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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의 큰 흐름 중 하나 ‘선교’(1)

기사승인 2020.08.05  14:3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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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동섭 교수의 선교로 읽는 성경(14)

방동섭 교수 /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역임, 글로벌 비전교회 담임

   
▲ 방동섭 교수

I. 들어가는 글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사도행전은 언제나 신선한 충격을 주는 책이다. 사도행전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신선함은 마치 가을에 광릉수목원의 오솔길을 걸으면서, 울긋불긋한 낙엽을 주우며 마음 속 깊이 스며드는 진한 솔 향기를 마음껏 마셔보는 기쁨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렇게 기쁨을 주는 사도행전이 초기에 정경으로 받아들여지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며, 설교 본문으로 잘 사용되지도 않아 크리소스톰은 4세기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사도행전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누가는 사도행전의 교회가 완전하거나 그 구성원들이 어려운 문제로부터 면제된 사람이라고 묘사하지 않는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처럼 그들도 주후 1세기 삶의 현장에서 다양한 문제들을 직면하였고, 때로는 그 문제들로 인해 쓰라린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에게서 현대 기독교인들의 삶에서는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뭔가 독특함이 있음을 느낀다. 그들의 삶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 현대 교회가 "어디서 실패하였으며" 또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우리가 실패한 데서 성공하였으며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간직하던 교회였다.

21세기 한국 교회가 논의해야 할 가장 긴급한 화두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국 교회, 다시 성장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 교회를 냉철한 눈으로 본다면 한국 교회는 단지 "성장이 위협받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생존 그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으로 보여진다. 마치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겔 37:3)고 물으신 것처럼 오늘 우리가 한국교회를 두고 심각하게 물어야 하는 질문은 한국 교회 다시 성장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뇌사 상태에 빠져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 한국 교회, 다시 살 수 있겠는가의 생존의 문제라고 보여진다.

   
 

한국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무엇보다 “sola scriptura"(오직 성경으로)의 원리로 돌아가는 일이 필요하다. 성경으로 돌아가 교회의 정체성교회의 사명을 다시 새롭게 정리하고 인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신약 교회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또한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살펴보고 우리 시대의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21세기에 사도행전을 다시 공부하는 목적이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만나는 교회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면 21세기 기로에 서있는 한국 교회를 근본적으로 살려낼 수 있는 처방을 갖게 될 것이라고 본다.

II. 사도행전의 교회론

“교회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필자가 지난 20년 동안 신학을 연구하면서, 또는 목회 현장에서 교회를 섬기고 다양한 지역을 방문하여 선교 사역에 참여하면서, 그리고 신학교에서 미래의 사역자들을 양성하는 가운데 필자의 가슴을 떠나지 않고 언제나 남아 있는 질문이다. 최근 미국의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지금까지 교회가 가졌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며 교회론의 새로운 정립을 시도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 내부에는 그동안 교회론에 대한 심각한 혼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배울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론이다. 사도행전은 교회다운 교회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판단된다. 사도행전은 교회가 어떤 길로 가야 할지를 정확하게 제시하여준다. 우리는 바른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도행전으로 가야 한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교회는 어떤 모습인가?

1. 성령의 공동체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오랫동안 나라를 잃어버리고 외세의 말발굽 아래 끊임없이 학대받으며 살아가던 고통과 눈물이 얼룩져 있었던 팔레스틴 한 모퉁이에서 시작되었다. 거기에 이미 유대교라는 낡은 종교가 유대인의 문화와 삶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후 1세기 유대교는 지나치게 형식화되고 교조주의적으로 변질되어 더 이상 사람들의 마음을 끌지 못하고 소망을 줄 수 없는 종교였을 뿐이다. 그 종교는 사람들의 타는 목마름, 영적 갈증을 해갈시킬 수 없는

무력한 종교였다. 뭔가 새로운 종교적 대안이 필요한 시대였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하나의 명령과 함께 시작한다. 그것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는 선교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다음에 나오는 두 번째 명령이다. 사도행전에 처음 나오는 명령은 기다리라는 명령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들었다(행 1:4). 그렇다면 여기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구약 요엘서 2:28-29에 예언되고 예수님에 의해서 다섯 차례나 언급된 바 있는 (요 14:16, 26, 15:26, 16:7, 13) “성령의 부어주심의 약속“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성령의 복음" 혹은 “성령의 행전“이라고 불리워진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하나님의 교회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들이 살아가던 시대는 절망적이고 그들이 나갈 수 있는 모든 공간은 닫혀있었지만 하나의 공간은 열려있었다. 그것은 하늘의 문이었다. 공포와 실의에 빠져있던 연약한 120명의 무리가 사방이 막혀있었던 좁은 공간에서 할 수 있던 것은 유일하게 열려져 있었던 하늘을 향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다“(행1:14). 그 결과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최초의 신약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교회는 그때까지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던 모든 종교적 조직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특징을 가지고 출발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 교회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보여주는 독특한 현상인 성령의 강림이 뚜렷한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행 2:1-4).

누가는 특히 성령께서 오순절에 임하셨던 사실을 의도적으로 밝히면서 그 날에 성령이 오신 것의 중요성을 암시하고 있다(행2:1). 성령이 오순절에 임하신 사건은 몇 가지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성령이 강림하였던 오순절은 유대인의 추수 명절로 수고하여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는 절기였다(23:17, 23:15). 그러므로 오순절에 성령 강림이 이루어진 것은 앞으로 초대교회가 선교를 통해 커다란 영적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을 암시한다.

둘째, 이 절기에는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예루살렘에 모여드는 때로 오순절 성령의 역사의 파장이 극대화 될 수 있는 시기였다. 동쪽으로는 바대인(Parthians), 메대인 (Medes), 엘람인(Elamites), 서쪽으로는 로마(Rome), 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메소보다미아(Mesoporamia), 소아시아(Asia Minor), 그레데(Crete), 아라비아(Arabia), 애굽(Egypt), 구레네(Cyrene) 등지에 퍼져 살던 유대인들 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왔다.

셋째,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형식과 제도에 치우친 지나친 율법주의적 유대 종교 조직을 대치할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는 자발적인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처음부터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태어났으며, 이후에도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존하여 진행되는 것을 보여준다.

넷째, 이 사건은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무런 공헌을 기대할 수 없었던 변두리의 인물들이 하나님의 역사의 전면에 발탁되었음을 보여준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위시한 120명의 무리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 비해 아무런 기득권이나 우위성을 가질 수 없는 매우 연약하고 초라한 무리였다. 그러나 이 초라한 무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때가 이르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일꾼으로 선택받은 것이다. 그들은 그 척박한 땅에서 단지 자신들의 신앙을 지켰던 무리로 남은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하나님의 선교의 도구로 살았으며 선교의 기초를 놓기 위해 헌신하게 되었다.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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