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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東學)에 참여하다

기사승인 2024.09.04  11: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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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박이 예수꾼 백낙규 장로의 영성과 신앙 (4)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William B. Harrison)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초기 남장로교 조선 선교역사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현재도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William F. Bull)의 선교행적을 정리해 집필하는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있기도 하다.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를 다룬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에 이어 토박이 예수꾼 백낙규 장로의 영성과 신앙을 담은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를 연재한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조형물(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백종근 목사 비버튼 한인장로교회 정년은퇴

   

 

18세 청년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백낙규는 조선 중기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이름을 떨치고 조선 팔문장가八文章家 중 하나로 알려진 옥봉玉峯 백광훈의 12세 손으로 병자수호조약이 있던 1876년 전남 승주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비록 명문가라 하더라도 오랫동안 학자나 벼슬아치를 내지 못하면 가문의 위세가 점차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몇 대째 벼슬살이를 잇지 못한 백낙규의 선대에 이르러서는 양반의 지위마저 흔들리는 한미寒微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더구나 백낙규가 10살 정도 되었을 때 아버지와 형마저 역병으로 죽자, 홀로되신 어머니를 도와 동생들까지 맡아 가정을 꾸려나가야 할 정도로 궁벽해지고 말았지만, 그는 효성이 극진한 어린 가장으로 주변 마을까지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1888년 무자년戊子年의 기근은 호서와 호남지방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 피해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굶어 죽는 사람이 한 집 건너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역병疫病까지 돌아 피폐해진 고향에서 백낙규는 모친이 어렵게 마련해준 돈으로 행상을 시작했는데, 타고난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들르는 장터마다 신용을 쌓아가며 장사를 잘 했다고 한다.
 

장터를 돌며 백낙규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봉준이 동학도들과 함께 전주성을 함락시켰다는 이야기, 청나라와 일본이 군대를 보내 서로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 머지않아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등 불안하고 안타까운 이야기 일색이었다. 여러 정세 가운데서도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인 것은 동학이었다.
 

전라감사가 동학 농민군과 화약和約을 맺어 사태가 수습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농민항쟁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백낙규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로 부풀게 했고, 동학에 대해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사인여천事人如天. 그렇다! 백성을 하늘처럼 여기는 세상으로 바뀐다면 그 자체가 개벽開闢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동학의 가르침이야말로 이 나라의 모든 백성이 실천하고 살아야 할 새로운 강령綱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학에 입도하다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탄압을 받고 쫓길 때, 그를 미륵산 사자암에 피신시켜 보살폈다는 박치경은 익산에 해월이 머무는 동안 그를 도와 호남지방 포덕에 힘을 쏟아 교세를 크게 성장시켰다고 했다. 그가 손에 땀을 쥐며 해월을 피신시킨 아슬아슬했던 이야기라든가 무장기포가 있던 1차 봉기 당시 그가 고산에서 기병했다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마치 신화 속의 영웅 이야기처럼 오랫동안 이 지역에 떠돌았다. 고산 근처로 시집온 누이 집을 오가던 백낙규가 고산의 대접주 박치경의 무장기포의 무용담을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은 것은 바로 이때였다. 사람들은 신출귀몰했던 그를 도인道人이라 불렀다. 우연한 기회에 도인 박치경을 만나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그의 포덕에 매료되면서 백낙규가 동학에 입도入道하던 무렵, 그의 나이는 겨우 19세였다.
 

삼례기포에 뛰어들다
 

일본의 내정간섭으로 세워진 친일 내각에서는 관군과 연합한 일본군을 전주에 내려보내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고 전주화약을 무산시키고자 했다. 그러자 대원군은 고종을 대신해서 밀지密旨를 내려 보은의 최시형, 전주의 전봉준, 남원의 김개남에게 협조를 구하고, 일본군에 대항할 것을 요청했다.
 

사태의 심각함을 파악한 동학 지도부에서는 각 포의 접주들에게 격문을 보내 전국의 모든 조직이 기포하여 일본을 축출하기 위해 전봉준을 도와 항쟁에 참여할 것을 지침으로 내렸다. 잇달아 전봉준은 한양과 삼남을 연결하는 요충지인 삼례 역참에 대도소大都所를 설치하고, 전국의 동학도들에게 통문을 돌려 의병을 모았다. 삼례는 고려 시대부터 역참이 있어 큰 시장이 서는 곳으로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장소로는 제격이었다.
 

1894년 10월 8일 삼남지방에서 몰려든 4천 명의 농민군들은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기치를 내걸고 일본군과 결사 항전을 외치며 삼례에서 기포했다. 의협심이 남달리 강하고 강골이었던 백낙규는 솟구치는 의분을 누르지 못하고 삼례기포에 뛰어들었다.
 

우금치 전투
 

동학 농민군은 의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삼남지방 각처에서 삼례에 모여든 동학 농민군은 노도怒濤처럼 북상했다. 논산을 거쳐 합류한 농민군이 족히 1만은 되었다. 공주 우금치에 이르러 일본군과 맞닥뜨렸으나 6~7일간에 걸쳐 40~50회 격전을 치르는 동안 낫과 죽창을 들고 싸우는 농민군은 근대식 무기와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일본군 앞에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우금치 전투는 전투라 하기보다 차라리 처참한 살육의 현장이었다. 수많은 농민군은 선혈을 흩날리며 비명에 힘없이 쓰러졌다. 겨우 수백 명 정도만 겨우 살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훗날 부안의 시인 강민숙은 이렇게 노래했다.

 

『우금치 전투를 기리며』

강 민숙

 

저 고개만 넘으면 한양 땅에

이른다 했나

혁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동학의 농민들

 

머리띠 두르고 일어섰다는

우금치 고개에 서면

한울님을 모시고 조화세계를

영원히 잊지 않는다면

천하만사를 꿰뚫고 만다는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를 외치며

들불처럼 일어나던

갑오년의 민초들의 나라가 보이네

 

제 나라, 제 백성도 모르고

총구 겨누던 관군들 향해

불나방으로 뛰어들던

그 날의 뜨거웠던 의기가 보이네

 

조선 땅에 태어난 그 울분 참지 못해

죽음으로 다시 태어나

살고자 했던 동학도들이여

이 땅에 봄풀 돋아나

그대를 목마름으로 부르는데

들리는가.

 

그대들은 적이 아니라

역사를 앞서간 혁명의 아들이라고

우리 이렇게

통곡하며 부르노라

다시 일어나 돌아오라고.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조형물(사진 출처=전북일보)


농민군의 패배가 확실시되자 밀지密旨까지 내려 일본군에 대항을 요청했던 조정에서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흩어진 농민군들을 동비東匪로 몰아 체포령을 내렸다. 삼례기포에 뛰어들었다가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농민들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불안과 두려움으로 치를 떨며 숨을 죽였다. 개벽을 꿈꾸던 한 젊은이에게는 좌절 그 자체였다. 쫓기는 신세가 된 백낙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술로 시름을 달래며 여기저기 떠돌다가 전주에서 가까운 누이 집 근처에 몸을 숨기고 사태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백낙규가 약관의 나이로 동학 2차 봉기에 소접주가 되어 우금치 전투에 참여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들추어지지 않은 빛바랜 전설이 되어 여전히 우리 가족사로 남아있다. 농민항쟁은 구제창생救濟蒼生에 대한 요구요 외세침탈에 반대하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근대 시민혁명으로 이해되어야 함에도 역사의 그늘에 방치된 채 백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다 보니, 항쟁의 흔적들은 사라지고 그나마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지던 기억들마저 희미해지면서, 그 의미가 점점 훼손되고 잊혀 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동학의 1차 봉기가 제폭구민除暴救民의 명분 아래 탐관오리의 수탈과 학정에 맞서 일어났다면, 2차 봉기는 강압적으로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에 대항해서 척왜斥倭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건 의병의 성격이 짙었다.
 

결국, 일본군의 개입으로 농민군이 진압되자 동학농민항쟁은 개혁을 주체적으로 이루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미완의 혁명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때부터 일본은 친일개화파를 전면에 내세워 적극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는데 이 사건을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 부른다.
 

비록 갑오경장이 외세에 의한 개혁이었을지라도 그 시작은 동학농민항쟁에서 요구되었던 개혁의 내용에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을뿐더러 그들이 내세웠던 위정척사爲政斥邪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旗幟는 근대 한국민족주의 운동에 있어서 큰 획을 그어준 이념적 기초가 되었다. 역사가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 제일의 사건으로 보았다지만, 조선 역사의 가장 큰 변화를 만들어낸 역사적 사건을 든다면, 오히려 반봉건의 기치를 들고 개벽을 외친 갑오 농민항쟁이 아닐까 생각한다.
 

18세에 동학에 입도入道해 19세에 소접주가 되어 해주성을 공략했던 백범 김구는 후일 <백범일지>에서 '봉건적 신분제도를 부정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학의 가르침이 더 할 수 없이 고마웠다'라면서 동학의 평등주의야말로 자신이 추구하고자 했던 평생의 이상이었다고 회고했다.
 

동학농민항쟁 이후 급격한 대내외적인 정세변화와 갑오경장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로 말미암아 조선은 일본에 실권을 빼앗기는 안타까운 형국을 맞았지만, 한편으로는 신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문호개방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자각을 백성들에게 심어주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이어진 문호개방을 통해 복음을 수용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졌다고 하는 점에서 본다면, 혼돈의 역사까지도 복음전파의 기회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만나게 된다. 

 

백종근 목사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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