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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팬더믹 시대’

기사승인 2022.08.01  11: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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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언의 영성 23

방동섭 교수/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역임, 글로벌 비전교회 담임
 

   
▲ 방동섭 교수

  속이는 저울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다. 그는 누구를 속이거나 해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누구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언은 정직한 자가 힘이 있는 것에 관하여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를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직한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잠언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공평한 추를 기뻐하신다”고 하였다(잠 11:1b). 여기 ‘공평한 추’라는 것은 ‘정직한 자의 삶’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익을 위해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심지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도 얼마든지 그런 유혹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간교한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아와 “이번 한 번만 나의 말을 듣는다면 당신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으로 시시때때로 도전하기 때문이다.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라는 유혹을 받을 때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이다. 잠언은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면 사람들이 잠시는 이익을 보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 길로 가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속이는 저울’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다(잠 11:1a).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그렇다면 사람들이 끊임없이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마음의 교만 때문이다. ‘교만’은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자신을 과도하게 평가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행위를 뜻하지만, 영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만의 핵심이다. 모든 종류의 인간의 악은 “하나님이 없다”는 교만한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자기들이 결심하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는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잠언은 “교만이 오면 욕도 온다”고 경고하고 있다(잠 11:2). 교만한 자들은 지금은 마치 자신의 시대가 열린 것처럼 생각하고 무엇이든지 자기의 뜻대로 되는 것 같이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잠언은 그들의 교만은 곧 수치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황금만능 사상

또한 악한 자들이 ‘속이는 저울’을 蹈 사용하는 이유는 “돈만 있으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다”는 그릇된 황금만능주의 환상 때문이다. 이러한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게 되고 그런 욕심이 결국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하였다(약 1:15). 사람들이 이처럼 욕심을 부리고 재물을 모아도 이 세상에는 재물이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특히 잠언은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다”고 하였다(4절). ‘속이는 저울’로 사람들이 아무리 재물이 많이 모아도 마지막 때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지막 때의 심판이 아니더라도 잠언은 “사특한 자들은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고 하였다(잠 11:6절). 그들은 결국 자기가 놓은 악의 올무에 잡혀 스스로 망하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잠언은 악인의 종말은 무섭고 비참한 것이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잠언은 이 세상에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악하게 살던 자들이 죽을 때에 “소망이 끊어질 것이라”고 하였다(잠 11:7). “소망이 끊어지다”는 표현은 다른 말로 그들의 “미래가 없다”는 뜻이다. 그들이 영원히 멸망 당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나방이 죽을 줄 모르고 불에 뛰어드는 것처럼 악인들도 이렇게 망할 것을 모르고 악의 노예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악의 팬더믹

악한 자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악을 사람들에게 전염시킨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이 시대에는 ‘코로나 팬더믹’(Corona Pandemic) 현상으로 전 세계가 공포에 빠져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더믹’보다 더 두려운 현상이 있다면‘악의 팬더믹’이다. 악인은 반드시 자신의 악을 이웃에 전염시켜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 망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즉 이 시대에는 한 사람의 악한 행동이 단지 한 사람의 악행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악의 전염성이 얼마나 강한지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스마트 폰이나 언론 매체, 영상물을 통해 사람의 삶의 현장으로 악이 깊이 파고 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악의 팬더믹’ 현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인간의 삶의 질을 파괴하고 있다. 악한 아버지는 결국 자녀들에게 악한 영양을 줄 수밖에 없다. 또한 악한 정치인들은 국가와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해악을 끼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의 악행은 교회뿐 아니라 사회 전반을 오염시키는 무서운 형태의 ‘악의 팬더믹’이 될 가능성이 있다.

잠언은 악한 자의 언행으로 인해 한 가정이, 그 이웃이 더 나아가 도시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성읍이 악한 자의 입을 인하여 무너진다”고 경고하고 있다(잠 11:11). 잠언은 또한 이렇게 악을 행하며 악을 전염시키다가 죽은 자들에 대해서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잠 11:10b). 다시 말하면 “죽은 것이 잘 됐다,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주변에 심각한 피해를 주던 악인이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자비를 베풀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스스로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혹시 ‘주변 사람들이 나의 죽음을 보고 기뻐하고 안도의 숨을 쉴 대상은 아닌지’ 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의인의 미래

그러나 하나님 존재를 깊이 인식하고 그의 뜻을 따라 살게 되는 ‘의인의 미래’는 악인과 달리 ‘구원’과 ‘축복’이라는 것이 잠언의 교훈이다.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의인’이 고통과 환란을 피할 수는 없다. 오히려 악이 관영하는 이 시대, ‘악의 팬더믹’이 세상 속으로 파고드는 이 세상에서는 ‘의인’들이 더 큰 어려움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잠언은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잠 11:8). 이것은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의 말씀이다.

잠언은 ‘의인’이 환난에서 구원을 받는 이유에 대해 “지식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였다(잠 11:9). 여기 ‘지식’이라는 개념은 단지 학교나 학문을 통해 배우는 지식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지식이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세상 지식은 악을 오염시키는 역할을 할 때가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이 사람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인’은 자신이 혼자 구원받는다고 기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처럼 누군가를 살려내는 일에 헌신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인’은 악으로 오염된 패역한 이 시대에 ‘백신’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악의 전염성을 막아내고 사람들을 살려내는 선교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잠언은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한다”고 하였다(잠 10:10). ‘의인’ 한 사람의 가치는 너무 놀라운 것이다. ‘의인’ 한 사람으로 인해 도시 전체에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잠언은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을 인하여 진흥하고 있다”고 하였다(잠 11:11). 여기 ‘진흥하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룸’이라고 하는데 '끌어올리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정직한 자’는 공동체를 수준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의인’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도시 전체가 살아나게 되고, 도시 전체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말씀은 공동체 안에서 ‘의인’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악의 팬더믹’ 시대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은 단지 나 하나 잘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그가 머무는 가정, 직장, 도시 전체를 더 나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이다.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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