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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침체의 늪에 빠지다

기사승인 2024.08.28  09:3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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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박이 예수꾼 백낙규 장로의 영성과 신앙 (3)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William B. Harrison)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초기 남장로교 조선 선교역사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현재도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William F. Bull)의 선교행적을 정리해 집필하는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있기도 하다.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를 다룬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에 이어 토박이 예수꾼 백낙규 장로의 영성과 신앙을 담은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를 연재한다.


백종근 목사 비버튼 한인장로교회 정년은퇴

   

 

동학농민항쟁의 발발
 

대원군의 간섭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親政을 유도하기 위해 민비는 외척들을 끌어들여 세도정치를 부활시켰다. 민씨 가문 출신 몇몇이 권력을 나눠 쥐면서 조정은 민씨 종친회나 다름없었다. 구한말 여흥 민씨 일파가 차지한 요직이 260명 가량이나 되었다니까 민비 집안에서 벼슬을 하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단일 성씨가 조정을 독식한 것은 조선 역사에 없던 일이었다. 붕당정치는 거기에 비하면 수준급이었다.
 

세도정치는 왕권의 약화를 불러왔고 외척들의 권력 남용으로 기강이 해이해지자, 삼정의 문란으로 대표되는 부정부패가 만연해지면서 지방 말단관료에 이르기까지 매관매직이 성행했다. 관직을 돈으로 산 벼슬아치가 백성을 수탈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고종 13년(1876년)에는 오뉴월 한여름에도 우박과 서리가 전국적으로 내리는 일이 발생하자, 흉흉한 이야기들이 요언謠言을 타고 온 나라에 떠돌았으며, 거기에 전례 없는 참혹한 기근까지 연이어 덮치자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어느 시대든 사회적 혼란과 불안이 가중되면 신흥종교들이 고개를 내밀 듯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인내천人乃天, 곧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며 인간 평등과 존중의 길을 제시하는 동학東學이 도탄에 빠졌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삼남지방三南地方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동학의 교세가 날로 커지자 위협을 느낀 조정에서는 동학東學 역시 서학西學과 같이 민심을 현혹하고 국가의 기강을 흔드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세우고, 곧바로 교주 최제우를 붙잡아 처형하고 말았다. 교주를 제거하면 교세가 누그러질 줄 알았던 조정朝廷의 의도와는 달리 웬걸,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지고 있었다.
 

전라도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이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만석보萬石洑라는 저수지를 축조하고, 그것이 완성되자 터무니없는 고액의 수세를 뜯어내면서 그것도 모자라 걸핏하면 죄 없는 농민들을 잡아다 죄명을 씌워 때리고 재물을 착복했다. 농민들은 여러 차례 대표를 보내어 관아에 진정을 해보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수탈과 학정에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전봉준을 내세워 무장봉기를 했는데, 이때 참여한 농민들의 대부분이 동학교도들이었기 때문에 후에 이 사건을 '동학농민항쟁'으로 불렀다.
 

전라도는 지형적으로 평야 지대가 많고 해안선이 길어 산물이 어느 고장보다도 풍부했다. 실제로 조선의 재정 40% 이상 거의 절반이 전라도로부터 충당될 정도였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이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를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까지 말했겠는가? 지방의 물산을 육로로 한양까지 운반하기 위한 조선 시대 1번 국도가 호남을 지나는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조선 시대에만 해도 전라도는 생업에 종사하는 인구비율이 어느 지역보다도 많고 실제 인구도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조정의 실권자들은 물산이 풍부한 호남지역을 오랫동안 수탈대상으로만 정당화하면서도 언제나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을乙은 스스로 자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갑甲에 의해 만들어질 뿐'이라는 말이 있듯 동학농민항쟁은 이런 수탈구조를 탈피해 보려는 농민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요, 그것이 호남지방에서 일어난 것은 필연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 농민군은 1만여 명의 엄청난 위세를 과시하며,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로 달려가 공략에 나섰다. 고부에서 첫 농민봉기가 일어난 뒤 4개월 만이었다. 전주는 천년 고도요 관찰사가 다스리는 호남 제일의 도성으로 위세가 당당했지만 결국 농민군에게 성을 내주고 말았다.
 

농민군의 무혈입성은 그들이 강해서라기보다 무능한 조정과 부패한 관리들에 대한 민심 이반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신 경기전慶基殿과 전주 이씨 시조 위패를 모신 조경묘肇慶廟가 있는 곳이었다. 더구나 전주성 함락은 곧 동학군이 서울을 향해 진격해올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다급해진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이때부터 청나라와 일본의 주도권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은 격동의 시대를 맞아야 했다. 조선으로부터 요청을 받은 청나라는 즉각적으로 군대를 파병했다.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는 소식이 현해탄 건너 일본에 전해지자, 그렇지 않아도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 역시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곧바로 군대를 상륙시켰다.

 

전주화약
 

청일 양국이 군대를 파병하며 개입하자 하루 속히 사태를 수습하기 원하는 조정에서는 농민군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겠다며 회유懷柔했다. 전라감사 김학진은 8월 6일 선화당宣化堂에서 전봉준을 만나 조속한 폐정개혁을 약속하고, 전라도 53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해 농민들의 자치적 민정을 허락한다는 전주화약全州和約을 체결하자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자진 철수하였다.
 

청일전쟁과 일본의 승리
 

전주화약이 있고 나서 농민군이 해산하자, 청일 양국군의 주둔 명분이 사라져 버렸음에도 오히려 군대를 계속 증파하며,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노리던 두 나라는 결국 7월 25일 서해 풍도 앞바다에서 격돌했다. 이 해전에서 일본은 청나라의 함대를 격침하며 승기를 잡더니, 7월 28일 벌어진 성환 전투에서도 일본 육군이 청군을 패배시키며 전세를 갈랐다. 9월 15일 평양성 전투와 9월 17일 다시 맞붙은 서해 해전에서도 청나라 북양함대를 연거푸 격파하며 개전 2개월 만에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일본의 내정간섭
 

청나라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승리를 한 일본은 이때부터 본심을 드러내며 조선의 실권을 장악하고 내정간섭을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속내를 알아챈 고종은 일본군의 철수를 강력히 요청했으나 오히려 일본군은 친일내각을 앞세워 고종을 경복궁에 연금하고 조선의 개혁을 서두르면서, 관군과 연합한 일본군을 전주로 내려보내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고 전주화약을 무산시키고자 했다.

 

백종근 목사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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