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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

기사승인 2024.08.30  09: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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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제자도 (3)

 

황요한 목사(황창연) / 선교사

1995년부터 20여 년간 중국에서 복음 전도자가 들어가기 어려운 서부 변경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하며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집회를 300회 이상 인도하고 사회적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임마누엘 공동체’를 섬겼다.

2020년부터는 타이완으로 사역지를 옮겨 미자립 교회 협력 목회 및 신학교를 대상으로 문서사역을 통해 중국에서 실천했던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선교신학을 전공하고 중국 화동 사범대학과 섬서 사범대학 역사학과에서 각각 ‘중국 기독교의 본토화’와 ‘고대 기독교 경교에 관한 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십자가의 제자도》 이 책은 중국선교의 이론과 실제를 다룬 《광야에 세우는 십자가》의 후속편으로 선교현장에서 사색하고 실천한 ‘십자가 영성으로 사는 제자도’를 정리한 것이다.

30년을 안온한 환경을 떠나 광야생활을 해 온 선교사가 외치는 십자가 영성으로의 회복 메시지를 통해 오늘날 십자가에서 벗어난 교회의 모습에 실망하거나 믿음의 푯대를 잃어버린 고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과 돌이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십자가의 제자도》 표지에서 
 

십자가 영성으로 사는 제자도를 정리한 《십자가의 제자도》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2장 십자가의 도

 

오늘날 교회에서 십자가는 과연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한국처럼 곳곳에서 교회의 십자가 첨탑을 볼 수 있고 기독교 용품에서도 십자가 장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십자가는 그저 기독교의 상징으로 여겨질 뿐, 특별한 존경도 박해도 받지 않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주일학교에서부터 들어온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이야기는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이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반응할 시간적 또는 정신적 여유도 주지 않은 채 그들 뇌리에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로는 십자가의 깊은 의미를 모르면서 마치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에 대해 낯설게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오래된 신자에게 더욱 필요한 작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십자가 이해
 

페르시아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알려진 십자가 형은 그 후 고대 로마에 전해져 극악한 죄수를 처형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고대에는 야만적인 사형 제도가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십자가 형은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잔인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평가됩니다. 사람을 여러 날에 걸쳐 서서히 말려 죽이는, 극도로 고통스러운 사형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십자가 형은 노예나 외국인, 또는 사람 취급을 못 받는 사람들에게만 집행했으며, 로마 시민의 경우는 오직 극단적인 국가반역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만 집행했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미 로마 치하에서 수많은 동족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보았기에 그 끔찍함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추정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읽어 보면 예수님이 수난 예고를 하실 때 처음부터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고, 다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만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막 8:31, 9:31).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십자가 처형 제도를 알기 이전에 이미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신 21:23)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네 번에 걸쳐 수난을 예고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라는 구체적인 언급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 전 세 번째 수난 예고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 20:18-19).
 

이후 사도들이 서신서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언급할 때 ‘나무에 달렸다’라는 표현과 ‘십자가에 달렸다’라는 표현을 함께 사용할 만큼 그들은 십자가와 나무를 크게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또는 나무에 달리신 것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리까지 내려가셨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분은 죄가 없으시며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실 이유가 전혀 없으시기에, 이는 전적으로 죄인인 우리를 대신한 것이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저주를 받는다는 개념은 유대인은 물론 이방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기괴하고 미련한 교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고전 1:23).

   
@Pixabay.com

바울의 ‘십자가의 도’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십자가의 도’로 정의할 만큼 십자가에 관해 독특하고도 탁월한 신학적 의미를 피력하였습니다(고전 1:18). 바울의 ‘십자가의 도’는 그 후에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영감을 주었고, 또 신비한 체험을 하게 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16세기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바울의 ‘십자가의 도’의 중요한 특징을 간략히 다음 세 가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바울의 ‘십자가의 도’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전제로 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0-11).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이러한 선언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삶을 지향하며 사는 선한 사람들조차 완전히 무시하는, 불편하고 거슬리는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역사와 경험은 이 진술이 참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기독교에 반감을 갖는 것은 ‘완전한 의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는 명제 때문이라기보다, 부도덕한 삶을 살면서도 예수를 믿는다고 말만 하면 자기는 의인이 된다고 주장하는 일부 기독교인들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 역시 이러한 비난을 접했고,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항변하였습니다.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3:8).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 생활에서 부도덕하고 사회에 해를 입히는 죄를 저지르고도 죄의식이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해도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하여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 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원치 않는 죄를 지었을 때 슬퍼하며 애통해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선물을 악용하는 사람들을 이유로 성경의 진리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겉으로 나타난 행위보다도 오히려 마음의 자세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은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나 살인죄를 같은 죄로 여기십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는 그리스도인이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율법 중 한 가지만 어겨도 다 어기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둘째, 바울의 ‘십자가의 도’는 자신을 철저한 죄인으로 고백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어진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설파합니다.
 

인간 편에서는 아무리 선한 업적을 쌓아도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가 행하신 십자가의 속죄를 통한 구원이 얼마나 놀랍고 엄청난 선물이며 믿을 수 없는 복음인지는 선하고 의롭게 살고자 몸부림치며 고뇌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죄를 지은 후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뿌리 깊은 죄인인지를 깨닫고 통회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자신이 선을 행하려 혼신의 힘을 다 함에도 여전히 자기 안에 죄를 따르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이 있다며 괴로워하고 애통해합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2-24).
 

셋째, 바울의 ‘십자가의 도’는 인간의 의와 하나님의 의를 선명하게 구별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도덕이나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불순종하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면서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교회 안에 독버섯처럼 퍼지기 쉬운 사상이 율법의 행위로 자기를 의롭다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교만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경건마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랑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를 오래 믿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사람에게서 더욱 나타나기 쉽습니다. 몇 대째 기독교 집안인 것을 말할 때 은근히 드러나기도 하고, 교회에서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중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바리새인처럼 금식기도를 많이 하고 교회 봉사나 헌금을 힘써 많이 한 사람의 마음 밑바닥에 자리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의(自己義)는 예수를 오래 믿어도 참으로 떨쳐 버리기 힘듭니다.
 

이에 반해 성경은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이미 구약에 예언된 것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에 의한 의입니다. 개개인이 율법과 도덕을 지키고 공덕을 쌓아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보편적인 종교와 유대교의 본질인데 이것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혁명적인 발언입니다. 당신은 진실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적지 않은 기독교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룬 구원을 믿음으로 받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십자가의 도가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많은 신자들이 십자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로는 결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기에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벌하는 동시에 인류의 죄를 용서하고, 정죄하는 것과 의롭다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은 제자는 하나님의 의를 구할 것을 요구받습니다(마 6:33). 하나님의 의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이 자신 안에, 믿는 자 안에, 그리고 이 사회와 역사에서 이루어지기를 구하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바울의 십자가 영성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의 도는 교리나 신학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삶에서 실제로 경험하

   

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저는 바울이 정리한 대로, 십자가를 구원의 시작이자 성도가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성화 과정에서 구심점으로 삼는 것을 ‘십자가 영성’이라 칭하고자 합니다. 다음은 바울의 십자가 영성을 형성하는 주요한 토대입니다.
 

첫째,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자기의 전하는 복음과 사역의 중심이자 능력의 원천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둘째, 바울은 그리스도가 못 박히신 십자가를 구원 메시지의 핵심으로 삼는 것을 넘어 믿는 자로 세례를 경험하게 하는 장소이자 매개체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여기서 세례는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여 함께 죽는 것으로 묘사되며, 영적이고 추상적인 명사가 아니라 실제로 삶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동사가 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삶을 가장 잘 요약한 문장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므로 바울이 경험하고 전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믿는 자에게 선사하신 구원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일상을 살면서 날마다 경험하는 구원의 ‘완성’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셋째, 바울의 십자가 영성은 공동체적 영성입니다.
 

현대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은 교회들은 전통적으로 바울 서신의 내용을 신학적 교리로 가르쳤지만, 우리는 바울이 그가 세운 교회의 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서신들을 썼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십자가를 본받는 믿음과 사랑은 개인에게 국한된 가르침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휘되는 것이요, 공동체 안에서의 삶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가정 혹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으로 묘사하며, 십자가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의 모습이 교회 안에서 흘러나와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황요한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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