)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민 22:12)라고 말씀하셨다. 이 본문 역시, “하나님은 주술사도 선지자처럼 여기시나? 주술사에게도 계시하시나?”라는 의문을 품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출애굽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위기의 순간마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처럼, 개입하신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일개 주술사의 저주가 무엇이 무서워서 위기가 될 수 있는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현 상황에 간섭하셔서 당신의 존재와 권능과 그들의 특별함을 드러내시고자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요단강 도하를 앞두고 가나안 땅에 가득한 그 어떤 토착신들도 그들을 대항할 수 없다는 신호를 보내시고자 했던 것이다.

발람은 모압과 미디안 귀족들과 동행하지 않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귀족들은 발락에게 돌아와 발람의 말을 전하였다. 아마도 발락은 귀족들의 전언(傳言)을 듣고 불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발락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발람을 회유하기 위해 권력과 인력을 총동원하였다. 그는 발람에게 전에 보냈던 귀족들보다 더 지위가 높은 자기 측근들(신하들)을 더 많이 보냈다. 그러면서 전한 말은 “아무것도 거리끼지 말고 오라, 오면 높은 지위를 주어 크게 존귀하게 해 주겠다. 그리고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 단,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만 해 달라”(민 22:16-17. 나의 버전)는 것이었다. 발락은 때 묻은 정치술과 외교술, 회유술에 능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발람에게 어떤 부담도 지우지 않고 그가 좋아할 만한 것을 충분히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집요하게 “저주”를 주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락이 발람에게 이 정도까지 약속한 것을 보면 발람은 뛰어난 주술력(呪術力)으로 중동지역 일대를 주름잡았던 점술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발람은 부귀영화와 권세를 약속하는 발락의 회유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발락의 신하들에게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민 22:18-19)라고 대답했다. 얼핏 보면 발람이 하나님의 뜻에 매우 충실한 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위선적이고 기만적이다. 그는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단호히 그들을 되돌려 보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물질에 매도되어 눈이 어두워져 미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미 있다. 내심으로 그는 이미 그들을 따라갈 마음을 먹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는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마음을 바꿔주셨으면 하는 속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발람은 자기의 바람대로만 된다면 자기에게 은금이 쏟아질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는 대가를 받고 복술(卜術) 활동을 하는 주술사로서 왕의 권세를 가진 발락과 거래를 한다는 것이 천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날 밤 하나님은 발람에게 임하시어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민 22:20)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발람의 심중을 꿰뚫어 보고 계셨기에 그가 발락의 신하들과 함께 갈 것을 예상하고 계셨다. “함께 가라”는 말씀은 “신의 한수”(?)였다. 전에 가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이 이제는 가라는 것이다. 발람으로서는 자기가 원하는 대답이 나왔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마음을 바꾸신 것이 아니었다. 당신께서 이르시는 말씀만 준행하라는 단서를 붙이시기 때문이다. 이 단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절대 저주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었다.

발람이 “저주”의 주술을 요구하는 발락의 신하들과 동행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사실은 그 다음 장면에 의해 확인될 수 있다.1) 발람은 아침에 일어나서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을 대동하고 모압 귀족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발람의 이런 행위에 하나님은 진노하셨다(민 22:22 이하). 하나님은 당신의 사자(=천사)를 그에게 보내셨다. 천사는 그가 가는 길을 막아섰다. 천사는 칼을 손에 빼 들고 길목을 지켰다. 나귀는 천사를 보고 밭으로 뛰어들었다. 발람은 나귀를 길로 올라가게 하려고 채찍질하였다. 이때 천사는 포도원 사이의 좁은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골목길 좌우에는 담벼락이 있었다. 나귀가 칼을 든 천사를 피하려고 담벼락을 거칠게 스치다가 발람의 다리를 비비어 상하게 하였다. 이에 발람은 다시 나귀를 채찍질하였다. 이에 천사는 좌우로 피할 수 없는 좁은 골목으로 다시 가서 정면으로 섰다. 나귀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화가 치밀어오른 발람은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세게 때렸다.

이때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여셨다. 나귀가 발람에게 말했다: “왜 나를 이렇게 세 번이나 때리는 겁니까?” 발람이 나귀에게 말했다: “네가 나를 거역했기 때문이다. 만일 내 손에 칼이 있었더라면 네 목을 베었을 것이다.” 나귀가 발람에게 항의하였다: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일생 타고 다니는 나귀가 아닙니까?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렇게 한 일이 있었나요?” 발람이 대답했다: “없었다.”

이때 하나님이 발람의 눈을 여셨다. 발람은 하나님의 천사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선 것을 보았다. 발람은 즉시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다. 납작 엎드린 발람에게 천사가 말했다: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을 것이다.” 이는 나귀가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이었다. 그제서야 발람이 천사에게 말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민 22:34). 천사가 발람에게 말했다: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민 22:35). 이것은 전날 밤에 하나님이 발람하게 하신 말씀이었다. 이 일관성은 하나님이 발람에게 그들과 동행하는 것을 허락하시고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람은 은금과 부귀 권세를 얻기 위해 이스라엘을 저주할 목적으로 가고 있으나 하나님은 그로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실 목적으로 그가 모압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신 것이었다. 구원사의 중대 기로에서 하나님은 스스로의 결정을 따라 당신의 백성의 상황에 간섭하신다.

발락은 자기의 부탁을 받고 내왕한 발람을 먼 길까지 나와 영접하였다. 그는 모압 변경 끝 아르논 가에 있는 성읍까지 가서 그를 맞으며, 다시 한번 자기의 요구만 들어주면 그를 높은 지위에 올려 존귀하게 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민 22:36). 발람은 중요한 순간들을 절묘하게 잘 포착하여 사람의 환심을 사는 기술을 갖고 있다. 발람은 “내가 오기는 하였으나 무엇을 말할 능력이 있으리이까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니이다”(민 22:38)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은 두 가지 사항을 엿볼 수 있는 지능적 응수라고 볼 수 있다.

첫째, 발람은 겸손한 채 하고 있다. 겸손을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이단들이 “꾸며낸 겸손”으로 교만을 위장한다고 지적한 것과 상통한다(골 2:18). 더구나 발락은 이미 자기를 능력자로 보기 때문에 손해 볼 일도 없고 혹시 자기에게 무슨 능력이 나가지 않아도 이렇게 말해두면 하나의 안전막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발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선지자인 채 하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의 신(神) 하나님으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발락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자신이 권능의 하나님과 친한 선지자인 것처럼 위장하여 그를 심리적으로 제압하고 있는 것이다.

발락은 발람을 기럇후솟으로 데리고 가 융숭히 대접한 후 그 다음날 그를 바알의 산당으로 안내하였다(민 22:41). 이곳은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산당 중의 하나였다. 발람은 그곳에서 모압 평지를 뒤덮고 있는 허다한 이스라엘 백성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발람은 발락에게 7개의 제단을 쌓고 수송아지 7마리와 숫양 7마리를 준비하여 자기가 주술을 베풀 수 있게 준비해 달라고 하였다. 이는 짐승의 번제로 하나님의 심사를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방종교의 흔한 제의(祭儀) 방식과 같다. 발람은 발락에게 제물을 제단에 바친 후에 그의 번제물 곁에 서 있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혹시 여호와가 자기를 만나주시고 어떤 지시를 주시면 그대로 알려 주겠다고 했다(민 23:3). 발람은 발락이 여호와와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일관성 있게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거리고 있다.

하나님은 이번에도 발람에게 임하셨다. 발람은 여호와께 “내가 일곱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렸나이다”(민 23:4)라고 보고하였다. 하나님은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발락에게 가서 전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 특수한 상황에서, 이미 나귀를 사용하여 발람을 책망하신 것처럼, 이제는 발람의 입을 사용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발람이 이스라엘에 대해 전한 말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다. 이것은 발람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었다. 축복의 말의 근원지는 발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발람의 예언은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첫 번째 예언. 발람은 발락이 억지로 자기에게 이스라엘에 대해 저주할 것을 요청하지만 자기는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저주할 수 없고, 이스라엘은 여러 민족 중의 하나가 아니며, 그들의 수효가 셀 수 없이 중다(衆多)하고, 자기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한다고 말했다. 발람이 이스라엘이 여러 민족 중의 하나가 아니라고 한 말은 그들이 타민족과 비교 불가한 특별한 민족이라는 축복의 말이고, 이스라엘의 수효가 많다고 언급한 것은 그들의 세력이 누구도 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는 칭송이다. 만일,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한다는 발람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는 의와 불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주술사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나중에 이스라엘을 이방 신에게 절하도록 하고 음란행위를 하도록 유인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민 23:14; 31:16), 결국에는 미디안 왕들과 함께 처참한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민 31:8). 발락은 발람의 예언을 듣고 왜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냐고 불만을 털어 놓았다(민 23:11). 그러나 발람은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민 23:12)라고 응답하였다. 그는 여전히 “여호와”의 선지자인 것처럼 행세하는 주술사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예언. 발락은 이스라엘의 수가 잘 보이지 않게 발람의 시야를 바꿔주면 혹시 저주 예언이 나오지 않을까 하여 그를 비스가산 꼭대기로 데리고 갔다(민 23:13).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의 후미(後尾)만 조금 볼 수 있어서 그들이 초라하게 보이는 장소였다. 발락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제단을 쌓고 제물을 준비하였다. 이때에도 하나님은 발람에게 임하셔서 그의 입에 말씀을 주셨다(민 23:16). 발람은 발락에게 가서, 식언(飾言)이나 후회함이 없으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고 하였다(민 23:19). 그는 발락에게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이나 반역을 보고 그들을 처벌하지 않고 용서하시며(민 23:21),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계시니 그들 가운데 “왕을 부르는 소리”가 있으며(민 23:21), 야곱 곧 이스라엘을 해할 수 있는 점술이나 복술은 없으며(민 23:23), 그들은 암사자와 수사자 같이 일어나 맹렬히 땅을 정복할 것이라고 하였다(민 23:24). 여기서 특히 “왕을 부르는 소리”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르는 소리”라는 뜻으로, 모세오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첫 번째 명시적 언급이다(참조. 『홀리원바이블』, 236. 민 23:21 해설).

세 번째 예언. 발락은 저주 예언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발람을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비스가산 북쪽의 브올 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은 바알의 산당 못지않게 바알 신 숭배가 성행했던 장소다. 발락은 모압 사람들이 바알 신 숭배를 위해(민 25:3, 5; 31:16) 즐겨 찾았던 이곳에서는 저주 예언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발람은 발락에게 이전과 똑같이 제사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발람은 주술사였지만 여호와께서 자신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선히 여기신다는 것을 감지하고, 앞에서처럼 점술을 쓰지 않고 광야에 천막을 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예언할 자세를 취했다.

이때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셨다]”(민 24:2). 우리는 여전히 어떻게 발람 같은 주술사에게 계속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느냐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발람은 저주 예언을 위해 발락의 손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하셔서 발람으로 축복의 예언을 하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역설적 지혜가 발람의 저주의 의도를 꺾고 축복으로 전환시키고 계신 것이다. 이 제3차 예언에서도 하나님은 발람의 입술을 빌려 이스라엘의 번영과 그의 왕국의 번영(繁榮)을 노래하게 하셨다(민 24:3-9).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민 24:9). 이 예언의 내용은 본래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때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여전히 기억하고 계시며 그것을 신실히 성취해 나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주셨던 것이다.

발락은 분을 내며 발람에게 “내 원수”를 저주하라고 초청하였건만 왜 세 번씩이나 그들을 축복을 하는 것이냐고 호통쳤다. 그러면서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며 약속한 높은 지위와 존귀는 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발람은 처음부터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만 전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대꾸하였다. 그는 여전히 자기가 여호와의 선지자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여호와가 자기를 지배하고 있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의 현직은 주술사이지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니다. 그리고 부귀와 권세를 꿈꾸는 그의 마음의 숨은 동기는 역시 여전히 그 안에 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만 전한다”고 자평하며 속에는 탐욕을 품고 있는가? 발람이 저주가 아닌 축복을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지 발람의 의도가 아니었다. 그는 저주 예언으로 일확천금을 획득해 보려는 심사로 모압 왕 발락에게 왔던 것이다. 그가 기회만 있으면 “여호와 하나님” 운운하지만 마음속에는 악의를 감추고 있었다. 이 사실은 그가 모압을 떠나기 전 발락에게 사적으로 마지막 남긴 말, 곧 훗날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하면 망하게 할 것인지 알려 주겠다고 한 말에서 엿볼 수 있다(민 24:14; 31:16). 우리는 발람의 사악한 음모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는지 바알브올 사건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민 25:1-9).

네 번째 예언. 발람은 발락에게 밀담하듯이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수 있는 어떤 비책을 제공할 것에 대해 언질을 준 후에 이스라엘을 향해 마지막 예언을 하였다(민 24:17-24). 그의 예언은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축복이었고, 그 내용은 너무도 방대하고 먼 미래를 전망하는 것이어서 장엄하기까지 하다.

첫째, 야곱에게서 “한 별” 곧 “한 규”(a Sceptre, 왕의 권세를 상징하는 지휘봉 같은 ‘홀’[笏])가 야곱 곧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 광활한 지역을 정복할 것이다. “한 별”은 일차적으로 다윗을 가리키나(삼하 8:2, 13-14) 그는 오실 메시야의 표상이므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참조. 계 22:16). “한 규”는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를 가리킨다(창 49:10; 시 45:6, 110편; 계 2:27).

둘째, 이스라엘 백성의 정복 대상은 구체적으로 에돔, 아말렉, 겐 족속이 될 것이다. 특히, 겐 족속은 훗날 앗수르2)에 의해 포로가 될 것이며, 앗수르와 에벨3)은 깃딤4)에 의해 괴롭힘을 당할 것이다. 이 예언은 주로 다윗시대에 이루어질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다윗은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이므로 이스라엘의 광활한 지역에 대한 정복 예언은 멀리서 장차 올 그리스도의 통치를 전망하는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발람은 예언을 마친 후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고, 발락 역시 자기 길로 갔다(민 24:25). 발락이 이스라엘을 축복한 발람을 해치지 않은 것은, 그와 같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인정받는 주술사를 해치면 자기에게 징벌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발락은 발람이 일관성 있게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보면서, 그 사람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공포심으로 인해 그를 해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발람은 자기의 점술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복술가였고, 자기의 탐심을 철저히 감추는 탐욕가였고, 부귀영화 권세에 전혀 무관심한 것처럼 행동하는 위선자였고, 항상 진실을 말하는 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기만자였고, 자신을 하나님의 선지자인 양 행세하는 이단자였고, 제물로 하나님의 심기를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교도였다. 그는 한 마디로 출애굽 시대 말기에 점술로 명성을 날린 거짓 선지자요 이단사상의 종합세트였다.
 

주(註)
1) 이하 내용은 대부분 나의 버전으로 재구성한 것.
2) 시내 반도 북부에 살았던 족속(참조. 창 25:3, 18; 삼하 2:9).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앗시리아 제국(B.C. 7-10세기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패권국)이 아님.
3) “히브리인”의 시조로 알려짐. 아브라함의 7대조(창 10:21; 11:14-26).
4) B.C. 12세기경 가나안 지역 해안에 상륙했던 블레셋 족속.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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