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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철학과 신학의 정점, 아퀴나스

기사승인 2022.08.05  15:5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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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철학 올레길과 둘레길 7

<교회와신앙> 이신성 기자】  ‘중세’라는 말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일반화한 용어로, 고대와 근대 사이에 있는 ‘중간 시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세는 연대기적으로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5세기 말부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대인 16세기에 이르는 1천 년 이상의 시기이다. 사상사적으로는 보에티우스(470-524)부터 데카르트(1596-1650)까지 약 1천 2백년의 시기로 보기도 한다.

   
▲  아퀴나스 모습. 다음 백과 갈무리.

이와 달리 질송은 일반적으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가 죽고 제국이 아들들에 의해서 갈라진 395년부터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 의해서 함락된 1453년까지로 본다(질송, <중세철학입문>(서광사, 1983), 99쪽). 이와 달리 로마 감독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가 교황의 직위를 갖게 됨으로써(590년) 중세가 시작됐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이렇게 중세 시기에 대해서 여전히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는 점은, 중세가 그만큼 오랜 기간 동안 발생한 다양한 사건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던 시기에 등장한 철학자가 아우구스티누스였다면, 중세 철학과 신학의 정점을 이룬 위대한 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년)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플라톤 철학에 전도되어 있었다면, 아퀴나스는 전도된 철학과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보완하고 균형을 잡았다고 볼 수 있다.

12세기에 스페인을 통해서 이슬람 문화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유입됐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중세 철학과 신학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켰다. 그의 <신학대전> 라틴어-영어판은 61권으로 출간돼 있다.

혹자는 아우구스티누스부터 시작한 중세 사상을 아퀴나스가 완성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중세 사상을 아퀴나스가 완성했다고 하면 아퀴나스에게서 중세 모든 것이 다 끝나고 더 이상 아무것도 진전이 없었다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히려 중세의 철학과 신학이 아퀴나스에게서 정점에 이르렀고, 이후로 약 3세기 동안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고 보는 것이 낫다.

아퀴나스는 나폴리에서 멀지 않은 로카세카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아퀴노의 백작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이다. 아퀴나스는 몬테 가시노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교육받았으며, 나폴리 대학에서 공부하며 도미니코 수도원에 입회했고, 후에 파리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의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따라 독일 쾰른에서 생활하다 파리로 돌아와 교수로 생활했다. 이후 이탈리아 교황청 부속 연구소에서 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아퀴나스가 활동했던 유럽의 나폴리, 파리, 쾰른, 로마 등이 중세 서양철학의 올레길과 둘레길 여섯 번째 코스이다.

 

◎ 아퀴나스 전후의 사상가들

물론 중세에 유명한 학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퀴나스 전후에 명성을 가진 학자들이 적지 않다. 에리우게나(Johannes Scotus Eriugena, 810-880년)는 아일랜드에서 출생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계시의 합리적 해석이므로 참된 철학과 참된 종교는 동일하다. 아비센나(이븐 시나 Ibn Sina, 980-1037년)는 페르시아인으로서 부하라 근교에서 태어났으며 아라비아어로 교육을 받았고 저술했으며, 의사로 활약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주의를 차용하면서도 독자적인 철학을 전개했다.

   
▲  안셀무스의 책 <모놀로기온>과 <프로슬로기온>

안셀무스(Anselmus of Caterbury, 1033-1109년)는 피에몬테의 아오스타에서 태어나 켄터베리에서 대주교가 되어 죽기까지 그곳에 있었다. 철저하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에 속했으며,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이해하는 데 철학적 노력을 바쳤다. 그는 “우리가 믿는 바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태만이다”고 주장했다. 아벨라르(Avelard, 1079-1142년)은 프랑스 빨레(Pallet) 출신으로 실재론과 유명론의 두 극단 사이에서 개념론이라는 제3의 입장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했다.

아베로에스(이븐 루쉬드, Ibn Rusd, 1126-1198년)는 고르도바에서 출생해 모로코에서 사망했다. 그는 중세 시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으로 유명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철학자’(The Philosopher)로 일컬어지던 것처럼 ‘그 주석가’(The Commentator)라는 칭호를 얻었다. 보나벤투라(St. Bonaventura, 1221-1274년)는 토스카나의 바뇨레아에서 태어나서 프란치스코회의 전통을 따르며 학문 연구를 촉진시켰다.

둔스 스코투스(Johannes Duns Scotus, 1265-1308년)는 스코틀랜드 록스버러 지방 막스톤에서 출생해 런던 옥스퍼드와 파리 등에서 공부하고 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 활동했다. 그는 지성이 개별적 사물에서 공통적인 본성을 보기 때문에 보편적 인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윌리엄 오캄(william of Ockham, 1287-1247년)은 잉글랜드 서리 지방의 오캄에서 출생했으며, “어떠한 가설상의 존재자를 가정하지 않고도 어떤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존재자를 가정할 근거는 없다”고 불필요한 가정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중세 실재론과 유명론의 논쟁을 종식시킨 사람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흔히 오캄의 면도날(Ockham's Razor)라고 부른다.

이처럼 중세에도 유명한 철학자들이 많았지만, 그들의 사상을 여기서 다루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다. 따라서 중세 철학에서 중요한 ‘스콜라주의’와 ‘보편 논쟁’을 살펴본 후 아퀴나스만을 간략하게 기술하려 한다.

 

◎ 스콜라주의 : 철학과 신학의 관계

중세에 등장한 사상사적 흐름을 흔히 ‘스콜라주의’(scholasticism)라고 부른다. 라틴어 스콜라(schola)는 원래 지식인의 토론을 의미했으나 나중에는 그들이 생활하는 학교나 배움의 터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나중에 학교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는 강사를 스콜라스티쿠스(scholasticus)라고 불렀다. 하지만 보통 스콜라주의라고 하면 학문하는 태도나 신념, 탐구의 방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스콜라라는 말이 원래 토론을 의미했기에, 스콜라적 학문 방법은 강의(lectio)와 토론(disputatio)로 이루어졌다. 중세 교육 방법의 기초는 권위 있는 전거로 받아들여진 본문에 대한 강의와 주석이었다. 박우석은 신학에서는 성경, 수사학에서는 키케로, 문법에서는 프리스키안과 도나투스, 논리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의학에서는 아비센나(Avicenna) 등이 대표적이 예라고 지적한다(박우석, <중세철학의 유혹>(철학과현실사, 1997), 37쪽).

   
▲  14세기 중세 학교 모습. 위키 백과 <스콜라주의> 갈무리

스콜라주의를 학문적 방법으로 보는 것과 달리 ‘스콜라 신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중세 서방의 대학들을 통하여 형성된 신학으로 보는 관점 때문이다. 흔히 스콜라 신학을 11세기 중엽에 시작하여 13세기에 그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중세 후반기에 들어 쇠퇴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에 의하여 거의 소멸되어 버린 신학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벵크 헤그룬트, <신학사>(성광문화사, 2014), 225쪽).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스콜라주의는 아마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비하된 지성적 운동의 하나일 것”이라면서 스콜라주의에 대해서 새로운 시선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그는 16세기 인문주의 저술가들이 고대(고전시대)와 근대(르네상스) 사이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정체된 시기를 깔보는 투로 ‘중세’라는 말을 창안했듯 ‘스콜라 철학’이라는 용어 역시 똑같이 깔보는 어투로 중세의 이념들을 가리켰다는 점을 상기시킨다(맥그래스, <신학의 역사>(지와사랑, 2001), 166쪽).

아무튼 스콜라주의는 ‘신학을 조직화하는 특별한 방식’을 가리키는데, 자료를 제시하고, 훌륭하게 자료를 구분하며, 신학에 관한 포괄적인 견해를 취합하고자 하는 고도로 발전된 방법이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기독교 교리를 이렇게 고도로 발전된 방법을 사용하여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이런 점에서 흔히 철학은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

 

◎ 보편논쟁 : 실재론(Realism)과 유명론(Nominalism)

보편논쟁(普遍論爭)은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이것은 유(類)와 종(種)이라는 보편 개념이 실재한다는 주장과 이름뿐이라는 주장의 격론으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 13세기와 14세기 중반까지는 실재론이 우세했고, 14세기 중반부터 16세기까지는 유명론이 주도했다.

실재론과 유명론이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까마귀 몇 마리가 있다. 실재론은 그 까마귀가 형상화하고 있는 까만 색(blackness)의 개념이 실재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유명론은 까마귀를 보고 까만색의 개념을 상정하는 것은 불필요하며 현실에 나타나는 까마귀을 보고 검다는 이름을 붙인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  보편논쟁에서 개념론을 주장했던 아벨라르와 그의 연인 엘로이즈. 위키 백과 갈무리. 

보편논쟁에서 실재론과 유명론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신학의 내용에 크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나라(천국)이 실재하지 않고 이름뿐이라면 교회의 핵심교리들의 기반 자체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렇듯 보편논쟁은 인간의 이성적인 능력을 통하여 형성된 개념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그저 이름만 지어낸 것인지에 따라서 교회가 가르쳐왔던 교리들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중세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아벨라르는 실재론과 유명론과는 다른 개념론을 주장함으로써 보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장했다. 즉 ‘보편은 실재’라는 입장과 ‘보편은 이름뿐’이라는 입장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편들지 않고 ‘보편은 개념’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보편적 개념들이 하나님의 생각 속에 있는 계획의 형태라면서 보편적 개념들이 실제적이고 특수한 사물들보다 먼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보편적 개념들은 여러 가지 개체들의 공통적인 것에 대한 명칭으로 인간의 의식 속에 존재한다고도 언급했다. 이러한 아벨라르의 개념론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수용된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짧게 자신의 보편 이론을 설명한다. “보편은 사물 이전에, 사물 가운데, 그리고 사물 이후에도 존재한다”(universalia ante res, in rebus et post res). 

 

◎ 아퀴나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존재 증명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플라톤 철학에 전도됐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사상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보완하고 균형을 맞추려 했다. 혹자는 천상 영역에 초점을 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전통에 지상 영역에 초점을 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통합시키는 것이 아퀴나스가 추구한 바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도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 신의 도성만 강조할 때 지상의 도성은 소외되고 소홀히 여겨지기 쉽다. 아퀴나스는 바로 그 점을 보완하고 균형있게 이 세상을 바라보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적극 사용했다.

아퀴나스 당시 은혜의 영역과 자연의 영역을 구분하는 분위기였다. 신앙적 진리를 알 수 있는 곳이 은혜의 영역이라면, 자연적 진리를 알 수 있는 곳은 자연의 영역이다. 그러다보니 이성의 빛에 기초한 철학은 자연의 영역에 타당하고, 계시에 대한 믿음의 산물인 신학은 보다 위에 있는 은혜의 영역에 타당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이 두 영역이 궁극적으로는 상충하지 않으며 근본적으로 조화를 이룬다고 봤다. 그래서 ‘은혜는 자연을 완성하고 보완하며 완전하게 하고 충족시킨다’고 주장했다. 아퀴나스는 자연의 영역과 이성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으로 신앙과 계시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이성과 계시의 관계는 하나님과 관련해서 더욱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성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계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반으로 자연적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다섯 가지 길을 제시했다. 첫째 길은 운동의 증명이다. 모든 사물은 운동한다. 운동이 있다면 동인(mover)이 있어야 한다. 그 동인이 바로 신이다. 둘째 길은 원인의 증명이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지며 결국 모든 것의 궁극적인 원인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신이다. 셋째 길은 필연성의 증명이다. 모든 사물이 가능성만 가지고 있다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필연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그 필연적인 존재가 신이다. 넷째 길은 완전성의 증명이다. 최고로 완전한 것과 비교할 수 있으려면 가장 완전한 존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신이다. 다섯째 길은 목적성의 증명이다. 모든 사물에는 목적이 있는데, 목적을 설정하고 질서지우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이런 존재가 신이다.

아퀴나스가 주장한 다섯 가지의 길은 공통되는 면이 있다. 어떤 감각적 사건이나 사실을 언급하며 시작하며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신이 제시된다. 다만 신을 제시하기 위해서 모든 과정은 인과율에 의해서 설명된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사고 방식을 파악할 수 있다. 그는 자연의 영역에는 인과관계가 있으며 인간의 이성은 이러한 인과관계를 알 수 있으며 신의 존재까지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신 존재 증명 방식을 보면,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얼마나 철저하게 따르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감각을 이용한 자연 사물을 관찰하는 데 집중했으며 이성의 능력을 중요시했는데, 아퀴나스 역시 그러한 면을 그대로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아퀴나스에 의해서 신학과 철학은 이제 더 이상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이러한 아퀴나스의 모습을 보면, 테르툴리아누스가 언급했던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냐?”는 말은 이제 “예루살렘과 아테네는 상관있다!”로 바뀌어야 함을 알게 된다.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부터 시작된 신앙과 이성의 문제를 종결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이성으로도 신을 알 수는 있지만, 그 이성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언급하며 신앙과의 관계 설정을 확실하게 했다. 이러한 면은 이후 ‘묻지마 신앙’에서 ‘질문하는 신앙’으로 변화시켰으며 결국 ‘이해하는 신앙’으로 이끌었다. 그를 통해서 철학은 신학의 시녀 노릇에서 벗어나게 됐다.

   
▲  추천 도서 코를스톤과 와인그린의 <중세철학사>

 

◎ 이성의 능력을 인정한 아퀴나스, 크리스천은?

한국교회의 상식과 이성을 경시하는 반지성적 행태가 도를 넘고 있다. 코로나19 방역과 사회적 거리두기 시행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며 예배를 드리고 믿기만 하면 된다던 일부 교회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반 시민들의 눈에 그러한 교회의 모습은 전혀 지성적이지 못하며 이단 사이비와 다를 바 없다고 여겨지기까지 하였다. 또한 기성 교단에 소속된 교회의 목회자들 중에서 ‘묻지마 신앙’을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 ‘목회자 말만 믿으라’는 말로 이성 활동을 중지시킨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성적 판단을 멈추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면서도 신앙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그러다 보니 최소한의 준법 생활이나 질서는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이성의 능력을 강조하였던 아퀴나스의 철학은 한국교회의 반지성적 행태를 교정하고 보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신앙만 강조하고 성경 속 세상에만 관심을 갖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아퀴나스의 철학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우리의 신앙은 단순히 믿음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자연 만물에 대한 이해와도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성을 최대한 활용해서 이 세상의 질서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두 개의 책이 있다. 하나는 자연이며, 다른 하나는 성경이다. 자연을 이해하는 학문은 과학이며, 성경을 이해하는 학문은 신학이다. 아퀴나스는 창조하신 자연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이성의 활용을 강조했다. 이성을 활용해 얼마든지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다섯 가지 방법을 통해서 증명했다.

이러한 아퀴나스의 철학을 활용하면 성경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주변 있는 자연 사물들을 관찰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물론 아퀴나스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신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교회 크리스천은 중세처럼 여전히 신앙과 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크리스천에게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강조했던 아퀴나스의 철학이 한국교회 크리스천에게 새로운 통찰과 안목을 제공하지 않을까? 
 

<추천 도서>

F. 코플스톤, <중세철학사>(박영도 역, 서광사, 1988)
J. R. 와인버그, <중세철학사>(강영계 역, 민음사, 1990)

 

이신성 기자 shinsunglee7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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