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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자에게 끝은 있는가?

기사승인 2019.01.16  14: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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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권 목사 / Joyful Korean Community Church(Texas, Dallas) 담임

   

▲ 김세권 목사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마 6:34)

서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30여년 사역한 조아무개 목사님 이야기가 신문에 실렸다. 그 세월 동안 나라에 내전이 있었는데, 14년 동안이나 이어졌단다. 에볼라 바이러스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일도 있었단다. 놀라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길 떠날 생각을 해보지 않았단 사실이다.

이유는 뭘까? 그의 답은 이렇다. “하나님이 가라고 했지만 떠나라는 메시지를 주신 적이 없으니까.” 시대의 ‘띵언’(명언)이다. 라이베리아 주민 80%는 전기와 깨끗한 물 없이 살아간다. 대부분은 하루 한 끼밖에 먹지 못하고, 영유아 사망율도 높다. 부인 역시 대단하다. 간호장교 출신인 그녀는 남편을 도와 지금껏 같이 사역했다.

이들 부부는 먼로비아 근처에 주민을 위한 그레이스 학교를 세웠다. 적금과 환갑 기념으로 들어온 축의금으로 땅을 사고, 밀알재단이 건립을 지원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자못 맘에 와서 닿는다. “소외된 자, 병자, 희망 없는 사람들을 도우라는 게 예수님의 참 뜻 아니겠는가. 이곳에는 내전과 질병으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많다. 바로 그곳에 저의 빈 무덤이 있다. 내가 죽어도 그 땅의 사역은 지속되리라고 생각한다.” 대단하다. 특히 자기가 죽어도 사역이 지속되리란 말이 입에 맴돈다.

   
 

“끝이 없다…”
글을 읽으면서 미국뿐만 아니라. 땅의 많은 사역자를 생각한다. 늘 사역의 끝을 생각하면서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간간히 이어지는 목회 길을 묵묵히 걷는 이름 없는 목사들이 많다. 하긴 묵묵하지 않을 방법이 없으니, 입을 못 연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은 교회 장로들과 말도 안 되는 싸움질하느라 지쳐가면서도 내색하지 않는 것이 목회의 길이라고 믿으며 오늘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강단에 서는 사람들이 있다.

목숨을 바쳐 주님이 맡기신 일을 감당하려 해도,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퍽퍽한 목회 길에서, 그래도 기도해야 한다며 용을 쓰는 사람이 많다. 신문 인터뷰는커녕, 신문 기자를 일생 구경도 못한다. 도와주는 사람이나 기관이 있기는 하다는데, 무슨 도깨비불인지 실체가 없는 게 현실임을 인식하는 작은 개척교회 목사도 많이 봤다.

젊은 목사들 가운데는,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결국 직업 전선에 뛰어든 사람도 많다. 그걸 시대가 달라지면서 찾아오는 흐름이라 한다면, 설득하느라 논쟁하고프지 않다. 입만 아플 뿐이다. 말이 안통하면, 차라리 입을 닫는 게 낫다. 하나님이 자길 부르신 게 이것 때문은 아닐텐데, 내 삶이 이게 뭔지 모르겠다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정말 많이 있다. 깰 적금이라도 있거나, 환갑이랍시고 축의금이 들어오는 상황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런 게 있다면, 감지덕지한 것이 아닐까. 그런 일은 아예 생각지도 못하는 목사들이 주변에 수두룩하다.

궁자 낀 소릴 하는 게 아니다. 세상에 제일보기 싫은 게, 궁자 낀 얼굴로 구걸하는 사역자의 모습이다. 돈 한 푼 더 사역자들에게 보태달라고 이런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이 굶기시면, 굶으면 되는 사람이다. ‘밥’이 아니라,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거다.

작은 교회 목사들에게만 이런 고통이 있단 건 아니다. 적어도 머리에 손이 놓이고 안수를 받아 목사로 살게 된 사람이 조금이라도 진지하면, 그는 일생을 고통 속에서 산다. 커다란 교회를 목회하면서, 포퓰리스트가 되기 싫어서, 하나님께 매일 부르짖는 훌륭한 목사들도 시대에 살아있다. 결국 본질을 함께 보잔 이야기가 글의 핵심이다.

매순간 내뱉는 가쁜 호흡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삶의 매초를 불태우는 사람들이 있단 걸 알 필요가 있다. 피리를 불어도 애곡하지 않는 세태를 한탄하면서도, 성경을 놓지 못하고, 기도의 손을 풀지 못하는 진지한 사역자들이 있다는 걸 봐야 한다. 기독교는 이런 아픔이 모여서 쌓이고, 고통이 핏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곳에서 큰다. 하나님은 쉽사리 땅끝까지 이르는 복음의 은혜를 풀어놓지 않으신다. 일생을 아골 골짜기에서 눈물 흘리는 이들의 헌신이 밑거름이 될 때에, 비로소 복음의 문이 조금 열린다.

끝은 있는가? 미국 와서 후배 사역자가 목사 안수 받을 때에, 그걸 지켜보느라 아칸소에 간 적이 있다. 안수식에서 설교를 맡은 흑인 목사님이, 소울이 가득한 노래 솜씨를 뽐내며 설교를 한 시간이나 했다. 알아들은 건 딱 한 마디였다. “목회는 경주다. 그런데 결승선은 마음대로 정하지 못한다. 그건 하나님 몫이다. 하나님이 끝이라고 하시기 전에는 끝이 없다.” 그게 참 괜찮게 들렸다. 정말 끝은 없는가?

사역자에게 끝은 반드시 있다. 없는 게 아니다. 단지 사람이 멈추고 싶지 않아서 계속 가는 경우는 있다. “끝이 없다”는 건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사람에겐 끝이 있다. 그가 감당하는 사역도 끝이 있다. 다만, 하나님 일에 끝이 없을 뿐이다. 사람은 때가 되면 멈춰 설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일을 멈추시는 경우는 없다.

“끝은 없다”는 건, 사람이 해서는 안되는 말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무언가? 아주 심플하게 말하면,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자"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하는 일이 어떻든지, 한국이나 미국 또는 세계 어디서든 이름 없는 뒷골목에서 끙끙 앓으며 하는 사역이 어떤 모양이든지, 내일 일은 내일에게 맡기는 것이 목회자가 할 일이다.

내일 멈춰서야 하면, 서면된다. 더 갈 수 있으면, 하루 더 가면 된다.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때 그걸 감당하는 걸로 족하다. 내가 하다가 멈추면, 하나님이 그걸 계속 할 사람을 연결하실 것이다. 끝이 있니 없니 할 건 아니다. 오늘 주께서 하라고 하신 일, 그거 하나만 감당해도 은혜다.

라이베리아 사역은 감동스럽다. 그렇긴 하지만, 이름 없이, 도움 없이, 뒷골목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사역이 있기에 그런 일들도 가능하단 걸 말하고 싶다. 그런 사역자들이 건강하게 일할 뿐 아니라, 그들이 사역에 배고파하는 마음이 제대로 채워져야, 기독교는 산다. 지금처럼 즉물적인 결과, 눈에 보이는 것, 사람 머릿수, 건물과 주차장, 재물에 목을 매면, 교회는 스스로를 매몰하는 것이다. 나쁜 가짜 사역자들 말고, 진실로 일하려는 이들이 질식하면, 과연 교회에 뭐가, 또 어떤 목사가 남을까?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자. 어쩌면 글에 담긴 염려조차도 사치스럽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을 따라 우리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걸로 됐다. 오늘 할 일을 다 하고, 결과는 생각지 않는 걸로 마무리 하자. 단지 누구에게나 끝은 있단 걸, 한 번만 더 기억하자.

김세권 목사 mungm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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