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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목사 순교 78주년 기념 김성곤 장로와의 대담

기사승인 2022.01.14  11:5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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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최은수 교수/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 Ph.D. Berkeley GTU 객원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대담: 김성곤 장로 : (주)성진식품 대표이사 역임, 제일문창교회 역사사료관 관장 및 주기철 목사 기념관 관장, 제일문창교회 120년사 편찬위원장

   
▲ 김성곤 장로

최은수 교수: 올해로 주기철 목사님 순교 78주년이 됩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되기 때문에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희생과 헌신의 모범을 보인 분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성경성과 역사성을 추구하는 기독교의 정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주기철 목사 기념관의 설립 배경 및 의의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김성곤 장로: 2004년 4월에 제일문창교회 8층 교육관을 준공하면서 본 교회 8대 담임목사이신 주기철 목사님을 기리는 의미로 교육관 건물 간판을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라고 간판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내부에 기념관 설치를 하고자 당회와 교회는 추진하였으나, 여러 가지 여건의 어려움으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가 2015년 정책 당회에서 120년사 편찬위원장으로 제가 선임되면서 그때부터 120년사를 편찬하기 위한 교회 자료를 준비하던 중 2016년 1월 어느 날 서울에 있는 교회에서 인터넷으로 주기철 목사 기념관 간판이 있는 우리 교회를 보고 관광버스 1대를 타고 온 교회 중직자들과 교인들이 몰려와서 관람을 요구했습니다.

마침 그 날 제가 교회에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있었는데 저한테 물었습니다. “우리는 서울에 00교회 교인들인데, 주기철 목사님 기념관을 관람할 수 있습니까?”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내 대답은 임기응변의 거짓말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분들한테는 서운하지 않기 위한 거짓말이었습니다.

“미리 전화를 하셨으면 좋았겠네요. 수리 중입니다. 다음 기회에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진해 주기철 목사 기념관을 이야기해서 그곳에 갔다 왔다면서 시무했던 교회의 기념관을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 첫번째 사모이신 안갑수 사모와 함께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미안하기도 해서 여기서 멀지 않은 “손양원 목사 기념관”을 안내해주었습니다. 가고 난 뒤, 저는 한없는 후회와 자괴감이 들어서 몇 날 며칠을 고민 끝에 주기철 목사 기념관 설립을 완성하기 위한 자료를 찾고, 전국의 역사관, 기념관을 찾아다니며, 설립을 위한 기반 지식을 습득하여 준비 작업도 부지런히 했습니다. 우리 교회 8대 담임목사 주기철 목사 기념관을 설립하여 전국의 많은 사람에게 관람하게 함은 우리 교회의 또 다른 사명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당회와 교인들의 지원과 특히, 담임 목사님의 격려와 기도 가운데 시작한 지 1년 2개월 만에 2017년 3월 19일 교회 설립 116주년에 맞추어 주기철 목사 기념관, 제일문창교회 역사관, 역사사료관, 3관이 개관하게 함은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2020년 10월 고신 제70회 총회에서, 주기철 목사 순교자 기념교회 지정과 한국기독교 역사 사적지 지정 1호를 받아 올해 3월 21일, 120주년 감사예배 시 헌판식을 가졌습니다.

최은수 교수: 주기철 목사님의 마산문창교회 사역과 영향은 어떠하였는지요?

김성곤 장로: 주기철 목사님이 1931년 7월 부임한 이후 교회 내외 영적 쇄신을 추진하였고 특히, 연 2회 성례를 행하고 새벽기도회를 실시하고, 기도 운동을 전개하고 설교를 중시하며, 정당한 치리를 통해 교회 질서를 바로 잡았습니다.

주 목사님은 우리교회에서 목회와 더불어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 문제에 대하여 강력하게 대처하며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이를 가르치고 설교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시무할 당시의 ‘일사각오 설교 역시, 1935년 5월 1~5일까지 금강산 수양관에서 200여 명의 목사 앞에서 설교할 때, 마태복음 3장 1절에서 13절 본문 말씀 “예언자의 권능”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목사는 일사각오를 가질 때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이라고 하였고, 신사참배를 요구하는 불의한 권력”을 비판하고, “교회 지도자가 일개 순사 앞에서 쩔쩔매면 되겠는가?”하여 임석한 일경에 의해 그의 설교가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교인들에게는 “일사각오”는 환난의 때를 살아가는 신자의 길임을 가르쳤고, 주 목사님의 사역은 우리 교회 교인들에게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길을 인도하는 많은 영향을 주셨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우리 교회 사역 중에 가족사에 있어 쓴 맛을 다 보았고, 온 교인들과 함께 말 없는 아픔을 나누었던 시절인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부임한 지 2년이 지난 1933년 5월 16일 안갑수 사모님이 친정 큰 언니의 부고를 듣고 김해로 가서 장례를 치르고, 코 밑에 종기가 나서 간단한 수술을 하고, 인삼을 달여 먹고, 고열로 인해 사흘 만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 두번째 사모이신 오정모 사모와 함께

주 목사 자녀는 5남 1녀 중 막내인, 지금은 고인이 된 주광조 장로는 우리 교회 부임한 이후 태어나 만 1년 2개월 되던 때, 안갑수 사모가 돌아가시고, 아내를 잃은 지 1년 3개월 만에 1934년 8월 부친 주현성 장로가 세상을 떠나고 이런 상황에서 목회자 혼자 살 수 없고, 아이들 양육하기에도 힘들어 주변의 재혼 권유로 아내가 소천한 지 2년 6개월 만에 우리 교회 오정모 집사와 재혼하게 되었습니다. 오정모 집사는 평양 강서 출신으로 평양 정의 여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교회에서 세운 의신여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었고, 기도하는 처녀로 알려진 기도를 많이 하는 여성이었습니다.

이렇게 가정적으로 우리 교회 재임 중에는 인생의 쓴맛을 다 보았을 시기에 시간만 나면, 본 교회에서 2km 거리에 있는 바위가 십자가로 갈라진 십자 바위에 올라가 첫째: 나라를 위한 기도, 둘째: 교회를 위한 기도, 셋째: 가정을 위한 기도를 항상 시간을 내어 매일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그러한 기도의 영향이 교인들에게 본이 되고, 많은 영향을 주셨습니다.

최은수 교수: 주기철 목사님과 송상석 목사님의 사역에 있어서 통일성과 연관성은 무엇인가요?

김성곤 장로: 두 분 다 일제 강점기 시절,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옥고를 치르고, 주 목사님은 순교하셨습니다. 송상석 목사님은 평양신학교를 29회로 졸업하고, 평양 신광교회 시무 당시, 음성적으로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지원하고, 이약신 목사님과 함께 교회 안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인들을 규합한 일로 평양 감옥에서 6개월간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기독교대백과사전 9권 708쪽, 크리스찬 신문 1978년 11월 18일자).

주 목사님은 우리 교회 시무 중 경남노회장을 두 번이나 하시면서, 교회의 정통과 교회의 권위, 그리고 교회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노력했고, 이단적 주장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친숙함을 떠나 타협이 없었습니다. 주 목사님은 교회의 순결과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목회에 있어서 중요한 특징인 엄격한 치리를 시행했습니다. 송상석 목사님은 고신 교단 총회장 4회, 경남노회장 21번, 고신학원 이사장 수년간 등 혼란기의 강풍노도 가운데 고신 교단 형성과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교단 재산뿐만 아니라, 부산 경남, 고신 교단 소속의 수많은 교회들의 존립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봅니다.

두 분의 사역에 통일성과 연관성은 허허벌판 가운데 북풍과 남풍을 맞아가며, 복음적인 신앙의 사역자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한국기독교가 배출한 위대한 지도자요,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었다고 생각하며, 두 분의 사역에 통일성과 연관을 두고 싶습니다.

   
▲ 주기철 목사 기념관

최은수 교수: 이상규 교수님이 편집한 ’송상석과 그의 시대‘가 주는 의의는 무엇입니까?

김성곤 장로: 송 목사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지 어언 40년 세월이 흘러 격세지감을 느끼지만, 그때 그 시대의 일부 극소수 무리가 말 없는 다수를 향해 송 목사님을 나뭇가지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 음해하고, 매장하는 부도덕한 논리의 역사 사관에 대해 재정립하게 함은 이 책을 통해 역사의 뒤안길에 매장되어 잊혀져 가는 송 목사님을 새롭게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송 목사님의 실질적인 진면목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 그 의의가 있습니다. 또한 이 책이 송 목사님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재조명을 하였기에 그에 관한 연구가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서도 이 책이 귀중한 자료로 남으리라 생각합니다.

최은수 교수: 관장님의 신앙 배경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김성곤 장로: 저는 모태신앙으로 마산문창교회 담 뒤편이 저희집이었으므로, 유년 시절부터 항상 교회 마당, 종각탑 밑, 어떤 때에는 교회 옆 송 목사님 사택에서 놀았고, 본 교회 유년주일학교를 졸업하고 성장하면서 송 목사님의 설교와 가르침을 받고 커왔고, 그것이 저의 신앙 배경이 되었습니다. 특히, 뒤돌아보면 송 목사님의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끝까지 해결하는 집념과 추진력, 폭넓은 식견과 치밀함, 창의적인 생각, 자상한 인품을 많이도 흠모하고, 닮고 싶은 어른이었는데, 저의 신앙 배경에 내재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 주기철 목사가 목회했던 제일문창교회 역사관

최은수 교수: 본 기념관과 다른 역사 현장들을 아우르는 순례 코스에 대해 알려 주시겠습니까?

김성곤 장로: 본 교회에는 제8대 당회장 주기철 목사 기념관, 제일문창교회 역사관, 역사사료관 3관이 있으며, 사전예약(055-221-8601)을 하시고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본 교회에서 모두 20분 자동차 거리에 있는 순례 코스가 크게 나누어 4곳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직선거리 약 2㎞, 무학산 중턱에 주기철 목사님이 본 교회 시무 중 매일 올라가 기도하던 장소인 십자 바위가 있으며, 성인 남자 기준 왕복 1시간이 소요되는 간단한 등산코스입니다. 서원곡 주차장 도착 → 임마누엘 기도원 입구 → 고운대(학봉) → 십자바위 순입니다.

주기철 목사 기념관 주소는 창원시 진해구 운천로 174(055-545-0330)입니다. 주기철 목사의 신앙정 신과 항일운동에 대한 자료 전시되어 있지요. 우리 교회 기념관은 주 목사님이 시무했던 시절의 사용했던 책·걸상, 단상의자, 예배시종을 알리는 종, 헌금록, 사진 등 여러 자료가 실질적으로 보존된 기념관으로 차별됨이 있습니다.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주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공원 묘원로 230(1577-0444)입니다. 09:00~16:00 관람 가능합니다. 이곳은 선교사들의 아름다운 순교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경남 성시화본부가 “호주 선교사 묘원”을 조성하고 경남 기독교의 뿌리를 찾고자 설립한 곳입니다.

손양원 목사 기념관(생가) 주소는 함안군 칠원읍 덕산 4길 39입니다. 이 기념관은 6·25전쟁 때 피난을 거부하고 나환자들과 함께 머물다 순교한 손양원 목사의 거룩한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기념관으로 “사랑의 원자탄” 목사님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제일문창교회 → 십자바위 → 손양원 목사 기념관 → 경남선교120주년 기념관 → 진해 주기철 목사 기념관 이 순례 코스가 다른 역사 현장을 아우르는 코스로써, 우리 교회에서 자동차로 20분 이내 지근 거리에 위치합니다.

   
▲ 교회 변천사

최은수 교수: 역사 현장 탐방의 중요성과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김성곤 장로: 역사는 우리 삶의 거울입니다. 과거 없는 현재가 없고, 과거 없는 미래도 없을 것입니다. 역사 현장 탐방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이 시각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는지 뒤돌아보고 우리들의 삶은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 또 다른 미래를 꿈꾸며 힘차게 달려가는 시금석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은 환난과 풍파 가운데 120년을 달려온 우리 교회의 역사는 고신 교단의 역사와 맞물려 있어 우리 교회를 흔히들 “고신의 모태 교회”, “고신의 장자 교회”라고 불리어 왔습니다. 고신 교단의 70년사 집필을 이상규 교수님이 주도하시고 신재철 박사님도 참여하여 진행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집필을 통하여 우리 교회 역사관, 기념관, 사료관 현장 탐방과 대담, 120년사 발간된 책 등을 통해 우리 교회의 정체성도 밝혀 주시고, 고신 교단 70년사 발간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최은수 교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소망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울러 역사는 결코 잠들지 않습니다. 이 땅에 사는 기독교인들은 역사 속에서 살기 때문에 역사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김성곤 관장님의 역사의식과 그에 근거한 사역은 시사하는 바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바라기는 기성교인들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 특히 유치부 어린이부터 현장 방문을 통한 기독교 역사교육을 철저히 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슬람 국가인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했을 때, 콥틱교회들에 속한 어린 학생들이 기독교 유적들을 방문하여 역사 현장 교육을 진지하게 받던 기억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것도 이슬람 국가에서 말입니다. 김성곤 관장님의 노력으로 가시적인 결과물들이 도출된 것에 대하여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이렇게 대담의 시간을 내 주신 점에 대하여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최은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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