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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영성(1)

기사승인 2021.02.03  13:5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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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동섭 교수의 선교 논단

방동섭 교수/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역임, 글로벌 비전교회 담임
 

   
▲ 방동섭 교수

주님의 책망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하신 일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에 독특해 보이는 것은 제자들을 매우 엄하게 꾸짖고 책망했다는 것이다. 스승을 잃어버리고 가뜩이나 낙심해 있던 그들, 혹시 자기들도 끌려가 죽는 것이 아닌지 근심과 불안 속에 있던 그들에게 주님은 먼저 위로 대신 준엄한 책망을 주셨다. 우리는 주님이 그들에게 위로가 아니라 먼저 책망을 주신 데 놀란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신 것도 사랑인 것을 확신한다. 왜 그런가? 만일 그들이 주님께서 이미 포기했던 대상이었다면 책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신 것은 아직도 그들의 가능성을 기대하신다는 증거로 보인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책망하셨는가?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찾아가 두 가지를 책망하셨다(막16:14). 첫째는 저희의 믿음 없는 것”(their lack of faith)이고, 둘째는 마음이 완악한 것”(their stubborn refusal)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누구보다 주님의 모든 것, 주님이 주신 모든 말씀을 믿어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적어도 3년 동안 주님과 함께 한솥밥을 먹으며 살았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으며, 주님이 보여주신 엄청난 이적과 기사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결과는 그들 중에 예수님을 팔아먹는 자가 없나, 세 번씩 부인하는 자가 없나, 마침내 모두가 예수님을 철저히 배반하고 도망해 버렸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들은 여전히 믿기를 거절하고 의심하였던 사람들이었다. 이것을 ‘신앙인의 불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로서 그의 말씀도 들었고 그가 하시는 모든 일을 보았고, 열정도 어 보였지만 정작 그들의 믿음을 보여야 할 때는 전혀 믿음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뜻이다.

 

   
 

세상에 짓밟히는 교회

오늘날 우리 예수님께서 한국교회에 오신다면 엇을 책망하실 것인가? 그것은 역시 신앙인의 신앙이다. 한국교회의 교인들처럼 잘 믿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어디 있는가? 아마 신학교를 경쟁해서 들어가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 같은 나라는 찾기가 쉽지 않다. 다른 나라는 장학금을 주면서 오라고 해도 신학교에는 잘 안 간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한국에는 재수하고 또 삼수해서라도 신학교에 가고 목사가 되려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심지어 미국에 있는 명문 신학교의 대부분에서 한국 학생들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그래서 외국의 크리스천들이 한국에 오면 처음에는 그 거룩한 물결 앞에 압도당한다. 순간적으로 기절하려고 한다. 한국이 성지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 지낸 다음에 그들은 실망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크리스들이 많고 교회가 골목마다 서 있는 한국사회가 국가별 부패지수에는 1등이라는데 놀란다. 신문에 나는 굵직한 사건에 크리스천들의 이름이 너무 자주 거론되는 것에 놀란다. 옛날 한국 초대교회 때에는 장로님이 죄 지으면 마을에 토픽이었다. 목사님이 죄 지으면 온 마을이 놀랐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그럴 줄 알았다. 그들도 사람인데 다 그런 거 아니야! 오히려 따뜻하게 감싸주고 이해해준다” 이것이 무엇인가? 교회가 지금 세상에 짓밟히고 있는 증거 아닌가?

 

부담감을 주는 사람들

요즈음 세상 사람들은 매우 지혜롭다. 그들은 가 진정한 기독교인인지, 가짜 기독교인인지 너무 잘 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세상에 나가서 친구들하고 놀 때는 아무 거리낌 없이 화끈하게 놀고, 잘 어울리면서 온갖 악한 일을 다 하는데 이상하게 주일이 되면 성경책을 들고 교회를 가거나 믿는 행세를 하면서 표를 내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너 왜 그러냐? 하나님이 놀라신다!”고 말한다. 평상시처럼 해야 하는데 주일만 되면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니까 그렇다.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려 같이 나쁜 짓을 하면 그 앞에서는 “야, 너는 교회를 다녀도 앞이 꽉 막히지 않고 융통성 있네!”하면서 칭찬한다. 그러나 딴 데 가서는 그 인간 예수 믿는 것 맞아?”하면 조롱한다.

그러나 그 반대로 기독교인이 제대로 살고 정의롭게 행동하면 별로 환영을 못 받는다. 그를 자기들 그룹에 껴주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능력이 있는 사람이 무시를 당하고, 따돌림을 당한다. 만일 회사나 직장에서 기독교인들이 일을 원칙대로 하고 정직하게 처신하면 주변 사람들은 그를 슬슬 피하고 어울리지 않으려고 한다. 왜 그런가?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하고 일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정직하게 살고 원칙대로 움직여 세상 사람들에게 좀 부담감을 줘야한다고 생각한다. “저 사람들 원칙대로 사는 사람들이야. 뇌물은 안 통해!”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다고 본다. 비록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을 싫어하고 부담감을 느끼고 피하면서도 다른 데 가서는 뭐라고 하는가? “아닌 게 아니라 사실 예수 믿으려면 그 사람처럼 믿어야지... 그 사람은 진짜 같다”고 말하다. 세상 사람들이 그런 에서는 정확한 데가 있다. 이것이 기독교인이 보여주어야 할 진정한 영성의 모습이다.

불신자 가정에 시집온 며느리가 처음 예수 믿으면 얼마나 핍박이 심한가? 최선을 다해 가정을 돌보고 시어른을 정성스럽게 모시면서도 예수 믿는 것 하나 때문에 갖은 욕을 다 먹고 아무리 일해도 표도 잘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시어른이 집안에서는 그 며느리를 그렇게 핍박해도 밖에 나가서 친구를 만나면 뭐라고 말씀하는가?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예수 믿으려면 우리 며느리처럼 믿어야 해!” 결국 그 집 어떻게 되는가? 온 가족이 그 며느리가 믿는 예수님께 마침내 돌아온다. 이게 무슨 말인가? 세상은 예수 제대로 믿는 사람 하나를 제대로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라. 세상은 우리가 예수님을 정확하게 제대로 믿는 것 때문에는 결코 조롱하지 않는다. 오히려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삶을 살기 때문에 조롱하는 것이다.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에 비해 별로 다른 것이 없어서 조롱하는 것이다. 우리의 싸구려 믿음을 조롱하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세상을 믿음으로 정복하기보다는 언제나 세상에 끌려다니고, 세상의 눈치나 보고, 세상에 수치를 당하면서 겨우 체면치레하면서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지하게 믿고 믿음 대로 살면 주변 사람이 부담을 느낀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래서 우리를 멀리하고 싫어한다. 그러나 속으로는 존경한다. 두려워한다.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히브리서 11:24-26에 보면 멋지게 인생을 살던 한 사람이 나온다. 그는 물에서 건졌다고 해서 그 이름을 ‘모세’라고 하였다. 죽어야 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다 모세처럼 건짐을 당한 사람들이다. 죽을 사람이 아직도 살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있는가? 하나님이 우리도 모세처럼 한 번 제대로 써보고 데려가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세의 인생을 살펴보면서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있다.

히브리서 11:24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참믿음의 법칙 첫 번째를 본다. 그것은 참믿음은 거절할 것을 거절하며 사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부패지수 1위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매우 간단하다. 거절할 것을 거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진국이 어떤 나라인가? 경제가 발전하고 기술이 앞선 나라가 아니다. “No” 할 때 “No”라 고 말 할 수 있는 시민들이 사는 나라이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해도 “No”할 때 “No”를 못하면 후진국이다. 선진국에서는 유치원 때부터 이것을 가르친다. 그래서 선진국의 사람들은 “내가 살아가는 인생의 모든 지혜는 유치원 때 다 배웠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어떤가? 어렸을 때부터 “No”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 백화점에 가서 보면 딱한 경우를 종종 본다. 엄마가 보기에 불필요한 것인데 아이는 사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다. 엄마가 안 된다고 말해도 계속 울면서 떼를 쓴다. 그러면 그 아버지가 “거, 창피하게 왜 애도 하나 못 보고 울려!” 하면서 “시끄러우니 하나 사주라“고 말한다.” 그때부터 이 아이는 “No”도 떼를 쓰면 “Yes”가 된다고 배운다. 그래서 외국 사람들이 “한국은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는 나라”라고 말한다. 그것을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익히 배우면서 자라났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아이들을 위해 장난감을 전문으로 파는 백화점에 갔었다. 거기서 어떤 네 살 정도 되는 아이가 엄마에게 뭔가를 사달라고 울고 있었다. 나는 그 엄마가 그 아이를 어떻게 다루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조금 떨어져서 조용히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때 그 엄마는 그 아이를 조용한 구석진 곳에 데려가서 왜 안 되는지를 먼저 엄하게 말하다니, 그 아이를 야단치며 막 때리는 모습을 보았다. 미국은 부모가 아이를 때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인가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부모가 그 아이에게 어렸을 때부터 “노(no)”를 가르쳐 주는 엄한 교육이었던 것이다. 그 아이는 그때부터 조용히 따라다녔다. (no)”는 울고 떼를 쓴다고 예스(yes)” 되는 것이 아닌 것을 배운 것이다.

기독교인의 영성은 정확하게 “노”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물론 크리스천이 “예스”를 말할 때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의 대부분은 “노”할 때 “노”하지 못하므로 어려움을 맞게 된다. 모세, 그는 이집트의 촉망받았던 왕자로서 그는 당대의 제국 한 손에 얻을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다시 말하면, 권력의 정상에 누구보다 쉽게 오를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기회는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이집트의 권력을 택했다면 우리는 그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와 수 천 년이라는 시간적 공간과 엄청난 지리적, 문화적 차이를 느끼며 살고 있는 우리가 모세를 기억하는 이유는 모세가 그러한 세속 력에 대해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토록 찬란한 이집트의 권력이라도 모세 앞에서 갑자기 빛을 잃어버린 것이다.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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