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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주의와 행복론, 아리스토텔레스

기사승인 2022.05.26  11: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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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철학 올레길과 둘레길4

<교회와신앙> 이신성 기자】   철학은 만물의 <아르케>를 묻는 질문에서부터 시작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철학은 ‘자연 만물’보다는 ‘인간’에 대한 관심과 질문으로 전환됐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 즉 <프쉬케>에 관심을 가졌다. 특별히 플라톤의 경우 이데아를 알 수 있는 이유로 인간의 영혼을 제시했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은 세 가지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성이 명예로운 욕망과 불명예로운 욕망을 잘 조절해야 함을 강조했다. 플라톤의 가장 뛰어난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이론을 한편으로는 수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박하며 발전시켰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여행한 경로,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영상 갈무리

아리스토텔레스가 주로 활동한 곳은 아테네이지만, 사실 그는 마케도니아 출신이다. 마케도니아는 헬라제국을 이룬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가 다스리던 곳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궁중의사(시의(侍醫), 왕의 주치의(主治醫))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찍 죽었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후견인에 의해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보내져 17살부터 20년 동안 공부를 하게 된다.

이후 아소스(Assos)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거기서 레스보스로 잠시 건너갔다가 나중에 마케도니아로 가서 제국의 황제가 될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영어로 알렉산더)를 가르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다 아테네로 다시 돌아와 그 유명한 <뤼케이온>이라는 철학 학교를 세웠다. 서양철학의 올레길과 둘레길 세 번째 코스는 고대 아소스, 레스보스, 마케도니아 그리고 아테네이다. 
 

◎ 아소스에서 결혼, 레스보스에서 동물 연구

아소스는 레스보스(Lesbos) 섬 건너편에 있는 소아시아의 연안 도시였다. 그곳은 아테네의 철학에 공감하고 있던 헤르미아스(Hermias)가 통치하고 있었다. 아소스에는 헤르미아스가 세운 학교가 이미 있었는데, 이 학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3년 동안 가르쳤다. 그리고 헤르미아스의 딸과 결혼해 아들 니코마코스와 딸 피티아스를 얻었다.

이후 아소스 건너편에 있던 레스보스 섬으로 옮겼는데 그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테오프라스투스가 레스보스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3년 정도 레스보스 섬에 머물며 어류와 조류를 연구했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동물지>(Historia Animalium)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테오프라스투스는 레스보스 섬에서 광물학과 식물학을 연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연구한 동물학과 생물학을 철학과 정치학에 적용했는데, 이런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생물학적이라고 말하곤 한다.

왜냐하면 그가 살펴본 동물들의 종과 유에 따른 범주적 분류를 그의 철학에 고스란히 대입시켰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생물과 생물로 구분 짓고 생물 안에는 다양한 계층이 존재한다는 계층적 존재론을 주장했다. 이런 계층적 존재론은 광물 – 식물 – 동물 – 인간 순으로 이동하는 위계적 존재 질서를 보여준다. 여기서 광물은 영혼이 없는 사물이며 식물은 광물과 비교하면 영혼이 있는 것 같지만 동물과 비교하면 영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식물과 달리 동물과 인간은 감각 지각이 있지만, 오직 인간만 이성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만이 자연의 온전한 삶을 사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식물처럼 양분을 섭취하며 성장할 뿐만 아니라 동물처럼 움직이고 감정이 있고, 무엇보다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인간 위에 모든 자연 활동을 주관하는 신이 있다고 여기고 위계질서를 보여주는 자연의 사다리 맨 위에 신(Theos, 부동의 원동자(不動의 原動者, Unmoved mover))을 놓았다. 이후 중세 철학, 특별히 스콜라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점을 위계적 질서로 발전시켜 강조했다.
 

◎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치다

플라톤의 <국가>는 인간과 국가의 유비를 통해서 건강하고 이상적인 국가 정치체제를 제시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플라톤은 이성적 정신과 통치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으로 지혜를 주장했기에 지혜를 사랑하는 자, “철학자가 통치해야 한다”는 결론은 당연했다. 스승 플라톤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철학이 실제적인 통치에 사용되도록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 노력의 일환이 바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Philippos) 2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Alexandrs, 알렉산더)의 개인교사가 되어 가르친 일이다.

   
▲ 마케도니아 왕국, 위키 백과 지도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인(哲人) 통치자’ 교과과정은 달랐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플라톤은 그의 책 <국가>에서 연령에 따라서 시문학과 체육을 시작으로 군사훈련, 기하학, 천문학 등을 가르친 후 30세부터 철학을 가르치고 실무경험을 거쳐 50세에 ‘철인 통치자’로 세우는 과정을 주장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금지한 호메로스의 시문학을 가르쳤으며 정치학뿐만 아니라 생물학도 가르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별히 플라톤은 보편적 개념으로서 수학을 중시하였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땅에서의 경험에 근거한 생물학과 정치학을 중시하였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각자 세운 학교 <아카데미아>와 <뤼케이온>의 교과과정에서도 드러난다. (사진 마케도니아 왕국, 위키 백과 지도)
 

◎ 아테네에 <뤼케이온>을 세우다

   
▲ 아리스토텔레스 청동상, Pixabay

마케도니아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한 후 아테네에 돌아온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학문적 특성을 잘 살린 학교를 세웠다. 물론 아테네에는 플라톤이 철학 수업을 위해서 설립한 <아카데미아>가 이미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미아>에서 20년 동안 수학했다. 하지만 플라톤의 철학학교 <아카데미아>의 교과과정이나 수업방식에 불만이 있었는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미아>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학교를 세운다. 그 학교의 이름은 <뤼케이온>(Lyceion, 라틴어 Lyceum)이다. <아카데미아>는 철학과 수학, 천체학이 중심이었다면, <뤼케이온>은 생물학, 정치학, 수사학 등 다양한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였다. 이는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친 것과도 연결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적 세계에 대한 관심과 생물학적 지식이 여전히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차이가 결국 플라톤의 철학을 합리주의와 이상주의로 보게 하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경험주의와 현실주의로 보게 만든다. (사진 아리스토텔레스 청동상, Pixabay)

<뤼케이온> 학교와 관련해서 언급할 사항이 있다. 흔히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제자들의 철학을 ‘소요학파’(逍遙學派) 혹은 ‘산책’(散策)학파라고 부르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자들과 산책하면서(헬라어 <페리파테인>) 강의하고 논의한 <페리파토스>(산책길)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헬라어 원어를 그대로 가져와 ‘페리파토스 학파’(Peripatetic school)라고도 부른다.
 

◎ 플라톤의 철학과의 차이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을 보면 플라톤은 하늘을 향해 하나의 손가락을 들고 이는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손가락을 펼친 손바닥을 땅을 향하고 있다. 이는 이 세상 만물의 존재와 질서의 통일성을 위해서 <이데아>를 주장했던 플라톤과 이 세상의 다양성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얼마나 다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는 이 세상으로부터 ‘초월’해서 저 하늘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있는 사물들 안에 ‘내재’해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차이다. 또한 <아테네 학당>에서 플라톤이 들고 있는 책은 <티마이오스>인데 우주의 질서를 다루는 천문학 책이다.

이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가 들고 있는 책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으로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을 다루는 윤리학 책이다. 플라톤은 지구를 넘어선 우주의 별들의 움직임을 계산하기 위한 수학적 지식이 중요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땅에 두 발 딛고 살고 있는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실천적 방법이 중요했다. 이처럼 두 사람의 철학과 관심이 전혀 다른 것을 <아테네 학당>의 그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바티칸 홈페이지 갈무리. 빨간 색 옷을 입고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들고 있는 플라톤 옆에서 파란 색 옷을 입고 손바닥을 땅을 향해 손가락을 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빨간 색은 불을 의미하며 하늘로 올라가는 요소이며 파란색은 물을 의미하며 아래로 내려가는 요소를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 형상은 언제나 질료와 함께!

플라톤에게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그림자였다. 플라톤은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세계, ‘이데아계가 참된 세계’라고 생각했다. 이런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계, 즉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세계는 따로 있지 않다고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 ‘자연적인 세계만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하나의 자연적인 세계 속에 이데아계와 감각적인 사물이 다 들어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선이라고 할 때 플라톤이 주장했던 선(善)의 이데아가 이 자연 세계를 초월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좋은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 세상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좋은 것은 무의하게 느껴졌다. 진짜 좋은 것이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존재해야 하고 실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이 아리스토텔레스를 현실주의자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플라톤의 철학과 다른 이유는 바로 이런 현실주의적이고 경험적인 관찰에 기초해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에 따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붉은 말, 흰 말, 검은 말, 얼룩이 말이 말일 수 있는 이유는 그 모든 말을 말이 되게 만드는 ‘말’의 이데아가 이 세상 너머에 존재하고 있고, 그 모든 말들이 이 말의 ‘이데아’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데아라는 것이 이 세상 바깥에, 이 세상을 초월(超越)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 안에 존재한다고 봤다. 즉 사물에 이데아가 내재(內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물 안에 내재된 이데아를 그는 ‘형상’이라고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형상’은 각 사물의 본질을 의미했다.

이런 점에서 앞에서 언급한 말의 경우, 그 여러 마리의 말들을 말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다리가 네 개이고 머리가 크고 머리밑 목덜미에서 등까지 난 털 갈기가 있다는 ‘말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런 특징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그것이 말이라고 규정짓는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어떤 사물로 하여금 그런 사물이 되게 만드는 특징, 본질을 ‘형상’이라고 불렀다. 또한 말의 몸을 구성하는 뼈, 살, 털과 같은 물질을 ‘질료’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러한 형상과 질료로 설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같은 말이지만 모습이 달라지는 이유는 바로 질료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말이니까 말의 형상을 가지고 있지만, 질료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말은 키가 크고 근육이 좋기도 하지만, 어떤 말은 키가 작고 근육이 좋지 않은 다양한 모습을 갖추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모든 것을 이데아로 설명하려던 플라톤보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동일하게 모든 사람이 사람의 ‘형상’을 가지고 있어서 같은 사람이지만 생김새와 성격이 다른 이유도 ‘질료’의 차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의 경우 갓난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것은 사람의 ‘형상’을 완성하기 위한 것으로 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각 사물의 본질인 ‘형상’을 완성하는 탁월한 상태를 <아레테>라고 했으며, 모든 사물은 이러한 <아레테>를 실현하는 것이 ‘존재 이유’이며 ‘목적(目的)’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목적론(目的論)이라고 부른다.
 

◎ 윤리학,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다!

   
▲ 김상봉, <호모 에티쿠스>(현암사, 2006).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 인간까지도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라고 주장했다.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일리(一理) 있게 들린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그럼 ‘행복’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돈이 많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오히려 불행하게 살고 있다. 학생은 공부를 잘 하면 행복할 것 같은데 오히려 공부를 하면서 고통을 느끼고 심지어 공부하는 것 자체를 불행하게 느끼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행복할 수 있는 근본인 <아레테>를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행복은 인간 영혼의 건강함, 또는 인간 영혼의 탁월성, 즉 인간의 <아레테>를 실현하는 것이다. 인간의 탁월성, <아레테>의 실현은 ‘지성’과 ‘성품’으로 드러나는데,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지성과 성품을 계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성은 지식과 지혜를 의미하고, 성품은 행동과 태도로 나타난다. 그래서 인간이 행복하려면 지식을 쌓고 지혜를 기르고 올바른 행동을 하면서 훌륭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런 점이 반복될 때 비로소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지성’과 ‘성품’을 갖추기 위한 방법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과 ‘훈련’을 제시했다. 교육을 통해서 인간은 지식을 얻고, 지혜를 기를 수 있으며, ‘훈련’을 통해서 좋은 ‘습관’을 들이고 올바르게 행동하고 훌륭한 태도를 갖추게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지식과 지혜를 갖추고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단순한 원리는 삶 속에서 발생하는 선택의 순간마다 바람직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런 바람직한 선택에서 중요한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中庸)’이라고 불렀다. 사람이 행복해지 위해서는 최소한의 물질이 필요하다. 이러한 물질을 얻고 소유하고 누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만약 돈이 없다면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런 일을 하다 보면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적당히 일해서 돈을 적당히 벌고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물론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무한한 욕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욕망을 절제하고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이때 욕망을 다스리기 위한 원리가 바로 ‘중용’이다. 이러한 중용은 모든 것에 있어서 지나침과 모자람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인데, 쉽게 이야기하면 균형을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싸워야 하는지 물러서야 하는지 결정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만용(蠻勇)과 비겁(卑怯)의 관점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인 용기(勇氣)를 가질 때 싸우려 나설 수도 있고 물러설 때를 알고 물러설 수도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을 비판적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코와코프스키는 “우리는 사태를 극단으로 끌고 가는 사람들을 정말로 늘 비난만 해야 하는 것인가?”라고 질문하며 “만일 어떤 사람이 허영으로부터 쾌락을 이끌어냈을 때, 우리는 그렇다고 그를 반드시 비난만 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의 허영심이 반드시 그를 불행하게 만들게 될까?”라고 되묻는다(레세크 코와코프스키, <위대한 질문>(열린책들, 2015), 55쪽).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극단적인 가난을 경험하고 있으며, 건전한 소비 행태를 강조하는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고가의 명품을 소비하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이론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 크리스천,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 레세크 코와코프스키, <위대한 질문>(열린책들, 2015). 

한때 <목적을 이루는 삶>이라는 책이 유행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은 지 약 2,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에 끌린다. 왜냐하면 이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말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돈을 많이 버는 것? 명예(인기)를 얻는 것?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크리스천의 목적은 크리스천의 본질의 탁월함, 그 <아레테>를 실현하는 것이다.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크리스천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고 고백하며 증거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본질이며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본질의 탁월함, 즉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며 증거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을 찾아 실현시키는 것이 크리스천의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각 크리스천의 질료, 즉 그 사람의 성품과 지성은 차이가 있다. 이런 점에서 어떤 크리스천은 학문적 활동으로, 다른 크리스천은 경제적 활동으로, 또 다른 크리스천은 신앙적 활동으로 각 자의 아레테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각자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실현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이 아닐까?

* 추천 도서
김상봉, <호모 에티쿠스>(현암사, 2006)
레세크 코와코프스키, <위대한 질문>(열린책들, 2015).

이신성 기자 shinsunglee73@gmail.com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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