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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웃음(2)

기사승인 2024.02.18  14: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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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이신 목사의 <시편 講讀>(4)

정이신 목사/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에제르상담선교협회 이사   
 

인간의 기도가 하나님의 메시지가 되어

시편이 들려주는 이야기[2-2]

 

정이신 목사

시편과 바벨탑

<4절>과 비슷한 사건이 인간이 짓고 있는 바벨탑을 보시려고 하나님이 땅으로 내려오신 일이다(창 11:5). <창세기>는 이 사건에 관한 서술을 통해 인간의 교만을 풍자했다. 인간들은 바벨탑을 쌓으면서 그들이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탑을 쌓는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니 이 탑은 개미들이 쌓아놓은 모래더미였다.
 

따라서 크리스천은 인간이 세운 도성과 탑의 허망함을 알려주시려고 땅으로 내려오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준 시각으로 일상에서 접하는 뉴스를 해석해야 한다. 그러면서 성경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 허세를 부리고 있는 장면을 보고 화만 내지 말고,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메시지가 되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pixabay.com

하나님이 저들을 보고 웃으신 이유는 저들이 하는 일이 주님 보시기에는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시각을 배우고 익혀야 세상 왕들이 꾸미는 헛된 음모에 속지 않는다(참조. 1:1).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대관식

“마침내(아즈)”라고 번역한 말은 “그때”란 번역이 더 적당하다(5절). 그때 드디어 하나님이 진노하셨다. 웃고 계시던 분이 화를 내시니 음모를 꾸미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하나님이 새로운 왕을 세우시기 위해 세상을 심판하셔야 하기에 그때는 진노를 발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대관식을 시온산에서 거행하셨다.
 

시온산에서 하나님이 왕의 대관식을 직접 거행하시니 다른 나라 왕ㆍ장군들이, 주님께 반역을 꾀하려던 왕ㆍ장군들이 저들의 꾀를 모두 내려놓고 시온산을 우러러봤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나타났는데도 어설프게 저들끼리 모여 계속 악인의 꾀ㆍ죄인의 길ㆍ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방법을 의논하고 있다가는(1:1), 주님께 미움을 받아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 그러니 하나님이 대관식을 주관하신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때부터 모든 걸 내려놔야 한다.
 

구약성경에서 거룩함은 하나님이 갖고 계신 성품 중 하나인데, 시온산도 그런 특성이 있기에 이곳에서 주님이 세우신 왕의 대관식을 공식적으로 진행했다. 그런데 시온산이 지닌 거룩함은 산세가 빼어난 데서 온 게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시기에 주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도 거룩한 백성이 돼야 했듯이(레위기 20:26), 주님이 선택한 산이기에 시온산이 거룩했다.
 

이것 외에도 예루살렘이 멋있어서 하나님이 거처로 삼으신 게 아니다. 하나님이 그곳을 선택해서 아낌없이 사랑하셨기에 그곳이 거룩한 곳이 됐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선택이 폭넓게 드러난 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주님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요한복음 3:16).
 

<7절>에서 시적 화자가 바뀌어 하나님이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이를 대언(代言)했던 사람이 주님의 뜻을 받들어 1인칭으로 기록했다. 마태는 이 말씀이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도 나타났다고 했다(마 3:16∼17). 그런데 이 말씀과 고대 중동의 다른 나라에서 이뤄졌던 왕의 대관식을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고대 중동의 대관식에는 왕의 권리와 특권, 책임과 의무 등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내용이 담긴 문서를 낭독하는 순서가 있었다. 그래서 고대 중동의 여러 나라에서도 왕의 대관식을 묘사할 때 이런 표현을 썼다.
 

그런데 이 표현이 갖는 기본 개념이 고대 이스라엘과 다르다. 고대 중동의 언약 체결 문서를 보면 주종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표현했다(참조. 시 82:6∼7). 또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는 왕이 신들에게 힘을 부여받은 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면에서 <7절>에서도 하나님이 왕에게 능력을 주시는 아버지라는 건 같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오직 왕의 아버지만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히브리민족의 아버지다(출 4:22).
 

이와 달리 고대 이집트는 이 표현을 신화적으로 이해해 파라오를 지상에 나타난 신의 현현(顯現)으로 여겼다. 고대 이집트인의 시각에서 파라오는 아몬 신이 인간 왕후를 만나 낳은 아들이다. 그래서 이집트의 왕족은 다른 가문의 사람들과 결혼하지 않았고, 오직 가족끼리만 결혼했다.
 

고대 이스라엘은 왕이 신의 아들이란 사상을 거부하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통해 왕이 된다고 했다. 왕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으로 왕위에 오르지만, 주님과 맺은 언약을 지켜야 그 지위가 보존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무엘기상>에 나온 사울처럼 왕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한 것이기에 왕위를 유지할 수 없다.
 

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아들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왕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선포하시면, 그는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읊조리고, 율법이 제시한 대로 살아가겠다는 언약을 지켜야 한다(참조. 1:2).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에 관해 모범을 보였다(마태복음 26:39).
 

하나님은 주님이 세우신 왕에게 주님께 요청하며 기도하라고 하셨다(8절).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게 은혜다. 아무나 기도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성령님의 은혜가 있는 사람이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기도하자 주님은 그에게 기업을 주신 후에(8절), 권능까지 주셨다(9절). 이때 왕이 하나님께 받은 권능은 주님이 주신 것이기에 주님 외에 어떤 존재도 이걸 훼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것도 하나님께 받은 권능에 해당한다. 하나님이 주신 권능으로 주님의 뜻에 순종해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패해서 벌어진 사건이란 사이비ㆍ이단의 해석은 <2편>을 인용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증언했던 신약성경의 흐름과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다.
 

고대의 대관식 풍경

   
                                             영국 찰스 3세 대관식                                          @pixabay.com

<시편>이 회자 됐던 시대의 풍습을 보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혼식에서 포도주를 마신 후 포도주가 담겼던 잔을 깨뜨렸다. 이는 결혼한 부부가 서로에 대한 언약을 파기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깨진 질그릇처럼 될 것이란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행동이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이집트에서는 왕의 대관식 때 왕이 여러 나라의 이름이 쓰여있는 토기를 깨뜨렸는데, 이는 다른 나라가 이집트의 왕에게 도전하면 질그릇처럼 깨뜨리겠다는 위엄을 상징적으로 보인 행동이었다.
 

이 외에도 고대 이집트에서는 왕의 대관식 때 네 개의 화살을 하늘의 네 방향을 향해 쏘는 상징행위를 했다. 이는 땅의 네 방위를 뜻하는 것으로 <요한계시록>에서도 숫자 4는 온 땅을 상징했다. 이집트 외에 메소포타미아에 전승된 글을 보면 통치자가 다른 나라들을 ‘질그릇처럼’ 깨뜨렸다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이런 자료들과 <9절>의 표현이 비슷하다.
 

온 땅이여 겸손하여라

네 번째 연을 시작하면서 시인은 시의 출발점으로 돌아왔고(10절), 시적 화자를 바꿨다. 이제 대관식을 한 왕은 3인칭으로 일컬어지고, 시인이 직접 등장해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을 노래한 이 연은 시를 쓴 목적이기도 한데, 그는 이 연에서 다른 나라 왕ㆍ장군들에게 저들이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줬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대적하려는 사람들은 그 왕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확실히 알고 겸손하게 행동해야 했다(11절). 시인에 따르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배후를 보고 왕 앞에서 겸손하게 행동하는 게 지혜다. 시인은 다른 나라의 왕ㆍ장군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했다(12절).

 

그런데 <12a>에 나온 아들에게 입을 맞추라(나샤쿠 바르)”는 그 의미를 확실하게 번역하기 힘들다. 그래서 당시의 상황을 반영해 엎드려서 왕의 발에 입을 맞추는 행위로 해석한다(12).
 

이는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 시행했던 왕에게 절대적으로 따르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복종의 표현이다. 따라서 이 행위에는 순종과 경배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사야서 49:23>에도 이런 이미지로 표현된 문장이 나오는데 이는 시가 말한 최종 경고다. 그렇기에 이 말씀을 따르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의 심판이 급속하게 내려와서 왕을 대적하는 사람이 망하게 된다. 왕이 그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게 아니라, 왕을 세우신 하나님이 저들을 심판하신다.
 

이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듯이 교회를 핍박한 악의 세력을 교회가 심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심판이 참으로 매섭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걸 알면서 인간이 행한 대로 영원까지 심판하시기에 이 심판이 무섭다. 저들과 달리 왕을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한 사람들에게는 복을 주신다. 그래서 그들은 <1:1>에 나온 “에세르(행복)”를 얻는다.
 

신약성경에서

<2편>의 전체적인 흐름이 갖는 메시지는 신약성경 전체가 말한 구원 섭리와 같다. 그리고 시에 나온 높은 이상은 다윗의 후손 중에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졌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윗의 다른 후손은 모두 진흙 발을 갖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그 발에 입을 맞출 수 없었다. 오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풀무에 달구어 낸 놋쇠와 같은 발을 갖고 있기에 그 발에 입을 맞출 수 있다(계 1:15).
 

1연(1∼3절)에 나오듯이 예수님의 탄생과 그분의 사역을 두고 세상의 왕ㆍ장군들은 허망한 계획을 세워 그분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심으로써 저들의 계획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명명백백하게 밝히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9절>에 나오듯이 쇠지팡이로 세상을 다스리신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면서 요한은 <9절>을 인용했다(계 2:27). 요한의 증언처럼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순종한 사람들은 첫째 부활의 복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통치에 참여한다(계 20:4).
 

<2>의 흐름을 고려했을 때 <12>은 먼저 왕의 대관식에 참석한 사람에게 그들이 지혜롭게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줬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 동참해서 그분의 대관식에 참석한, 시를 듣거나 읽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복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을 노래했다. 

정이신 목사 dearbook@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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