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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영성(1)

기사승인 2021.02.18  10:5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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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동섭 교수의 선교 논단

방동섭 교수/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역임, 글로벌 비전교회 담임
 

   
▲ 방동섭 교수

위험한 사회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라는 역사와 삶의 컨텍스트를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많은 미래 학자들이 21세기를 장미빛으로 보고 있지만, 필자는 21 세기가 매우 위험한 시대가 될 것으로 본다. 2015년에 작고했지만 뮌헨 대 학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rlich Beck) 교수도 “현대인은 문명이라는 화산 위에 사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표현하고 있는 현대사회는 한 마디로 “매우 위험한 사회”이다. 그에 의하면 오늘날 지구촌의 여러 나라들이 깊은 생각 없이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 속에서 과학 기술의 위험성이 극대화 되어 전 세계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경험했던 체르노빌 핵 발전사고, 유전자 조작 농산물, 인간 복제의 시도,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한 인간 조작의 가능성, 빅텍기들의 정보 조작 가능성, 그리고 코로나19 사태 등은 우리가 위험한 사회를 살고 있다는 대표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의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이 발전시키고 있는 과학 기술과 인공지능이 인간의 숨겨 진 이기심, 부패한 죄악성과 연결된다면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 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이 발전시키고 있는 유전공학이 나 생명공학이 앞으로 어디로 튀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 끝에 무엇이 있 을지 우리는 매우 불안하다. 21세기의 현대인들은 이런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때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무엇인가를 결정해 야 하고, 그 결과 예상치 못했던 엄청난 불행을 자초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될 가능성도 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위험한 곳에서 전혀 위험한 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놀듯이 현대인들은 그렇게 위험이 방치된 사회에서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불과 20여 년 전에 새천년이 우리에게 처음으로 다가왔을 때 현대인들은 뭔가 소망하던 것이 마침내 이루어질 것 같은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던 소망스러운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고, 또 다른 절망과 좌절만 남긴 채 역사는 우리 곁을 야속하게 스쳐 지나가 버리고 벌써 2021년이 되었다. 전 인류가 사탄의 숫자 놀음에 또 속은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너무 2000년을 부르짖었다. 교회나 국가나 기업이나 사회단체 할 것 없이 모두가 심심하면 2000년을 노래하였다. 마치 인생의 모든 것을 2000년에 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사회는 문명의 불구덩이 속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무서운 사건을 예상하게 되는 합적 위험사회이다.
 

생각이 마비된 교회

사회가 이렇게 무섭게 변하고 있지만 교회는 어떤가? 교회는 이렇게 위험한 현대 사회를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있는가? 인생이 언제나 청춘이 아닌 것처럼, 교회도 언제나 좋은 시절만 있는 것 아니다. 서구의 교회는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선교의 황금기를 거치며 부흥했지만 이제는 기독교 후기 사회에 직면하면서 고사 직전에 놓여 있다. 특히 20세기 초에 뒤늦게 시작된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부흥하고 급성장하면서 그런대로 잘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비대해진 한국교회도 언제든지 돌연사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신(계2:5)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주신 주님의 경고가 요즘처럼 새롭게 들리는 때가 없다. 주님이 한국교회의 촛대를 옮기시면 우리는 결코 살아남을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크리스천들은 사상이 진공상태로 변하는 것 같다. 도대체 깊은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이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에는 다행히 QT(말씀 묵상) 열풍이 불고 있어서 이제는 교회에서 QT를 하지 않으면 같은 신앙인들끼리도 서로 대화가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이다. 그동안 설교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일방적으로 얻어먹기만 했던 사람들이 스스로 말씀을 먹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어떻게 보면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이제 영적으로 홀로서기를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소위 QT는 열심 히 하는 것 같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생각하는 훈련이 전혀 안 되어 있다. 그래서 말씀을 읽고 묵상을 하는데 그 말씀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깊은 뜻을 읽어내지 못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아전인수 격으로 성경을 해석할 때가 많다. 또한 손 들고 춤을 추며 온몸으로 찬양을 부르지만 영적인 귀가 막혀 있는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은 도무지 듣지 못한다. 기도는 밤낮으로 하지만 대부분 기도를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작업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기도는 무엇인가?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우는 직업이지 결코 자기 뜻을 이루는 작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마네 동산에서 보여주신 기도의 핵심은 자신이 목표로 세워 놓은 어떤 을 성취하는 과정이나, 자신의 뜻을 이루는 수단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다

이렇게 기독교인들이 생각 없이 사니까 각종 대형 비리 사건에 한두 사람씩 기독교인들이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 들어간다. 요즈음 우리가 전도할 때 세상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아마 이런 반응이 가장 많을 것이다. “글쎄, 당신이 전하는 복음은 좋지만, 그 복음을 전하는 당신은 왠지 싫어!” 혹은 “예수는 좋은데 당신이 다니는 교회는 싫어!”라고 할 것이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기독교인들이 오히려 복음 전파의 장애물이 될 때가 많다. 동네 한복판에 세워진 교회가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막을 때가 많다. 왜 한국에는 교회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반 교회적이 되는지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이 깊은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이 시대의 흐름을 읽으면서 그 말씀을 진지하게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하여 뭔가 달라진 모습으로 살지 않는다면, 한국교회는 언젠가 우리 민족의 마음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게 되지 않을까 매우 염려된다. 한국사회는 우리에게 금 복음을 말로 전하는 것보다 복음이 요구하는 삶의 실천을 더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두 종류의 인생

마태복음 7:13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셨던 산상수훈의 결론, 첫 부분에 해당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이 나온다. 21세기에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한 영성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이다. 그렇지만 쉽게 넘어가는 말씀이다. 성악가는 찬송가 부르기가 제일 어렵다고 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찬송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너무 알기 때문에 너무 어려운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두 가지 종류의 인생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아가지만 정리해보면 두 가지 종류의 인생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 생명을 얻어 진정으로 사는 인생, 또 하나는 소위 잘 나가는 인생, 하지만 크고 넓은 길로 가다가 완전히 멸망하게 되는 인생이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 외에 다른 인생은 없다는 것이다.
 

크고 넓은 길

유감스럽게도 이 세상에는 생명의 길보다는 멸망으로 가는 길이 더 인기가 있다. 그만큼 세상은 판단력을 상실해버린 것이다. 멸망의 길의 특징을 보면 “크고 넓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작은 것에 콤플렉스가 있어서 그런지 큰 것을 좋아한다. 집도 커야 되고, 자동차도 커야 되고, 백화점도 커야 되 고, 회사도 커야 되고, 교회도 커야 하고, 심지어 사람의 다리도 ‘롱 다리’(?) 가 되어야 사람대접을 받는다. 한국에서는 뭐든지 커야 잘 팔린다. 자동차도 작으면 잘 안 팔리고, 아파트도 평수 작으면 외면을 당한다. 심지어 사람도 작으면 인기가 없다. 그래서 최근에는 어렸을 때부터 키를 늘리기 위해 키 크는 약을 먹이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뭐든지 “클수록 좋다는” 것이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김우중 신화’의 종말을 보았다. 1967년 31세의 나이로 D실업을 창업하고 그 그룹을 재계 순위 2위까지 성장시켰던 신화적 인물이었다. 그는 모든 샐러리맨의 우상이었으며,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하는 슬로건과 함께 승승장구하는 성공하는 기업인의 표상이었다. 그런데 그가 실패한 경영인으로 쓸쓸히 물러났으며 더욱이 그가 회사의 자금 41조를 빼돌려 놓은 것이 알려지면서 ‘최대의 사기꾼’이라는 오명까지 들었다. 그는 이제 인생의 최후를 맞이하였고 서서히 잊혀져가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김우중 씨의 몰락은 단지 한 개인의 실패가 아니다. 또한 그 그룹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크면 무조건 좋다”는 한국인의 우상과 허상이 무참히 깨진 것을 의미하며, 큰 것이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국민에게 준 것이다.

이처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처음에는 좀체 자기의 정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크고 넓고 화려하고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람을 묘한 매력으로 끌어당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그 길이 무슨 길인지 모르고 넓고 화려한 길로 달려간다. 이 길은 한번 들어가면 중도에 나오기 힘이 든다. 갈 때까지 가게 되고, 끝장을 봐야 한다. 그러나 죽을 때 그 길이 망하는 길인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가? 나는 김우중 씨가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끝나기 전에 자신이 추구해왔던 삶의 정체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래 해외로 야밤도주했던 것이다. 그러나 물러날 때 비겁하게 도망가는 방법이 아니라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한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시키고 국민에게 사죄를 구한 후에 명예롭게 물러났다면 좋았을 것을 지나친 사욕이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 것이 아쉽다.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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