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이수정과 마가복음

기사승인 2024.08.21  09:08:16

공유
default_news_ad1

- 토박이 예수꾼 백낙규 장로의 영성과 신앙 (2)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William B. Harrison)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초기 남장로교 조선 선교역사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현재도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William F. Bull)의 선교행적을 정리해 집필하는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있기도 하다.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를 다룬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에 이어 토박이 예수꾼 백낙규 장로의 영성과 신앙을 담은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를 연재한다.

 


백종근 목사 비버튼 한인장로교회 정년은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제자들은 주님의 이 분부를 지상 대명령The Great Commission으로 여겼다. 사도 바울이 로마를 넘어 지중해의 끝자락 서바나까지 가서 선교하기를 간절히 염원했던 것처럼 사도행전적 증인의 사역은 2천 년 교회사 내내 땅끝 선교를 열망하며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유대에서 안디옥으로, 그리고 소아시아와 지중해로,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을 동반하면서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그리고 다시 태평양을 가로질러 은둔의 나라 조선에도 찾아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24:14)
 

모든 열방에게 복음전파가 완료되는 그때를 구속사의 종결로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기독교의 역사는 선교의 역사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복음전파의 발길이 조선에 건너오려 할 즈음 하나님께서는 디딤돌을 미리 준비해 두셨다. 조선의 관료 이수정의 개종과 그가 했던 최초의 성경 번역이 그것이었다.
 

이수정의 개종
 

이수정은 1881년 신사유람단의 수행원 자격으로 일본에 왔다. 이때 동행했던 수행원들 가운데에는 윤치호, 유길준도 있었다. 이수정의 임무는 일본의 혁신적인 농업기술과 생산성을 눈여겨보고 배워 가는 것이었다. 이미 일본을 다녀온 지인으로부터 일본 농업의 근대화를 지휘하던 쓰다 센津田 仙 박사를 소개받은 터였다. 어느 날 쓰다 센은 조선에서 온 이수정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이수정이 그의 집을 방문해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한쪽 벽에 걸려있는 족자의 글귀가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虛心者福矣 以天國乃其國也"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이수정이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글귀였다. 글귀에 호기심을 보이는 이수정에게 쓰다津田 박사는 서양의 기독교를 소개하며 글귀의 원전인 한문 성경 한 권을 건넸다. 그가 건네준 성경을 들고 숙소에 돌아온 이수정은 그날 밤 이 '낯선 책'을 펼쳐 들고 읽어보았으나 그가 섭렵해 왔던 유학의 경전과는 너무도 판이했다.
 

일본에 함께 왔던 신사유람단 일행은 일정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갔으나 수행원이었던 이수정에게는 체류의 기회가 따로 주어졌다. 이렇게 일본에 머물게 된 그가 여러 기관을 둘러보며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모든 공문서가 한문이 아닌 일본어로 작성되고 있는 점이었다. 일본은 이미 자국어를 공식화하고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이라는 중화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고 있었으며, 지금까지 교화敎化의 대상으로만 여겨왔던 변방의 일본이 세계 무대에서는 조선을 저만치 앞질러 가고 있었다.
 

큰 충격을 받은 이수정은 아직도 주자학에 기대어 세상을 바라보는 조선의 현실을 되돌아보았다. 이러한 조선에 아무리 새로운 문물을 배워 간다고 하더라도 과연 근본적인 개혁을 이뤄낼 수 있을지 깊은 회의가 밀려왔다. 이수정은 일본의 개화 과정에 미친 서구의 세계관을 새롭게 검토하며 이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1882년 12월 25일 그는 츠다津田 박사의 안내로 한 일본인 교회에 참석했다. 마침 성탄절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난생처음 참석한 예배가 낯설고 어색했으나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뜨거운 감동이 밀려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의 마음이 예배에 열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침내 그는 이듬해인 1883년 4월 29일 북장로교 선교사 조지 낙스George W. Knox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았다는 소식은 곧바로 일본 교계에 큰 화제가 되었다. 일본 교계는 물론 일본에 머물던 미국 선교사들까지 흥분시킨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이수정의 수세水洗는 곧바로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예고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 주재 미국성서공회 총무 헨리 루미스H. Loomis 선교사도 이 소식을 들었다.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다
 

이수정을 만나본 루미스H. Loomis 목사는 그의 비범함을 첫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수정에게 한글 성경 번역을 의뢰했다. 이수정은 조선의 지식인이었다. 한문 성경에 한국식 토吐를 다는 정도라면 그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현토한한縣吐漢韓 신약성서를 간행했으며 이어서 1885년 초에는 최초의 한글 성경인 <신약 마가복음서언해>를 펴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 아래 출간된 존 로스John Ross의 조선어 성경이 구어체의 관서방언이었던 것과는 달리 미국성서공회의 지원으로 출간된 이수정의 번역 성경은 문어체의 표준어였기 때문에 이후 우리말 번역 성경의 기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조선 선교의 문을 여는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김옥균 등 개화파들이 일본으로 망명을 해왔다. 그 당시 대부분의 개화파 정객들은 기독교를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대신할 개화의 수단 정도로만 여겼으나, 이수정은 조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오직 복음뿐이라는 확신을 개종할 때부터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수정은 1885년 개화파 유학생들과 함께 기독공동체를 조직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도쿄 조선인 유학생 교회를 시작했다. 자신이 시찰단으로 일본에 올 때 함께 왔었던 윤치호를 이때 유학생 교회에서 다시 만났다. 이수정에 의해 복음을 듣게 된 윤치호는 그 후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에모리 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함께 '전국신학생연합선교대회'에 강사로 참석해서 조선 선교를 호소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태평양을 넘나들며 지속되는 사도행전적 사역이었다. 그 선교대회에서 활약했던 언더우드와 윤치호 이 두 사람은 남장로교 '7인의 개척자'가 조선 선교를 결심하도록 계기를 만든 주역들이었지만 놀랍게도 그 뒤에는 이수정이 있었다.
 

조선의 마게도냐인 이수정
 

어느 날 이수정은 기이한 꿈을 꾸었다. 낯선 두 남자가 자기에게 다가와 짊어진 보따리를 이수정 앞에 내려놓았다. 하나는 키가 컸고 하나는 작은 키였다. 궁금해서 이수정이 물었다.

"이게 무엇이오?“

"당신네 나라에서 가장 필요한 귀한 책이요"

"무슨 책인데 그러시오“

"성경이라고 하오“
 

그리고는 두 남자가 사라져 버렸다. 이수정은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얼마 후 이수정은 미국성서공회 총무 헨리 루미스 목사를 만나는 자리에서 자신의 꿈 이야기를 했다. 루미스 목사는 이를 무심히 넘기지 않고 미국성서공회 간행물에 이수정의 꿈 이야기를 소개하며 조선 선교의 긴박성을 호소했다. 이 일을 계기로 이수정은 조선의 선교를 촉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자신이 직접 미국의 선교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여러분의 나라는 우리에게 기독교 국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지체한다면 나는 다른 나라가 조선에 선교사를 머지않아 파송하리라 생각하며... (중략) 비록 나는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지만 여러분들이 파송하는 선교사들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종 이수정 드림

그 당시 일본의 영향력이 조선의 여러 분야에서 크게 증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조선인은 일본을 호의적인 정서로 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이수정은 일본 교회가 조선 선교에 앞장서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처음부터 이수정은 조선 선교가 성공하려면 일본이 아니라 미국이 나서야 한다는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마침 미국 북장로교 입장에서도 인도를 비롯한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선교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던 터에 일본에 주재하던 낙스George W. Knox 선교사로부터 조선 선교에 대한 요청이 여러 차례 보고가 되자, 이때부터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는 조선 선교에 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한편 앞에서 언급한 선교잡지에 실린 이수정의 간절한 편지를 읽고 감동한 이들이 있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였다. 얼굴도 모르는 조선인이 기고한 한 통의 편지로 인해 벽안의 두 청년은 조선 선교를 결심하고 있었다. 마치 드로아에서 환상 가운데 나타난 마게도냐 사람의 권유로 선교 발길을 유럽으로 돌린 바울의 사정과 너무도 흡사했다. 조선으로 선교의 물꼬를 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였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행 16:9-10)
 

얼마 후 조선 선교사로 파송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먼저 일본에 들러 선교 청원을 했던 이수정을 만났다. 그들이 상상했던 대로 이수정은 탁월한 식견과 열정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들은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지닌 조선인 청년 이수정을 통해 조선어를 배웠으며 그가 번역한 성경을 가지고 조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몇 해 뒤에 남장로교 선교사들 역시 이수정의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 내한했다. 선교사가 이미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선교지에 들어간 사례는 2천 년 기독교 선교 역사 어디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미국성서공회 기관지 ‘바이블 소사이어티 레코드’ 1903년 12월호에 실린 이수정의 미공개 사진 - 박용규 교수 제공 [출처] - 국민일보

 

마가복음으로 시작한 선교
 

이수정은 마가복음을 제일 먼저 번역했는데 아마도 선교 복음서로서 마가복음이 가장 적절하다고 여긴 헨리 루미스 목사의 생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복음서 가운데 최초로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마가복음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과 그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의 공생애만을 기록했기 때문에 문장이 짧고 간결하다는 특징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가라사대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1910년 선교부 연합공의회에서 "백만 영혼을 그리스도께"라는 표어를 채택하고 열정적인 복음 전도를 시작할 때도 마가복음을 인쇄하여 배포한 것은 이런 특징 때문이라 여겨진다.
 

이렇게 번역된 이수정의 마가복음이 선교사들의 손에 들려져 조선으로 향하게 된다. 얼마 후 장터에서 백낙규의 손에 쥐어진 그 쪽복음도 바로 마가복음이었다. 조선의 백성들이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 이 하나님 나라의 때가 가까웠다는 선포는 앞으로 전개되는 조선의 선교에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역동적인 선포였다. 

 

백종근 목사 webmaster@amennews.com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교회와신앙> 후원 회원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은행 607301-01-412365 (예금주 교회와신앙)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