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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적 구원관 확립!

기사승인 2020.05.11  1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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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훈 교수의 에베소서 해설(3)

김정훈 교수 / 김정훈 교수는 영국 더람(Durham) 에서 제임스 던(James Dunn)의 지도로 석사를, 영국 글라스고(Glasgow)에서 존 바클레이(John Barclay)의 지도로 박사를 취득하였고, 백석대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후학들을 양성하다 올해 2월 정년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The Significance of Clothing Imagery in the Pauline Corpus’ (T&T Clark), ‘바울 서신 연구’ ‘사도들의 설교와 신학’ ‘약속, 성취, 그리고 하나님 나라’ ‘작은 구름 한 조각’ 등이 있다. 현재는 B and C Mission Center 대표로 있다.
 

   
▲ 김정훈 교수

3. 찬송이 터져 나오다(2):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과 만물 통일(엡1:7-10)
바울은 자신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의 두 번째 항목을 언급한다. 그는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은 사실을 생각할 때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7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단지 갈기 끝에 날카로운 납조각(또는 뼛조각)을 달아 만든 로마의 채찍(플라겔리움, flagellium)에 맞아 살이 터져 흘러나오는 피가 아니라, 인간의 죄를 속량하시고 죄 사함을 베푸시는 피였다. 대각성 운동 시기에 존경받는 어떤 설교가는 “내가 길거리를 지날 때 사람들은 왜 나를 향해 돌을 던지지 않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겉으로는 아무리 거룩한 것같이 보여도 인간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지독한 부패성을 지닌 죄인일 뿐이다.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은 평생토록 교회 다녔기 때문이 아니다. 5대째 예수 믿는 집안이기 때문이 아니다. 안수 받고 목사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죽을 고생을 하며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거액의 기부금 출연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 아니다. 수십 곳에 개척교회를 세운 공로 때문이 아니다. 수만 명 모이는 대형 교회를 일군 목회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단기간에 큰 사업을 일으킨 입지전적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탁월한 설교가여서가 아니다. 21세기 종교개혁자라는 칭송을 받는 자여서가 아니다. 영향력 있는 책들을 쓴 저명 작가여서가 아니다. 불쌍한 노숙자들에게 무수한 날들 밥을 퍼 주고 독거노인들에게 연탄을 날라 준 특급 봉사자여서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자여서가 아니다. 남다른 구제 활동으로 진열장에 가득한 감사패의 주인공이어서가 아니다. 40일 금식기도를 세 차례씩이나 한 기도의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받고 죄 사유(赦宥)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이다. 폐부 깊숙이 침착된 죄의 참상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회개할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를 말갛게 씻기시고 새 영(靈)을 부어주신 것이다. 이 결정적 과정이 없이는 갈기갈기 금이 가서 흉측하게 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 받을 수 없다.

   
 

많은 사람이 따지고 싶을 것이다. “아니 내가 왜 죄인이란 말인가?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단 말인가?” 바울 사도는 지적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 감사하지 않는 것, 허망한 생각에 사로잡혀 사는 것, 마음이 미련하게 되어 어두움의 지배를 받는 것, 스스로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하며 오만을 떠는 것, 결과적으로 어리석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여기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죄라고 선언한다(롬1:21-23). 타락한 영혼에 군살이 배기고 죄가 자리를 잡게 되면 건전한 종교성과 도덕성은 뒤틀리고 왜곡되어 희미한 양심의 울림마저 정지된 채 인간은 하나님과 타인에 대해 부패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창조주 하나님을 팽개쳐 버리고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섬긴다(롬1:25). 또 성적 타락 같은 것은 개념마저 지워버리고 동성애도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마땅한 사랑의 한 양태이고 성경도 지지해 주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런 모든 행위가 죄라는 지적에 대해 그것은 기독교인들의 상투적 주장일 뿐, 자신은 결코 그렇게 비난받을 만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러한가? 바울은 1세기 팔레스타인 땅에 살며 자기들은 결코 죄인이 아니라고 확신에 차서 어깨를 치켜들고 활보했던 유대인들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그럼 왜 도둑질하지 말라고 선포하면서 남들의 눈을 피해 도둑질하느냐? 왜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한 것으로 여기면서 왜 신전 물건을 도둑질 하느냐?”고 반문한다(롬 2:21-22). 그러면서 그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할 것 없이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한다. 그는 부패한 인간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끊임없이 남을 속이고,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다고 지적한다(롬3:13-15).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인간의 죄악 됨을 지적하는데도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할 것인가? 성경의 거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고 항복하자. 죄인인 것을 깨끗이 인정하자. 살 길은 여기서부터다. 자기 합리화만 하려하고, 자기 정당화만 하려 한다면 칠흑 같은 어둠의 벽은 자기를 더 꽁꽁 가두어 놓을 것이다.

죄는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해결될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만 만족될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가 지불해야 할 죄의 값을 대신 지불하게 하셨다. 인간은 그 누구도 스스로 자기 죄를 속량할 수 없다. 즉 자기 스스로 자신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죄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이기 때문이다. 죄는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것이다. 죄란 아차 실수해서 잠시 주저앉았다가 일어서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주먹질을 해대는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자들에게 죄 사함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 그리스도의 피밖에는 죄값을 치를 길이 없다. 노예가 자유인이 되려면 누군가가 속전을 내고 자기를 사서 풀어줘야 하듯,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서 죄의 결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다.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도 없느니라”(히9:22, 사역. 참조. 출24:8). 역사 속의 한 지점에 객관적으로 서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바울은 우리가 십자가의 피의 구속(救贖)을 믿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통해 지금 이 땅에서부터 구원을 실현하며 살 것을 호소한다(롬8:1-17).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죽음이 어떻게 인류 구원을 위한 죽음이 될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 한 분의 죽음이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우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계획하셨고(참조. 창3:15), 그의 속죄의 피를 믿는 자에게 속죄의 은혜를 베푸시고 의롭다함과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대로 한 사람 아담의 범죄가 인류 모두에게 죄를 몰고 온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의 한 행동이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의를 주어 생명과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롬 5:12-21). 이것은 대표성과 연대성의 원리로 답하는 것인데, 아담이 타락한 모든 인류를 대표하고 또한 모든 인류가 아담과 연대되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모든 믿는 자들을 대표하고 또한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와 연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죄(罪)나 의(義)가 DNA처럼 유전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죄나 의는 생물학적 유전보다 훨씬 더 강력하여 해당 그룹 전체를 통째로 보쌈해 버린다. 아담의 죄는 그의 모든 후예들을 사로잡아 사망으로 이끌어 가고, 제2의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의는 그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사로잡아 영생으로 이끌어간다.

사람들은 보통 가난, 질병, 기아, 갈등, 전쟁, 불화, 신분 등이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는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죄’다. 죄는 인간을 부패하게 만들고, 부패한 인간은 끝없이 참혹한 현실을 만들어낸다. 죄는 인간을 흑암으로 끌고 가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참담하게 만드는 것은 죄와 사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믿는 우리에게는 십자가 희생을 통해 우리를 모든 죄에서 속량해 주신 그리스도가 계시니 그를 보내신 하나님께 경배와 찬송을 올려드릴 뿐이다.

이제 8-10절로 가 보자. 이 본문은 독자에게 문맥에 관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왜 바울은 7절에서 그 중요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속죄에 관한 이야기를 해 놓고 갑자기 다른 이야기 곧 “하나님의 뜻의 비밀”에 대한 생소한 이야기로 전환하는 것인가? 두 이야기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부조화는 우리를 보다 더 큰 질문 속으로 끌어들인다. 사실 양자(兩者)는 부조화가 아니라 완전한 조화다. 창세 때 아담이 타락의 길을 걸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라. 그의 타락은 결국 창조세계에 치명적 손상을 입히지 않았던가. 지금 만물은 비정상 상태 곧 썩어짐의 노예 상태에서 허무한 데 굴복하며 고통 가운데 탄식하고 있지 않은가(롬 8:20-22). 바울이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을 간결하게 언급한 후에 ‘하나님의 뜻의 비밀’ 이야기로 넘어간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우주적 의미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때문이다. 즉, 그는 제2의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온 우주의 회복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 맹목적적 묵시문학적 환상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해 둘 필요가 있다.

우주 만물의 비극적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과 함께 회복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만물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비밀스런 의도를 갖고 계셨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더이상 비밀이 아니다. ‘비밀’은 신약에서 ‘계시’ ‘공지’ 개념과 맞물려 나타나는 특별한 단어다. 하나님의 만물 회복의 비밀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밝혀지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총명으로 그 사실 곧 우주적 비밀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뜻의 비밀이란 다름 아닌 아나케팔라이오사스다이(avnakefalaiw,sasqai) 곧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 만물을 통일시키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훼손된 피조세계를 하나로 재통합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 일은 이미 성취되었고, 우리가 알게 되었고, 첫 숟가락을 뜨는 것처럼 이 땅에서부터 누릴 수 있게 되었다(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에서). 하나님은 처음 창조 때의 상태를 능가하는 최상의 질서, 조화, 아름다움, 생명의 충만 상태로 회복시키기 원하시며 십자가를 통해 이 대사역을 이미 시작하신 것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겨 주셨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회개하며 그에게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의인이라고 불러주신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를 해결 받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죄 사유의 은총은 나 한 개인에게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우주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사건이다. 십자가 구속과 죄 사유의 은총은 피조세계 전체의 궁극적 회복을 조망한다. 믿는 자가 ‘나의 구원’ ‘구원의 확신’ ‘내 집’ ‘내 가족’ ‘내 교회’를 마음에 품고 그 의식 속에 살아가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관이 너무 협소하고, 때로는 너무 이기적이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의 사정이 어떠하고, 다른 민족의 삶이 어떠하고, 한국 교계가 어떠하고, 이단의 위험성이 어떠하고, 권력 구조가 어떠하고, 국가의 도덕성이 어떠하고, 사회 시스템이 어떠하고, 생태계가 어떠하고, 다음 세대에게 닥쳐올 미래가 어떠하고 등에 대해서는 너무도 무관심하지 않은가? 우리의 구원관은 달라져야 한다. 눈을 떠서 주변을 바라보고, 세계를 바라보고, 피조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피조세계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머리가 열려서 새로운 차원에서 구원을 생각해야 한다.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구원관을 지양하고 우주적 구원관을 확립해야 할 때다.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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