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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염소

기사승인 2019.07.24  13: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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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권 목사 / Joyful Korean Community Church(Texas, Dallas) 담임

   

▲ 김세권 목사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25:31-33)

  길라잡이

1. 양과 염소: 양은 착하고, 염소는 못 되어 먹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동물의 특징을 가지고 선하니 그렇지 않니 말할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양도 못되어 먹었긴 매한가지다. 여름엔 붙어 자고, 겨울엔 떨어져 잔다. 물을 먹으면 온통 난리를 쳐서 오염시켜놓고, 풀을 먹을 때 목자가 관리하지 않으면 한군데를 들고파서 아작을 내놓는다. 그러니 양은 선하고 염소는 못됐다고 할 건 아니다. 그냥 여기선 표현이 그렇다고 생각하면 된다.

   
▲ 양과 염소 

2. 오른편(덱씨오스/δεξιός)과 왼편(에우오누모스/εὐώνυμος): 의미는 단순하다. 지금은 다 한 편인 것 같지만, 언젠가 두 편으로 갈라지는 날이 올 것이라는 메시지다. 히브리 사람에게는 오른편을 선한 쪽으로, 왼편을 좀 덜 선한 편으로 생각하는 문화가 있었다. 베냐민이라는 야곱의 막내 아들 이름도, ‘오른편 아들’이라는 뜻이다.

묵상

벌써 아홉 해 전 일인가? 2010년에 한국 모 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당선작으로 나온 소설이 기억난다. 그게 지금은 중진이 되어 나름 감수성 있는 글을 내놓는 박지영이 쓴, ‘청소기로 지구를 구하는 법’이었다. 내용을 짧게 이야기하면 지구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단다. 하나는 청소기로 쓸어버려야 하는 사람, 또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윽! 살벌하다. 좀 읽기엔 뭐하지만, 현실을 돌아보면 딱히 그걸 부정하기도 힘들다. 이걸 인권 차별에 관한 이야기로 받아들이면 오해다. 사람 살이의 기준이 다른 인생들이 이 땅에 살고 있단 이야기 정도로 들으면 된다.

독일어 사전을 보면, 나치 항목이 있다. 거긴 당시에만 사용되었던 단어들이 들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생존의 가치가 없는’(위버레벤스운뷔르디히/Überlebensunwürdig)이란 뜻을 가진 단어다. 이건 나치가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느냐, 아니면 노동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느냐를 판정할 때에 사용하던 단어라고 한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사람이 둘로 나뉜다는 건 끔찍하다. 나치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나눈 건 당연히 옳지 않다. 도대체 생존의 가치가 없다는 판정을 사람에게 내린단 게 가당키나 한가? 사람은 사람을 판단하지 못한다. 해서도 안 된다. 그리하는 건 죄악이다.

사람이 그리 하는 것 말고, 신이 인간을 나눈다면 어떤가? 이것도 잘못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의 행위는 위악적(僞惡的)이지만, 하나님은 올바른 기준으로 판단하신다. 하나님 생각과 사람의 그것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사람은 잘못 판단해도, 그분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 기준은 틀림없고 정확하다. 누가 뭐라 하든 하나님은 사람을 제대로 판별하신다. 이렇게 하는 걸 다른 말로는 심판이라고 한다. 역사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심판의 시간은 반드시 있다. 이 시간은 인간 역사에서 판을 치는 불공정과 악함이 시정되는 때다.

하나님이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신다고 본문은 이야기한다. 나뉘어짐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에게 닥칠 미래다. 사는 게 너무 바빠서, 마지막 때에 나뉘어짐이 있을 것이란 사실을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다. 마음에 들든 아니든, 이게 미구에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다가올 일인데, 우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산다. 마태는 이런 사실을 본문에서 분명히 짚는다. 박지영이 그런 생각을 하기 아주 오래 전에, 이미 마태는 같은 생각을 품었다. 미래의 심판이 팩트(fact)임을 분명히 했다. 그때가 되면, 함께 살던 사람이 하나는 양으로, 다른 하나는 염소로 판정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판정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본문 46절을 보니, 양은 영생에, 염소는 영벌에 들어갈 것이란다.

우리의 호불호(好不好)와 상관없이, 종말에는 확실한 헤어짐이 있다. 갈림길의 기준은 하나다. 예수님을 알고 믿으며 가르침에 순종한 사람은 양이라 불리겠지만, 불순종한 사람들은 마침내 ‘메에헤’(영어로 baa)하는 소리를 내게 생겼다. 이런 판정에 의문을 품거나 따지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 어떤 개그맨이 탕수육 먹을 때, 부먹 찍먹 따질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하나 더 먹으라고 그러더라. 시간이 아깝다. 흙으로 만들어진 도자기가 도공에게 무슨 말을 하랴. 그러느니 차라리 무조건 양이 되는 삶을 살기를 권한다. 또한 내가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하고 아낀다면, 이런 헤어짐이 뻔~ 한데도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그들도 나와 같은 편에 서도록 만들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으라고 가까운 사람에게 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끝은 있다. 나는 평소에 조금이라도 그런 사실을 생각하는가? 종말을 품는 ‘위기의 신앙’을 가지는 게 필요하다. 그러려면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

김세권 목사 mungmok@gmail.com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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