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순교자 양용근 목사 77주기 추모 특별대담

기사승인 2020.11.30  12:37:16

공유
default_news_ad1

사회: 최은수 교수/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 Ph.D. Berkeley GTU 객원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대담: 양향모 목사/ 철학박사, 광성교회 담임, 순교자 양용근 목사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양향모 목사

최은수 교수: 귀한 시간 내어 주신 목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양용근 목사님은 손양원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과 마찬가지로 순교의 면류관을 쓰셨지만, 한국교회에는 잘 알려지지 않으셔서 말 그대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하늘에서 해 같이 빛나는 순교자라고 생각이 됩니다. 순교자 양용근 목사님이 1943년 12월 5일에 감옥에서 모진 고문과 박해를 견디시다가 소천하셨기 때문에 이제 곧 77주기가 되네요. 제가 알기로는 양용근 목사님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에 태어나셨고, 미국 남장로교 파송 선교사들이 세운 매산학교에 다니시면서 기독교인이 되었지요. 그 후 일본 니혼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시고, 고향인 광양의 오사리로 가셔서 오사학원을 세워서 민족혼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양용근 목사님은 자신이 받은 소명대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만 6년이 지난 1939년에 졸업하셨습니다. 양 목사님은 미국 남장로교 파송 선교사인 오웬 선교사가 1908년에 설립한 광양읍교회를 필두로 여수 애양원교회, 고흥 길두교회, 구례읍교회 등에서 사역하셨습니다. 순교자 양용근 목사님의 순교 77주기를 맞이하는 감회가 남다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순교자 양용근 목사님이 목사님의 작은할아버지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순교자의 후손으로 살며 사역하는 소회를 간단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양향모 목사: 순교자의 후손이라는 호칭이 때로는 자부심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 부담감도 만만치 않습니다. 특별히 오늘날의 목회환경은 그때 당시에 비해서 엄청나게 달라져서 그 시대의 믿음과 마음가짐으로 산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돈을 사랑하지 않으며 검소하게 살기가 힘이 듭니다. 또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면서 철저하게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들 등이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순교자의 후손들은 이런 힘든 일들을 당연히 지키며 살아야 할 사람처럼 생각하고 보는 눈이 부담됩니다. 그러나 그런 부담감이 부족한 저를 조금은 더 목회자 다운 삶을 살게 하고 있다고 자위하며 받은 구원의 감사를 성화 생활과 사명 감당으로 표하며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 순교자 양용근 목사

최은수 교수: 공감합니다. 신앙의 대적이 확연하게 보일 때는 적을 아니까 대처하기가 비교적 수월할 수 있죠. 하지만 지금과 같이 일반 대중들의 삶과 생각을 지배하는 타락한 자본주의는 더 큰 우상인 맘모니즘세속주의의 쓰나미를 일으키며 조용하면서도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지요. 양용근 목사님이 고뇌하며 사시던 그때와 지금 우리의 삶을 비교할 때,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다수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봅니다. 즉, 1938년에 교단 총회가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가결하고 거의 대부분의 교회와 성도들이 신사참배, 동방요배, 교회에 가미다나를 설치하고 참배하는 일들이 보편화 되고 쉽게 타협해서 모두 넓은 문으로 들어갔으니 말입니다. 좁은 문, 즉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라고 하며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박해를 받았던 분들이 갔던 길은 고난의 가시밭길이었으니 말입니다. 지금도 비슷하게,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기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이런 사조에 반대하며 사는 사람들이 소수이니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지요. 그럼 다음으로 순교자 양용근 목사님의 삶과 사역, 그리고 순교의 역사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시겠습니까?

양향모 목사: 양용근 목사님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에 태어나서 해방되기 두 해 전인 1943년에 순교하신 목사님이십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가 세운 전남 순천 매산학교를 다니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때 좀 더 공부해서 억울하게 고통당하고 사는 우리 민족을 구해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일본에 가서 일본대 법대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법을 공부하면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이런 법을 가지고는 법관이 된다고 해도 우리 민족의 억울함을 풀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귀국 후 법관의 길을 가지 않고 고향마을에 학당을 세우고 낮에는 아이들에게 밤에는 어른들에게 한글과 성경을 가르치면서 민족혼을 일깨우려했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이에 헌신하고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양 목사님은 다른 외지로 가지 않고 시골 고향의 작은 교회들을 지켰으며 여수 애양원 교회와 같이 특별히 어려운 사람들이 있는 곳에 자원하여 목회했습니다. 목회하면서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우리 조상들의 전통적으로 지켜온 우상숭배를 타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못사는 나라가 되고 일본에 압박까지 받는 나라가 된 것은 우상숭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미신타파에 앞장섰습니다. 신사참배 반대도 그런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정신이었으며 교회당에 일본 신상인 가미다나를 설치하고 거기 먼저 절하고 예배드리라는 일본의 요구를 철저하게 반대했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구속되어서 실형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이때 동방요배까지 요구받고 거절하다가 모진 구타를 당하고 순교하셨습니다.

   
▲ 일본 대학 졸업장

최은수 교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나라 잃은 절망감과 허탈감으로 민족이 신음하고 있던 즈음,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 우리 민족이 깨어나고 소망을 갖고 신앙의 전진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당시 기독교는 고난당하는 민족과 하나가 되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통해 적지 않은 대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였지요. 당시에는 전체 인구에 비례하여 기독교인의 숫자가 월등히 많았던 것도 아닌데 비하면 기독교가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전체 인구의 20퍼센트를 상회하고, 어떤 지역은 30퍼센트 이상을 상회하는데도 그 영향력은 크지 않아 보입니다. 빛이 빛을 잃고 소금이 맛을 잃어서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다음 질문 드리지요. 양용근 목사님과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하신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양향모 목사: 손양원 목사님은 양 목사님과 평양신학교에 1933년에 입학한 동기입니다. 양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애양원교회를 손양원 목사님을 후임으로 추천하여 시무하게 하셨습니다. 두 분은 기도의 동지로 같은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셨습니다. 특별히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했을 때 신학교에서 함께 밤을 지새우며 기도했습니다. 이때 두 분을 포함한 기도의 동지들이 뜻을 모아서 함께 결의문을 채택했는데 그 첫째가 우리는 순교할 각오로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선봉장이 된다였습니다. 양용근 목사님이 1943년에 예수 나를 오라 하네라는 찬송을 부르며 순교하심을 알고 후일 손 목사님도 1950년에 그 찬송을 부르며 순교의 길을 가셨습니다.

최은수 교수: 양용근 목사님은 평양신학교 시절인 1938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손양원, 김형모, 안덕윤 신학생 등과 함께 11가지 결의사항을 작성하고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무장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과 신앙이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분들처럼 제 목소리를 내는 인물들이 있었다면 총회적으로 수치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요즘 한국교회를 바라볼 때, 세상과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성경에 기초하여 진리를 외치는 사람들이 더 그리워집니다. 그만큼 한국교회의 위기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차원에서 순교자 양용근 목사님의 지론대로 보신다면,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무엇이고, 한국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셨을까요?

   
▲ 평양신학교 졸업장

양향모 목사: 한국교회가 지난 2018년 3월에 “신사참배 결의 80주년 회개 및 3.1운동 100주년을 위한 한국교회 일천만 기도 대성회”를 열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신사참배 결의를 한 것을 회개하는 것은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들이 왜 신사참배를 가결했는지 그것을 회개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오늘날은 신사참배를 하거나 강요하는 세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신사가 다른 모습으로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번영신학의 영향으로 돈이 우상이 되어 있고 경건을 이익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대로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데도 형식적으로 신사참배 가결에 대해 회개를 한다고 기도회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사랑하고 권력을 사랑하여 세상과 타협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천국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철저한 회개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은수 교수: 경건을 이익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말씀이 참으로 마음을 울립니다.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프로그램이라는 상품을 잘 포장하여 장똘뱅이처럼 값싼 복음을 판매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교회가 삼류 장사치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사회를 변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개혁의 대상이 되어 변화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음 질문 드리지요. 순교자 양용근 목사님이 평생 과업으로 삼고 추구하셨던 사역이나 과업은 무엇이었나요?

양향모 목사: 양용근 목사님은 전도사 시절을 포함하여 8년여의 목회 생활을 하였고 그나마 2년여의 재판과 수감생활을 제외하면 아주 짧은 목회였습니다. 그나마 일제 말기 신사참배를 통해 교회의 박해가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나타난 많은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목회하기 이전의 사역은 학당을 세우고 백성들의 무지를 깨우쳐서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회 이후에는 우상숭배를 타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산재한 미신타파에 앞장서자고 했습니다. 특히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봉안전 참배 금지와 가미다나를 교회당 안에 설치하는 일을 반대함에 선봉장이셨습니다. 나아가 동방요배와 국기에 대한 경례까지도 거부했습니다. 그는 설교를 통하여 우상숭배의 잘못과 신사참배를 연결시켜서 거부하게 했습니다.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일본은 망하고 우리나라가 다시 나라를 되찾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멀지 않아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모든 민족을 심판하실 것이니 그때까지 참고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자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자세로 살다가 순교하셨기에 나라에서는 순국자로 보아 독립유공자로 선정하여 건국훈장을 수여했습니다. 하지만 유족들은 양 목사님이 믿음을 지키시다가 순교하셨기에 순교자로 여깁니다. 이것이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한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정부에서는 순국자 곧 애국자로 본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최은수 교수: 순교자 양용근 목사님이 평소 말씀하시던 명언들은 무엇이었나요?

양향모 목사: 양용근 목사님이 감옥에서 순교하시기 전날 밤에 부르신 찬송이 “예수 나를 오라 하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시면 그곳이 어디든지 예수님께서 가신 겟세마네 동산까지라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와 함께 뜻을 모아 결의문을 채택했는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목회를 한다, 기복신앙을 타파한다, 미신타파에 총력을 기울인다, 신사참배를 결사반대한다, 삯꾼 목사가 되지 않는다, 스데반이 누린 최상의 복을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헌신한다, 일제의 탄압에 희생되어가는 동포를 그 위기에서 구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는 동포가 되도록 헌신한다라는 결의를 남겼습니다. 특별히 부인이 되는 유현덕 사모가 감옥을 찾았을 때 양 목사님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를 물었습니다. 이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아내에게 미안한 감정을 표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사모님이 당신은 목사로서 당신의 길을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사모님은 남편 없이 4남매를 양육하면서 믿음의 길을 지켰습니다.

최은수 교수: 순교자 양용근 목사님의 77주기를 맞이하여 후손 되시는 목사님과 대담을 나누게 되어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목사님의 지적처럼, 순교와 연관된 행사 위주나 보여주기식 겉치레 말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하는 모습이 성령님의 강한 바람처럼 한국교회에 일어나기를 소원해 봅니다. 다시 한번 대담에 응해 주신 점에 대하여 감사드리며 앞으로의 사역 위에 주님의 선한 손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최은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