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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의 큰 흐름 중 하나 ‘선교’(4)

기사승인 2020.07.02  10: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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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동섭 교수의 선교로 읽는 성경(10)

방동섭 교수 /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목회학 석사, 미국 칼빈신학교 신학석사 과정, 미국 리폼드신학교 박사, 전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글로벌비전교회 담임, 저서로는 <십자군이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선교없이 교회없다> <우리의 선교가 실존입니다>

   
▲ 방동섭 교수

의에 주리고 목마름: 하나님의 의를 경험하였기에 이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이 세상의 물질, 명예, 권력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 그대로 오직 ‘의’를 간절히 구하는 자를 뜻한다. ‘주리다’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9번 나온다. 대부분 일반적인 의미의 ‘배고픔’을 뜻하는 것으로 쓰였지만, 이곳에서는 영적인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주리다’는 단어와 함께 유사한 뜻을 가지고 있는 ‘목 마르다’는 단어가 함께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주림’과 ‘목마름’이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하므로 의에 대한 더욱 간절한 갈망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헤그너(Donald Hagner)는 ‘의’의 개념을 ‘개인적인 의’보다는 ‘공의를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데이비드 힐(David Hill)도 여기 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의로운 삶의 관점에서 봐야 더 잘 이해한 것으로 본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공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몸부림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리더보스(H. N. Ridderbos)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의 개념은 ‘개인적인 의’라기 보다는 왕이신 하나님이 모든 불의한 권력과 거짓을 끝내시고, 압제당하는 자들에게 공의를 보여주실 때 그가 세우시는 의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리더보스는 인간이 공의를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공의를 세우시는 날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의’의 개념을 인간의 '기본적인 영적 필요성의 완전한 만족‘(the complete satisfaction of their basic spiritual need)으로서의 ‘개인적인 의’의 개념으로 보고 있다. 로이드 존스 역시 여기 나타나는 ‘의’의 개념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주어지는 칭의와 성화를 포함한 ‘개인적인 의’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의에 주리고 목 마르다’는 것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려는 열망을 뜻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에 대한 약점이 있다면 마태복음에는 은혜를 통해 주어지는 ‘개인적인 의’의 개념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의의 주입으로 주어지는 이러한 ‘개인적인 의’의 개념은 주로 바울 서신에 많이 나타나고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의’의 개념은 마태보다는 바울에 의해 제기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예수님이 ‘의에 주리고 목 마르다’고 하셨을 때 보여주신 ‘의’의 개념이 양자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본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는 인간이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개인적인 의의 개념과 의롭게 된 자가 세상에서 공의를 추구하며 사는 것을 다 포함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퍼거슨(S. B. Ferguson) 역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 개념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개인적인 의'와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와 세상에서 의롭게 사는 것’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과 관계가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고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 성취된 '의의 주입'(a righteousness of imputation)으로 주어질 것이다. 한 젊은 청년이 선교사에게 찾아와 구원 받는 길을 물었다. 그러자 그 선교사는 그 젊은이의 머리를 잡고 강으로 끌고가 물 속에 넣었다. 선교사는 그 젊은이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자 그를 꺼내주면서 “당신이 물속에 있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가?“를 물었다. “단지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 때 선교사는 그에게 “만일 당신이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면서 살기를 구한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구원 받는다“고 하였다.

사람이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음을 경험하고 있다. 욥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라고 탄식하였다. 사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고 하면서 탄식했다. 인간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이러한 인간의 영적인 무능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선교에 헌신하기를 원하는 자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이러한 의로움을 경험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경험한 사람은 거기서 머물지 않는다. 라일(J. C. Ryle)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하나님의 마음을 따라서 살려고 하는 자라는 것이다. 선교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예수 안에서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의’를 이미 경험하였기 때문에 그가 헌신하는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온전히 구하는 삶’을 추구하게 된다. ‘하나님의 의’를 경험하였기에 이제는 세상으로 들어가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고 실천하는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삶이라고 생각된다.

예수님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였다. 이 시대의 선교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미 경험한 사람으로 선교 현장에서 일생 동안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목말라 하면서 그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사는 자들에게 ”저희가 배부를 것이라“고 약속하셨다(6). 이것이 무슨 뜻인가? ‘배부르게 된다’는 것은 ‘코르타조’(χορτάζω)인데 ‘만족을 누린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에게 영적인 만족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선교사로 일생을 살았던 사도 바울은 선교 현장에서 이러한 영적 만족의 삶을 날마다 경험하면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고백했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약속하신 ‘의를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만족하는 자의 삶’이라고 본다. 사도 바울도 실제로는 선교 현장에서 여러 가지 부족함이 많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그가 자족할 수 있었던 것은 때마다 일마다 능력을 주시고 돕는 자가 계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선교적 삶을 사는 자들의 모든 현장에서 매일 같이 나오는 고백이어여 한다고 생각된다.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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