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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가정교회’ 신봉자들의 잘못된 성경 해석

기사승인 2020.07.27  10: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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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훈 교수의 에베소서 해설(14)

김정훈 교수 / 영국 글라스고(Glasgow) 대학교 신약학 박사, 백석대학교 신약학 은퇴 교수, B and C Mission Center 현대표.

   
▲ 김정훈 교수


본 글에 포함된 에베소서 4장 11절은 이단성 등으로 규정된 신사도운동의 성경적 기초로 악용되고 왜곡된 핵심 구절이며, 이런 신사도운동의 지류로 의심되는 ‘소위’ 가정교회 프로그램을 떠받드는 이론적 근거로써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오용된 대표적인 실예다. 그런 견지에서, 세계적인 에베소서 전문가 중 한 분인 김정훈 교수의 권위 있는 해설을 통해 이런 잘못들을 바로잡아서 건전한 성경해석의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다양성을 통한 통일성의 실현(엡 4:11-16)
우리는 어떻게 해야 교회의 다양성과 통일성의 신비를 한 묶음으로 실현해낼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 다양성과 통일성을 본질로 하는 교회의 실체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바울은 승귀의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분여하신 사실을 언급하였다(4:7-10). 이는 각 사람이 자기 은사를 발휘할 때 교회의 다양성과 통일성이 실현될 수 있음을 말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로마서 12장이나 고린도전서 12장에서처럼 은사의 목록을 제시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은사의 목록을 열거하는 대신, (1) 교회 사역자들의 직분명을 간략히 거론한 후에, (2) 이들의 활동목표를 언급하고, 또한 (3) 교회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이 무엇이며, (4) 교회의 작동원리가 무엇인지 진술한다. 이것들은 교회가 어떻게 은사의 다양성을 통해 통일성을 실현할 것인지에 대한 실천적 원리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교회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그럼 이 내용들을 한 항목씩 살펴보자.

   
 

1) 높이 되신 그리스도는 교회에 말씀 사역자들을 주셨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지도자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11절; 비교. 고전 12:28). 이것은 시편 인용문 후반부의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8절)에 대한 해설 내용이다. 바울이 거론하는 사도들과 선지자들, 복음 전하는 자들, 목사들과 교사들은 초기 교회의 선두그룹 지도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한 범주에 속한 자들, 곧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 말씀 사역자들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은사의 결정적 중요성을 부인할 수 없다. 처음 세 부류의 사람들(사도들, 선지자들, 복음 전하는 자들)은 특정 지역에 매이지 않고 복음전파 사역을 하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사도들은 부활의 증인들인 예수의 열두 제자들과 바울과 그의 동료 사역자들과 같은 최전선의 가장 권위 있는 교회 지도자들을, 선지자들은 신약시대 초기의 한시적(限時的) 영감자(靈感者)들을, 복음 전하는 자들은 앞의 두 직분과 약간 구별되게 독자적으로 복음전파 활동을 했던 순회(巡廻) 사역자들을, 그리고 목사들과 교사들은 정착(定着) 목회를 하던 지역교회의 목회자들을 가리킨다. 마지막 두 명칭은 한 직임을 나타내는 두 용어로 보인다(비교. 딤후 1:11).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목사는 주로 목양의 일을 맡은 자를, 교사는 주로 복음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일을 담당한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위에 거론된 초기 교회의 직분자들은 지위와 역할에 있어 일반 성도들과 구별된 위치에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바울은 사도로서 자신의 위치가 그리스도의 특사와 같은 위치이고(롬 1:1; 10:15; 고전 4:1) 또한 하나님의 밭(교회)에 씨를 심는 위치이며(고전 3:6), 자신의 역할이 “스승”의 역할을 넘어서는 아버지와 같은 역할이고(고전 4:15) 또한 양들의 목자와 같은 역할(행 20:28; 비교. 벧전 5:2)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근거 위에서 오늘날 성도들은 목회자들의 위치와 역할을 인정하고 그들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물론 오늘날의 목사들이 신약 초기의 교회 지도자들과 동등한 신분을 가진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사도선지자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날의 목회자들도 1세기에 가르치는 은사를 가지고 활동했던 사역자들의 연장선상에서 교회의 일들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편,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가르치는 사역자들과 일반 성도를 구분하면, 이는 일종의 계급화가 아닌가? 성경은 ‘만인제사장’을 가르치는데(벧전 2:5, 9) 그와 같이 구분하는 것 이 이러한 가르침과 배치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로서 결코 계급화 시스템이 아니다라고 답하고 싶다. 그것은 질서와 역할에 관한 것이지 차별화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는 말씀 사역자들의 권위와 역할상의 비중을 인정할 때 아름다운 질서와 조화를 유지할 수 있다.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은 전체로서의 교회의 신분에 관한 진술이지 교회 시스템상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라고 답하고 싶다.

베드로는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에서 출애굽 때부터 하나님이 약속하신 “제사장 나라”(NIV, ESV: a kingdom of priests. 출 19:6)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너희도···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라고 당부하면서,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 2:9)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두 번째 본문에서 한글개역개정이 “왕 같은 제사장들”(벧전 2:9)이라고 복수형으로 번역한 것은 일종의 오류다. 왜냐하면 원문은 복수가 아니라 단수를 쓰고 있고(바실레이온 히에라튜마. NIV, ESV: a royal priesthood), 이 개념은 성경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라고 지칭된 성도 공동체를 “거룩한 제사장,”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 각 개인이 교회에서 구약적 의미의 제사장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교회가 제사장적 신분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러한 개념들을 교회조직의 원리로 삼거나 교회의 직분과 역할에 적용시키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본다. 나는 교회의 조직 원리나 성도 각 개인의 역할에 대해서는 “한 몸,” “한 새 사람”으로서의 교회의 유기체성과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에 따른 은혜의 분여로 묘사되는 은사론에 비추어 정립되어야 한다고 본다. 단지 나는 성도 각

개인이 교회의 제사장적 신분을 자신에게 적용시켜 고귀한 제사장적 신분의식을 가지고 교회의 질서와 은사를 따라 교회의 제사장적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럼 교회의 제사장적 사역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베드로는 교회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해야” 한다고 교훈한다(벧전 2:9). 교회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긍휼로써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을 주시고 당신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을 찬송해야 한다는 것이다(벧전 1:3; 2:10). 베드로는 이것이 바로 그분께 드릴 “신령한 제사”(벧전 2:5; 비교. 히 13:15)라고 말한다. 이것은 포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 특히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일들을 생각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11절에 대한 한글개역개정과 헬라어 원문이 약간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한글개역개정은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라고 번역한다.

헬라어 원문은, 직역하면, “또한 바로 그가 혹은 사도들과, 혹은 선지자들과, 혹은 복음 전도자들과, 혹은 목사들과 교사들을 주셨으니”이다. 원문은 분명히 “삼으셨으니”가 아니라 “주셨다”(에도 켄)이다. 바울은 1장에서도 하나님이 만물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교회에 주셨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한 일이 있다(1:22).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11절을 읽는다면, 이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이 승귀의 그리스도를 교회에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가 말씀 사역자들(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목사와 교사)을 교회에 주셨다는 뜻이다. 말씀 사역자들이 교회에서 일반 성도들과 다른 차원에서 사역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11절은 하나님이 승귀의 그리스도를 교회에 주셨다(1:22)는 것이 무엇인지 보다 구체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말씀 사역자들을 교회에 주시어 그들로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가 지상사역 때부터 꿈꾸셨던 교회(마16:18-19)를 세워 가도록 하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목회자들의 책무는 지극히 영광스럽고도 벅찬 일이라고 할 수 있다.

2) 말씀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 말씀 사역자들을 교회에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로 3단계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12절).

첫째, 말씀 사역자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일을 해야 한다. 예수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라고 당부하신다. 이는 온전의 모델을 하나님께 두고 온전케 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라는 뜻이다. 바울이 “온전하게 하며”라고 하는 것도 성도들이 점진적으로 온전하게 되도록 지도하라는 뜻이다. 온전은 믿는 자가 평생에 걸쳐 실현해야 할 지속적 과제다(참조. 요 17:23; 고전 2:6; 고후 3:11; 엡 4:13; 빌 3:15; 히 7:11; 10:14; 12:2; 약 1:4; 3:2; 비교. 롬 15:1). 목회 현장에서 성도에게 온전케 되어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상당 부분 말씀 사역자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둘째, 말씀 사역자는 성도들로 봉사의 일을 하게 해야 한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봉사의 일을 할 때 자신의 존귀함과 소중함, 거룩한 신분의식, 보람, 감사, 기쁨을 느낀다. 성도가 “이것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조직을 섬기는 거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섬기는 거야. 인간이 나를 이용하고 있는 거야”라고 느낀다면 얼마나 절망적이겠는가? 성도가 교회에서 세속주의의 해충들이 우글거리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피하고 싶겠는가? 말씀 사역자는 성도들이 주의 몸된 교회를 섬김으로 주와 깊은 영적 교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겸손히 섬겨야 한다. 그들은 성도들이 봉사의 일을 하는 데까지 이르도록 부지런히 양육해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다. 말씀 사역자들은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과 그들로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일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해야 한다. 세운다는 것은 빌딩 이미지를 배경에 둔 메타포(그림 언어)인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건물을 짓듯이 차근차근 건축해 가야 한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자기가 살 집을 직접 자기 손으로 짓는 일이 많았다. 이 경우 주인은 흙벽돌로 자기 집을 지어도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 말씀 사역자들은 성도들에게, “지금 우리는 다 함께 아름다운 건물을 세워 가고 있는 중이며, 이것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값진 봉사가 절대 필요합니다”라고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 말씀 사역자들이 성도들과 함께 세워 가는 건물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건물이다. 몸이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무엇보다도 영양가 있는 음식(말씀)을 섭취하여 면역력을 키워 외부의 병균들을 막아내야 하고, 체내의 병균들을 다스려야 하고, 적당한 운동을 해야 하고, 몸의 각 기관이 정상 기능을 해야 하고, 때로는 체질개선을 하기도 해야 한다.

말씀 사역자는 교회의 건강도를 섬세하게 살피며 성도들로 교회를 견고히 세워나갈 수 있게 지도해야 한다. 요약하면, 그리스도가 교회에 가르침의 은사를 가진 말씀 사역자들을 주신 것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견고히 세우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말씀 사역자들은 성도들이 신앙의 성숙을 이룰 수 있도록 양육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결과적으로 교회를 아름답고 견고하게 지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3)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에까지 자라는 것을 성장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자라는 것이 정상이듯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성장해야 한다.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면, 최고의 부지에, 최고의 설계를 따라, 최고의 건축자재로 건물을 짓다가 도중에 멈추어 버린 것과 같다. 바울은 교회 성장이라고 하는 이 중차대한 주제를 풀어내고자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13절). 나는 이 본문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해당 헬라어 원문을 이렇게 번역해 본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한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충만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하나니.” 이 본문은 교회 성장의 세 단계를 제시한다.

첫째 단계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일치를 이루는 일이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를 아는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어 가는 것은 교회 성장의 증거다. 성도 안에 그리스도에 대한 일치된 신앙고백(크레도)과 일치된 지식(코기토)이 없으면 교회의 기반은 허약할 수밖에 없고, 교회 성장이란 기대할 수 없다. 교회가 지식을 무시하고 신앙고백 위주로 가면 비단천에 오물을 끼얹은 것처럼 천박하게 되고, 신앙고백을 무시하고 지식 위주로 가면 머리가 두 개 달린 뱀처럼 흉측하게 된다. 열등의식이나 열광주의에 사로잡혀 지식을 멸시하는 자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가격하는 자이며, 우월의식이나 주지주의에 사로잡혀 믿음을 멸시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危害)하는 자다. 그러므로 교회는 믿음과 지식을 균형 있게 추구함으로 지속적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

둘째 단계는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일이다. 교회가 미성숙 단계를 벗어나 성숙한 사람처럼 변화되어 가는 것은 교회 성장의 증거다. “온전”이란 “목표에 도달한 상태, 충분히 달성되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한 새 사람”으로서의 교회는 당연히 완전한 성숙을 성취해야 한다. 말씀 사역자들이 성도들을 온전케 하기 위해 힘쓰는 것도 사실은 교회 공동체가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교회는 한 인격체로서 믿음과 지식의 일치를 통해 바로 이런 상태로 성장해 가야 한다. 교회가 성숙 과정을 통해 그와 같은 형태로 변모되어 가지 않는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걱정거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 단계는 그리스도의 충만의 상태에까지 성장하는 일이다. “충만”이란 앞의 “온전”과 에코가 있는 단어로 “가득 채워져서 만족스러운 상태”를 뜻한다.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시다(1:23). 그리고 교회는 바로 그분의 몸으로서 그에 의해 충만케 된 실재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충만의 장성한 분량”이란 종말론적 차원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충만케 된 그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자신의 충만상태를 외적으로 최대한 실현한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 교회 성장의 마지막 단계는 바로 그와 같은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4) 교회 성장은 이단에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부정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것이며, 양자는 “~이 아니라, ~이다”의 구조로 되어 있다.

첫째, 그것은 교회가 사람들의 속임수 곧 거짓된 간계를 위해 꾸미는 술책에 현혹 되어 그릇된 모든 교훈들을 바람이 부는대로 따라다니며 흔들리고 휩쓸리지 않는 것이다(14).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귀가 얇아서 이단적 가르침들에 쉽게 중독되고 만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지식의 결핍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단사설에 쉽게 빠지는 사람들은 신앙의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다. 어린아이들은 감정을 자극하고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는 말들에 쉽게 넘어간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앙의 유아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이단의 가르침에 속지 않는 것도 믿는 자의 의무임을 알아야 한다(엡 5:6).

둘째, 그것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함으로 범사에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이다(15). 교회가 그리스도를 표준으로 자라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교회는 수적 성장보다는 질적 성장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표준으로 삼고 질적으로 성장한다면 수적 성장도 수반될 것이다. 수적 성장을 우선시하고 질적 성장을 도모하려고 한다면 많은 부작용이 일어나고 결국은 수적 성장도 멈추게 될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성장의 표준으로 삼고 자라가려면 교회 안에 진리가 풍성해야 한다. 진리가 빈약하면 교회는 성장 에너지를 축적할 수 없다. 교회의 말씀 사역자들은 가정주부가 가족에게 맛있는 음식을 지어 먹이는 것처럼 성도들에게 부지런히 복음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진리를 강조하다 보면 사랑을 잃기가 쉽다. 진리는 항상 예리한 칼과도 같은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 사역자는 항상 진리를 사랑의 보자기로 싸서 전달해야 한다.

5) 교회는 유기체의 작동원리를 따라 성장한다.
바울은 지금까지 교회 성장의 관점에서 은사의 다양성을 통한 교회의 통일성을 주제로 진술해 왔다. 이제 그는 마지막으로 몸의 각 부위의 유기적 상호기능을 비유로 교회 성장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한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 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16 절). 나는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헬라어 원문으로부터 이 본문을 직역해 본다: “그로부터 온 몸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함을 따라 돕는 각 마디를 통해 함께 연결되고 결합되어 그 몸을 자라게 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우느니라.” 이 본문은 교회의 성장원리를 4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 성장의 근원이시다. 교회의 성장을 위한 각 지체의 유기적 작동 에너지와 자양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둘째, 말씀 사역자들은 교회의 성장을 위해 성도들을 하나로 엮는 채널 역할을 한다. 그들은 몸의 부위들을 연결하고 결합하는 “각 마디”와 같은 역할을 한다. 셋째, 성도들은 교회의 실질적 성장을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함을 따라”는 바로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넷째, 교회 성장의 최종목표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그 몸을 자라게 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우느니라.” 교회 안에서 사랑은 성장 호르몬과 같은 기능을 한다. 사랑은 교회의 질과 양을 증진시키는 핵심요소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다양성이 살아 숨 쉬는 유기적 공동체다. 교회는 이 다양성을 통해 통일성의 신비를 실현해 가야 한다. 높이 되신 그리스도는 교회에 말씀 사역자들을 주셨다. 말씀 사역자들의 임무는 교회를 세우는 것, 즉 교회를 그리스도의 충만에까지 이르도록 성장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의 모든 성장 비결이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도들은 각자 받은 은사를 따라 교회 성장을 위해 실질적인 기능을 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이 온전케 되고, 교회 세움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지, 또한 자기 자신도 얼마나 하늘 공기를 마시며 신령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일인지 알아야 한다.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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