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리의 사색 (10)
@Pixabay.com |
전성옥 / 부산 거성교회 집사
이마에 닿는 공기가 참 좋다. 세상이 환하고 찰랑이는 나뭇잎도 한결 생기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건물 유리창에 비친 내 옆모습이 흐뭇하다. 다리가 길고 늘씬해 보인다. 착한 몸종을 둔 덕분이다. 내 발을 모시고 있는 이 몸종은 저도 유쾌한지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또각또각, 경쾌한 리듬의 노래를.
흔히 출세한 사람을 두고, 세상을 눈 아래로 보게 되었다 한다. 높음을 향한 인간 절대욕망의 다른 표현이다. 사람들은 산을 오른다. 오르지 않고 그냥 두어도 누구 하나 탓할 리 없건마는 한사코 높은 산을 오른다. 높으면 높을수록 더 오르려 기를 쓴다. 인간의 상승 욕구는 끝이 없다. 이런 인간의 상승욕은 비행기를 만들게 했고, 기어코는 하늘의 별을 잡으러 우주로 날아가게 했다. 이쯤 되면 욕망이 아니라 진보와 발전의 동력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하이힐을 좋아한다. 몇 번이나 발목을 접질렸지만, 이 나이가 되도록 포기하지 못한다. 포기는커녕 오히려 굽 높이가 더해가고 있다. 하이힐을 신으면 높아진다. 물론 우주로 날아갈 정도는 못 되고 땅으로부터 고작 십 센티 정도 올라갈 뿐이다. 하지만 그 상승감은 단순한 치수상의 높이만이 아닌 또 다른 무엇이 있다. 그렇다고 늘 좋을 수만은 없다. 조금 오래 걷노라면 발가락이 부러질 듯 아프고, 발목도 곧잘 삐끗거린다. 하지만 이는 당연한 기회비용이니 기꺼이 지불한다.
얼마 전, 발목을 심하게 접질렀다. 웬만하면 찜질이나 파스 등의 자가치료로 해결을 보지만 이번에는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다. 절뚝거리며 정형외과를 찾아갔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인대가 허옇게 부풀어 올라 있다. 진통제를 맞고 깁스를 했다. 치료를 마친 뒤 회를 바른 무거운 발에 삼선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오는데, 의사가 하는 말. 하이힐은 허리, 무릎, 발목 어디 한군데 도움이 안 되니 이제는 신지 마세요. 나는 슬며시 웃어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하지만 그 웃음의 의미란 게 ‘글쎄요, 노력은 해 보겠지만 아니, 노력하는 것 그 자체가 싫구만요.’이다. 짐작건대 아마 의사도 내 웃음의 의미를 알았을 것이다. 그 역시 직업상 늘 하는 당부를 했을 뿐이고 병원 문을 나서는 저 환자가 높은 신을 포기하지 않으리란 것도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하이힐은 중독이다. 독한 마약이다. 한번 빠져들면 헤어 나오기 어렵다. 이 작고 앙증스런 물건은 여자에게 엄청난 시혜를 베푼다. 우선 발의 각도가 높아지면서 근육이 늘어나 종아리가 살짝 가늘어진다. 발목도 잘록해져서 한결 날렵하고, 자연스레 엉덩이도 탱글 올라간다. 게다가 허리가 앞쪽으로 살짝 휘어지면서 가슴도 더 봉긋해진다. 정면에서 보면 굽의 높이만큼 올라간 발등이 다리의 연장인 듯 기분 좋은 착시도 일으킨다. 여자에게 하이힐은 그야말로 저투자 고효율의 극치다.
|
이십여 년 전 결혼식 날, 나는 바닥없는 민 고무신을 신었다. 신혼여행을 떠날 때도 납작구두를 신었다. 이유는 키다. 평균 키를 아주 조금 사알짝 넘는 나와, 반대로 평균 키보다 아주 조금 사알짝 작은 남편 때문이었다. 물론 맨발로 서면 당연히 남편이 크지만, 부풀린 머리 위에 베일까지 썼는데 거기다 신부용 하이힐을 신어버리면 키가 한 뼘 이상 역전될 판이다. 물론 질질 끌리는 드레스가 억울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높은 신을 신어 머리 꼭대기가 남편보다 높아지는, 그런 껑충한 모양새는 싫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신혼 초, 남편을 위해 낮음을 기꺼이 수용했던 내 신발 굽이 세월의 두께만큼 점차로 키를 높여가고 있었으니… 아이들이 취학할 즈음 사오 센티의 미들 힐이 되고, 중학생이 될 무렵에는 칠팔 센티의 하이힐로 넘어가더니 몇 년 전부터는 십 센티 이상의 킬힐로까지 올라왔다. 나이와 함께 신발 굽이 낮아지는 것이 보편적 상황이고 정한 이치인데 나는 어쩌자고 보편과 이치를 역행하는 것일까. 물론 한동안 높아져 온 유행을 따른 것도 있고, 딸들이 신는 높은 신에 자극을 받은 것도 이유라면 이유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꼭 그런 외형적인 것만이 아닌 다른 무엇이 있다. 우물에 빠진 동전 같은, 바닥에 잠겼지만 햇살이 들 때마다 반짝 빛이 튕기는 그 무엇들이 있다. 그건 출산과 노화로 인해 줄어 버린 키를 보충하고 싶은 안타까운 욕심이요, 만만찮은 삶을 지탱해 오느라 젊음을 깎아 먹고 키까지 깎아 먹은, 그래서 깃 빠진 닭처럼 추레해진 중년의 나, 그런 나를 향한 내 측은지심이 그것이다.
내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는 사이, 신발장 속에서는 종족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자비심 없는 높은 족이 힘없는 낮은 족을 몰아내기 시작했고, 이에 키 작은 종족은 멸족의 위기에 내몰렸다. 마치 인간 세상처럼.
그런데 이와 동시에 또 다른 곳에서도 밀고 밀리는 상황이 생겨났다. 신발 굽과 내 목소리가 평행으로 비례한다. 신발을 힘입어 키가 높아지는 것만큼이나 세월에 힘입은 내 목소리도 점차 높아져 간다. 결코 의도하지 않았건만 설계도가 있는 듯 차근차근, 그리고 공기 흐르듯 자연스럽게.
십 센티 신발을 신고 주변을 돌아본다. 남편을 위해 기꺼이 민 고무신을 신던 그 보드라운 새색시는 간 곳이 없고, 골프공같이 단단한 아줌마 하나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다. 역으로 무엇이든 자신의 결정이 곧 법이요, 반듯하고 단호하기가 기왓장 같던 남편은 냉동실에서 내어놓은 떡처럼 말캉해져 가고 있다. 급기야 근자에 들어서는 빙 에둘러서 내 의견을 타진하곤 한다. 차마 들어내어 놓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물을 정도까지는 못 내려놓고, 이러저러하던데 하고 슬그머니 말을 흘리고 간다.
그렇게 말을 흘리고 가는 남편의 짧은 그림자. 어쩌나, 그의 키도 줄어 있다. 긴 세월,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에 고군분투하느라 그 역시 키가 줄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남편의 신발 굽은 여전하다. 이십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그 높이 그대로이다. 오히려 뒤꿈치가 닳아 있다. 뜨끔하다. 나날이 높아만 온 내 신발 굽이 미안하다.
하지만, 좀 뜨끔하고 좀 미안하지만 높은 신 좋아하는 나여! 그런 나를 그대로 두어라. 한 줌씩 휘발해버리는 젊음에 대한 안타까운 미련이라 이해해 주어라. 어차피 환갑이 되고 진갑이 되면 신으라 축수를 해도 못 신을 것이니 신을 수 있을 때 신고,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도록 말이다. 어차피 너는 그저 인간이지 않은가. 신이 인간에게 상승 욕구를 심어놨다지만 높아 봐야 얼마나 높아지겠으며, 세상을 눈 아래로 봐야 얼마나 보겠는가. 아무렴 하늘의 높이와 경쟁하려 하겠는가. 집 울의 동백꽃과도 키 시샘을 못 하는 그저 한낱 인간인데. 뒤축 닳은 해동 떡이 마음에 쓰인다면 그 또한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
종족분쟁 중인 신발장에 냉엄한 카스트가 더해졌다. 목이 뻣뻣한 장화와 부츠들은 모서리 칸 한쪽에서 운신을 못 하도록 눕혀진 채 숨죽여 살고, 운동화와 슬리퍼들은 아래 칸에 모여 앉아 무수리처럼 다소곳이 지낸다. 하이힐은 지체를 고려하여 신발장 속 위치도 높고, 행여 다칠까 공간도 넓다. 외출을 위해 신발장 문을 연다. 눈높이보다 높은 곳에 뒤꿈치를 바짝 든 하이힐들이 도도하게 코를 튕기고 있다. 눈을 반쯤 내리뜨고 나를 훑어 내린다. 저런, 주인을 아래로 깔아보는 저 오만방자함… 한마디 하려는데, 철썩 귓바퀴에 붙는 소리. ‘나 덕분에 누리는 호사를 감사하시욧!’
그래, 뭐 어떠랴. 때로는 임금도 내시 눈치를 보며 살았다는데… 방자한 하이힐 하나에게 발을 맡기고 현관을 나선다. 행선지는 백화점 신발코너, 남편에게 선물 할 키높이 구두를 사러 갈 참이다. 팔랑팔랑 가볍게 걷는다. 기분 풀린 하이힐도 다시 노래한다. 또각또각 경쾌하게.
|
|||
전성옥 집사 |
2012년 <월간문학>에 소설로, 2013년 <에세이문학>에 수필로 등단한 후 <에세이부산 동인>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삶의향기 동서문학상 대상'(2012년), ‘부산수필문예 올해의 작품상’(2023년)을 수상했다.
전성옥 webmaster@amennews.com
국민은행 607301-01-412365 (예금주 교회와신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