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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기사승인 2024.06.21  15:3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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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의 자전거 세상(5)

   


이현진 목사 / 살렘교회
 

구릿빛 피부, 단단한 근육, 늘씬한 몸. 바로 나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아내는 태양에 검게 그을린 내 모습에 아주 질색한다. 강단에 선 얼굴이 너무 어둡다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려면 이렇게 햇빛에 노출되어 팔과 다리에 ‘자덕 라인’이 생기고 얼굴은 검게 그을린다. 선크림을 바르고 팔 토시와 마스크로 중무장해 보지만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햇빛에 비타민 D도 생기니 건강한 표식이 아니겠는가! 이 정도는 자덕에게 별문제가 아니다. 자전거에서 심각한 문제는 바로 낙차다. 넘어지면 속절없이 다친다. 살이 까지고 뼈가 부러지기도 하고 심하면 목숨까지 잃기도 한다.
 

이런 말이 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두 부류가 있다. 낙차를 경험한 사람과 경험할 사람이다.” 누구나 한번은 크고 작은 사고가 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도 여러 번 낙차를 했다. 내 어깨에는 낙차한 상처가 남아 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사람들은 자전거 타는 것을 아예 시작하지 않거나 혹은 중도에 포기해 버린다. 또는 자전거를 타더라도 마치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풀장에서 헤엄치듯 얕은 라이딩에 머무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전거를 탈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한 번은 존경하는 선배 목사님이 사모님과 함께 나를 찾아오셨다. 이분은 어려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싶은 마음이 크셨는데, 사모님이 안전을 이유로 반대하셔서 미루고 있었다며 자전거 입문에 대해 문의하셨다. 놀랍게도 내 가이드에 따라 그날로 자전거에 정식 입문하셨다. 그것도 사모님과 함께!
 

이분들이 낙동강 그 멋진 자전거 길에서 라이딩을 즐길 때마다 나를 ‘자전거 싸부!’라신다. 얼마나 행복해 하시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몇 년을 변함없이 라이딩을 즐기신다. 나도 이분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는 것이 참 즐겁다.
 

내가 권해서 자전거에 입문한 목사님이 또 한 분 있다. 이분은 실력도 좋아서 첫 라이딩에 60km를 타더니 지금은 아주 실력 있는 자덕이 되셨다. 한번은 심각한 사고가 나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전화가 왔다. 가슴이 철렁해서 ‘아, 이제 이 친구는 더 이상 자전거는 안 타겠구나.’했는데, 웬걸 상처를 극복하더니 지금껏 잘 타신다. 이분에게 낙차 사고는 자전거를 떠나는 계기가 아니라 앞으로 더 조심스레 타게 된 하나의 경험일 뿐이었다.
 

우리 신앙생활에는 낙차가 없을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대체로 별 탈 없이 살게 해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기독교 신앙의 진수가 인생의 별 탈 없는 삶에 있는 것일까?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나 기독교 역사를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발견한다. 신앙은 모험이다. 신앙은 모험을 향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이 모험 길에는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갖가지 사고와 이에 따른 상처로 얼룩져 있다. 존 번연이 지은 천로역정이 바로 우리들의 신앙 여정 이야기가 아니던가! 사도바울은 자신이 겪은 온갖 신앙의 위험과 시험과 상함을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3∼27)
 

사도바울이 루스드라에서 험한 꼴을 당했다. 유대인들이 돌로 친 것이다. 돌멩이 하나 맞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집단 린치다. 그것도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개역개정: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자”)를 낫게 한 선행 직후에 말이다.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이 성 밖에 내다 버린다. 제자들이 죽은 것 같은 사도바울을 둘러서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바울이 벌떡 일어나더니 도로 그 성에 들어갔단다(행 14:20). 혀를 내두를 장면이다. 나 같으면 그 성에 도로 들어가기는커녕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른 데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기를 죽음으로 내몬 그 성으로 도로 들어가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행 14:22)
 

사도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사고가 나고 안 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럴 만한 가치에 따라 산 것이다. 그에게 안일은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사도바울이 붙들린 진정한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와 함께 온 하나님의 나라 복음이다. 그리고 이 복음이 이끄는 신앙 여정을 따라간다. 이것은 모험이다. 험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의 모험이다. 이 모험에 온갖 위험과 상함이 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실제로 사도바울은 이 모험에서 많은 상처를 몸에 받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 6:17)
 

‘흔적(스티그마)’는 뭔가에 찔린 자국을 말한다. 사도바울에게 자신의 몸에 흔적이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한 위험, 고난, 감옥 생활, 매맞음 등에 의해 그의 몸에 남은 자국들이다. 그는 이런 흔적들을 자랑스러워한다. 이 흔적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를 위해 모험을 떠난 사람임을 증명한다.
 

자덕들은 팔과 다리에 자덕 라인(햇빛에 탄 모습)이 있다. 이게 자덕의 증거다. 그저 안전한 동네 몇 바퀴 타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흔적이다. 자덕은 자전거를 타면서 일어날 수 있는 위험들 때문에 위축되지 않는다. 물론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라이딩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요점은 상처는 모험을 가로막지 못한다는 것이다.
 

톨킨이나 C.S 루이스가 쓴 판타지 소설이 있다.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다. 전부 기독교적 가치관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리고 주제는 모험이다. 신앙은 모험을 향해 떠나는 여정이라는 것이다. 둘 다 영국인들이라서 그런지 강인하다. 요즘의 기독교인들을 이에 비교하면 너무 심약하지 않은가? 조그만 상처를 받아도 화들짝 놀라 신앙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으려 들지는 않는가?

 
 
이현진 목사

이현진 목사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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