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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름

기사승인 2024.09.13  08:4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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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제자도 (5)

황요한 목사(황창연) / 선교사

1995년부터 20여 년간 중국에서 복음 전도자가 들어가기 어려운 서부 변경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하며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집회를 300회 이상 인도하고 사회적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임마누엘 공동체’를 섬겼다.

2020년부터는 타이완으로 사역지를 옮겨 미자립 교회 협력 목회 및 신학교를 대상으로 문서사역을 통해 중국에서 실천했던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선교신학을 전공하고 중국 화동 사범대학과 섬서 사범대학 역사학과에서 각각 ‘중국 기독교의 본토화’와 ‘고대 기독교 경교에 관한 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십자가의 제자도》 이 책은 중국선교의 이론과 실제를 다룬 《광야에 세우는 십자가》의 후속편으로 선교현장에서 사색하고 실천한 ‘십자가 영성으로 사는 제자도’를 정리한 것이다.

30년을 안온한 환경을 떠나 광야생활을 해 온 선교사가 외치는 십자가 영성으로의 회복 메시지를 통해 오늘날 십자가에서 벗어난 교회의 모습에 실망하거나 믿음의 푯대를 잃어버린 고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과 돌이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십자가의 제자도》 표지에서 
 

십자가 영성으로 사는 제자도를 정리한 《십자가의 제자도》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십자가 영성으로 사는 제자의 삶의 양식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제자도에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요구는 설교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되고 전해졌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용 구절은 마태복음 16장 24절인데,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십자가를 지는 것은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 부인은 청교도 및 경건주의 전통에서 강조되어 온 의무입니다. 그런데 최근 기독교에서 자기 부인은 자기실현, 자존감, 치료의 개념으로 대체되고 있는 듯합니다. 자아실현을 개인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는 현대인에게 자기 부인은 더더욱 관심 없는 주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서점의 베스트 셀러는 하나같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에 관한 책들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교회로 끌어모으고 또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주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명령을 축소하거나 듣기 좋게 바꿀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자기 부인은 소극적으로는 자기의 소욕을 버리는 것이지만, 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로 자기를 채우는 것입니다. 자기를 잊어버리고 무한한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랑에 자신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원래의 형상이 우리 안에서 회복되고 우리의 소욕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 자기를 드린 자는 자기를 내려놓았다고 억울해하거나 다른 사람보다 경건한 삶을 산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흔히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고난을 자기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사명을 자기 십자가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런 적용이 듣는 이에게 위로와 도전을 줄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런 설명은 십자가를 정확하게 해석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일체의 선입견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이를 어떻게 이해했을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는 주님이 처음으로 자신이 장차 받으실 고난과 부활을 언급하신 직후입니다. 적어도 이 성경 본문에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라는 언급은 없습니다. 설사 십자가 형을 받으실 것을 언급하셨다 해도 제자들은 그것을 믿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아직 주님의 십자가 사역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보다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다른 사형수들을 떠올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십자가는 조롱과 배척,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이었으므로, 이 말은 예수님을 따르려면 이런 대우를 받는 삶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는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 때문에 가까운 사람이나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수난을 당할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은 빛이신 예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요구는 우리 인생에서 당하는 이런저런 문제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인생에는 환난과 어려운 일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삶은 아닙니다. 십자가는 전적으로 주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자 져야 할 자기의 십자가가 있으며, 이 십자가의 짐은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십자가의 크기와 무게는 각기 다를 것입니다. 때로는 형제의 짐을 대신 지는 것이기도 하고, 때로는 경제적인 손해를 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어떤 이에게는 이보다 더 큰 고난을 주시고 순교의 은혜도 허락하십니다. 이 모두가 다 주님을 따르느라 지는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복된 소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라는 무거운 십자가를 홀로 지신 반면,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는 성령께서 도와주셔서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길과 같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자기를 비우고(자기 부인) 비천한 종의 형체로 오셔서 자발적으로 권리를 포기하고, 심지어 죄인 취급을 받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음에까지 처하셨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이처럼 연약하고 어리석고 비정상적인 선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룬 지극히 영광스러운 삶이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살면서 이러한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렇다고 교만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럼에도 이는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로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은 우리보다 먼저 가서 하나님의 지극히 높은 자리에서 우리를 위한 거처를 하늘에 예비하고 계신 구세주이십니다!
 

타인을 위해 십자가를 지라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자신의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대속의 십자가요 타인을 위한 십자가였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따라가는 제자는 주님처럼 타인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삶을 택하는 사람입니다. 이 십자가는 주님의 십자가를 닮았기에 더욱 귀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짐꾼입니다. 타인의 짐을 대신 져 주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가정과 교회, 직장과 사회에서 주님의 제자도를 실천하며 살려고 하다 보면 어려운 일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 노인 문제가 어느 사회에서나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자녀가 있다 해도 그들이 다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아니기에 많은 노인이 요양원에 갇혀 긴 시간을 연명하고 있습니다.
 

의학의 발달로 100세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가난하고 병약한 상태로 오래 사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식에게 폐 끼치기 싫은 노인의 자살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성경적인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의존하는 존재로 살도록 요구받기 때문입니다.
 

가끔 불신자 가정에서 유일하게 예수를 믿는 1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지 않는 다른 형제들이 기피하는 연로한 부모의 간병과 장례에 이르기까지의 수고를 눈물로 기도하며 감당하는 것을 볼 때면 큰 감동과 함께 주님의 향기를 느끼게 됩니다. 교회 내의 어려움 당한 교우, 병상에 있는 환우, 노숙자나 가난한 독거노인을 자기 가족같이 돌보고, 때로는 친가족보다 더 자주 찾아가 위로하며 필요를 살피고 궂은 일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주님처럼 타인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주의 제자들입니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하며 얼마나 기뻐하실지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타인을 위해 지는 십자가는 한마디로 사랑 때문에 지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 눈에는 무거운 십자가만 보이지만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상대방을 향한 사랑만 생각합니다. 만일 사랑이 동기가 아니라면 매 순간 십자가가 얼마나 무거운지 의식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면 우리 역시 복음을 모르는 영혼들, 주님을 믿되 방황하는 영혼들을 향해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차오릅니다.
 

저 역시 그와 같은 마음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중국 영혼들을 위한 아버지의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나야 할 영혼들이 복음 전도자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지역에 얼마나 많은지 듣게 하셨을 때,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에 사로잡혀 고산 지역과 사막, 전염병과 고산병, 공안의 위협과 육체적 아픔 등에 굴하지 않고 지구를 십수 바퀴는 돌았을 만큼 곳곳을 거침없이 다녔습니다. 이것은 결코 제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저를 강권하셨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황요한 목사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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