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신 모계사회

기사승인 2024.08.28  13:35:21

공유
default_news_ad1

- 율리의 사색 (13)

   
사진 출처 = 여성신문


전성옥 집사 / 부산 거성교회 

 

   

삼십 년 전, 정가 이천구백 원의 책을 샀었다. 오늘, 서재를 온통 뒤져 그 책을 찾는다. 아니 ‘시몬느 베이유’ 그녀를 찾는다. 나는 오랫동안 그녀를 자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진리 없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그녀를 삼십 년 만에 강신주의 책에서 다시 만났다.
 

마음이 달려간다. 까마득한 세월 그만큼의 뒤로, 사정없이 달려간다. 프랑소와즈 사강, 버지니아 울프, 이사도라 던컨, 전혜린 그리고 시몬느 베이유 등을 만났던 시절, 그 풋 젊음의 시절로 달려간다. 책등에 손을 멈춘다. 마음이 멈춘다.
 

용케 살아남았구나. 책장 후미진 구석에 겨우 숨을 붙이고서. 손바닥에 얹히는 책의 무게, 가볍다. 참 가볍다. 오래된 책들은 훌쩍 가볍다. 세월을 견뎌내느라 진이 빠진 것일까, 활자에 담은 제 마음을 읽는 이에게 모두 넘겨줘 버려 그런 것일까. 어쨌거나…, 책이 야위는 동안 나는 그 책을 그리고 그녀를 까맣게 잊었다.
 

강신주의 책에서 짧게 등장한 그녀. 그리고 오늘 나는, 오래 잊었던 베이유를 찾는다. 노랗게 변색 된 책장, 6호나 될까… 좁쌀만 한 글씨에 주조 활자 특유의 널널한 자간, 가슴이 찡하다. 옛 활자 속에 담겨있는 베이유. 이십 세기 초반 서른세 해의 짧은 삶을 살았던 여자, 지식인 집안 출신의 교사였으나 약자의 삶을 이해하려 노동자 생활을 했었던 그녀,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무정부주의자 부대에 자원입대한 그녀. 어리젊었던 그 시절의 나는 그런 그녀에게 매혹되었고 동경해 마지않았다.
 

2009년 6월 23일, 우리나라에 ‘오만 원권’이 등장했다. 한동안 이 초고액 권의 발행을 두고 설왕설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중 으뜸은 등장인물로 누구를 앉힐 것인가였다. 그간 우리나라의 돈은 죄다 이씨 가문 남자들이 들고 있었다. 세종 이도, 율곡 이이, 퇴계 이황, 충무공 이순신, 심지어 해방 직후 이승만에 이르기까지. 이를 두고 우스개도 생겨났다. 남쪽 섬 출신의 김모 씨가 나랏님 자리에 있을 때, 이중모음 잘 안 되는 그 특유의 발음으로 “야~ 이거 큰일 아이가. 우리나라의 돈이란 돈은 이 씨들이 몽땅 다 들고 있네!” 하였다는.
 

그런데 이십일 세기로 넘어오자 이 사상 최고가의 화폐를 이씨가 아닌 신씨 성을 가진 이가, 그것도 여자가 차지해 버렸다. 천지개벽할 일이다. 지금까지 등장한 이씨 가문 남자들과 동전에 앉은 꽃과 새와 벼와 또 국보 다보탑까지 다 합쳐도 16,661원밖에 안 되는데, 친정집에 앉아 낭창하게 초충도나 치던 여자가 트리플 스코어도 넘는 50,000원의 주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진=한국은행, 시니어매일에서 재인용

화폐의 변화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미국도 처음으로 여성이 등장한다. 20달러 지폐의 새 인물로 흑인해방운동가 ‘해리엇 터브먼’이 결정되었다. 스코틀랜드 역시 새로 발행될 5파운드에 작가 ‘낸 셰퍼드’를, 10파운드에는 여성 과학자 ‘메리 서머빌’을 선택했다. 영국 또한 10파운드 모델을 다윈에서 오만과 편견의 ‘제인 오스틴’으로 교체했고, 일본도 여성 작가 ‘히구치 이치요’를 5천 엔 주인공으로 앉혔다.
 

변화는 화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여성이 정치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르고 있다. 대처 전 영국 총리(1979~1990년), 메르켈 전 독일 총리(2005~2021)만 있는 것이 아니다. 2022년 기준으로 유럽은 44개국 중 14개국의 대통령과 총리가 여성이다. 이는 유럽국가 삼 분의 일에 해당하는 비율이다. 아시아도 1960년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스리랑카 총리를 시작으로 인도의 인디라 간디, 이스라엘 골다 메이어, 파키스탄의 부토 등 12명이 넘는 여성이 현대 아시아 정부를 이끌었다. 이것은 소리다. 세상의 문이 열리는 소리이고 거대한 흐름의 바퀴가 또 한 번 돌아가는 소리이다.
 

선사의 오랜 시간, 혈통은 모계로 이어졌으며 그 수만 년 동안 세상의 지배자는 여성이었다. 여성만이 잉태할 수 있었고, 수유 또한 여성만이 가능했기에 여성은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는 신의 대리자였으며, 더 나아가 그 신조차도 여성의 몫이었다.
 

강력한 여신은 세계 곳곳에 존재했다. 생명과 다산을 상징하는 구석기 비너스를 비롯하여, 페르시아의 암푸사, 힌두의 칼리마이 등은 인간의 죽음을 관장했으며 ‘나는 존재하는 것, 존재하게 될 것, 존재하던 그 모든 것이며 내가 낳은 열매는 태양이었다.’라는 대단한 여신 이집트의 누트도 등장했다. 중국 창조신화에도 흙으로 인간을 만들어 낸 여와 여신이 등장하고, 일본 시조신 역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여신으로 이세신궁에서 여전히 경배받고 있다. 우리나라 건국신화 주인공도 웅녀이다. 즉 시작도 여성이며, 죽음과 영혼의 세계까지도 모두 여신의 영역이었다.
 

신화는 단지 신화의 내용에만 머물지 않는다. 신의 이름을 빌려 인간을 표현했고, 신화를 통해 세상의 모습을 기록했다. 그러나 세상도 머물기만 하는 것이 아니어서 어느 시점부턴가 힘센 자가 주인이 되는 완력 천하로 바뀌었다.
 

그 세월 동안, 세계 곳곳에서 여성 구속을 위한 기발하고 잔인한 습속들이 끝도 없이 생겨났다. 전족에 할례에 정조대에 은장도에… 게다가 문명인 자부심 대단한 서구에서조차 이십세기 초반까지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았다. 여성들은 후보를 판단할만한 지능이 안 된다는 기막힌 이유로. 우리나라라고 다를까. 조선 중기 왜와 청에게 당했던 굴욕적인 패배, 싸움에서 진 그들은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하여, 바깥의 적이 아닌 손쉽고 만만한 집안 단속에 몰두했다. 여성에게서 상속권을 박탈했고 칠거지악으로 삶을 옥죄었으며 열녀문과 족보를 앞세워 정조를 강요하고 재혼을 막았다.
 

세상을 움직이는 바퀴는 얼마나 큰지 한 번 도는데 천 년, 이천 년 혹은 더 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세상은 반복이다. 하루가 반복되고, 계절이 반복되고 해가 반복되듯이. 여신의 시대에서 힘센 자의 시대로 그리고 또 오래된 미래로. 여성도 세상의 문을 자기 의지대로 열 수 있는 그런 시대로.
 

여기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 있으니 인간의 근원적인 본능, 바로 핏줄에 대한 애착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세상에서 진짜는 메추리 알과 외손자밖에 없다고. 이유인즉 모든 것은 다 가짜를 만들 수 있지만, 메추리 알은 가짜를 만들면 오히려 비용이 더 들기에 만들지 않는 것이고, 자손의 경우는 여자의 의지에 따라 핏줄이 결정되니 그렇단다. 적절하지 않은 예이지만 며느리가 딴마음을 먹으면 그 집은 뻐꾸기 새끼를 키우는 것이다. 그러나 모계인 외손은 다르다. 아비가 누구든 내 피가 흐름은 분명하고도 분명하다. 이만큼 확실한 진짜가 세상 어디 있을까. 이런 이유들로 보면 세상은 언제나 모계사회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핏줄이 숨어서 도왔다 해도 여기에 오기까지, 세상이 그저 움직이고 세월이 그저 흐른 것은 아니다. 베이유처럼 손등이 깨어지도록 문을 두드리고, 손톱이 빠지고 손마디가 닳도록 세상의 문을 열어온 이들이 있었다. 화형당한 수많은 마녀들과, 이름자 하나 남지 않은 또 다른 많은 그녀들의 쓰고 매운 삶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런 그녀들에게 빚진 자이다.
 

땅 위에는 새로운 꽃이 피고, 지금 내가 베이유를 기억하듯 오십 년, 백 년 뒤의 세상에서도 사람의 가슴에 압화로 찍히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비록 화폐에 등장하듯 화려하지 않아도, 극강의 힘을 가진 국가수반이 아니어도 말이다.
 

   

여성 할례 철폐를 외치는 소말리아 출신의 모델 ‘와리스 디리’, 열다섯 나이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파키스탄 소녀 ‘말랄라 유샤프 자이’, IS의 성노예였던 스물셋의 이라크 여성 ‘나디아 무라드’처럼 세상을 바꾸기 위해 가진 힘을 다하는 그녀들. 그런 그녀들도 누군가의 가슴에 꽃으로 피고, 압화로 새겨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본다. 머리에 총알을 맞아가며 까지 외치는 유사프 자이처럼 닫힌 문을 향해 외치는 그녀들의 모습에서 잊혀졌던 여신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인구의 절반인 여성에게 세상의 절반이 주어지는 그런 미래도 함께 본다.

 
 
 
전성옥 집사

 

2012년 <월간문학>에 소설로, 2013년 <에세이문학>에 수필로 등단한 후 <에세이부산 동인>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삶의향기 동서문학상 대상'(2012년), ‘부산수필문예 올해의 작품상’(2023년)을 수상했다. 

 

전성옥 집사 webmaster@amennews.com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교회와신앙> 후원 회원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은행 607301-01-412365 (예금주 교회와신앙)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