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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로 인한 감사와 찬양의 기도(1)

기사승인 2021.02.23  15: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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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훈 교수의 기도 본문 해설(18)

김정훈 교수 / 영국 글라스고(Glasgow) 대학교 신약학 박사, 백석대학교 신약학 은퇴 교수, B and C Mission Center 현대표
 

   
김정훈 교수

한나의 기도(2): 구원의 하나님 찬양(삼상 2:1-10)

우리는 기도를 단순히 육신의 자녀가 아버지에게 필요를 요구하듯 하나님께 육적으로, 영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청원하는 행위로만 생각하기 쉽다. 이것은 기도를 너무 단순화한 생각이다. 기도를 무슨 청구서 양식(樣式)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기복신앙적, 무속신앙적 행위에 불과하다. 물론 우리는 기도에 당연히 우리의 필요에 대한 청원을 포함시켜야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성경적이다(마 6:11, 33). 단지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기도가 그렇게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훨씬 더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영적 행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소개된 기도문이나 기도의 정황과 내용, 기도에 관한 교훈 등을 주목해 보면,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평상시 느끼는 것보다도 훨씬 더 심오한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의미와 다양한 영적 행위들(예를 들어, 감사, 찬양, 중보, 서원, 결심, 회개, 심령의 토로, 하나님의 뜻의 갈구, 신비한 영적 체험 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은 한나가 하나님께 기도의 응답을 받아 사무엘을 낳고, 젖을 뗀 후 자신의 서원대로 그를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바친 후에 기쁨에 압도되어 찬양 기도를 올리는 내용이다. 한나의 찬양은 사무엘이 만 3살쯤 되었을 무렵(참조. 2 Macc. 7:27) 그를 실로로 데려가 엘리 제사장의 손에 넘겨주고 마음이 흡족하여 하나님께 경배하며 드리는 기도다. 그녀의 찬양 기도는 단순한 기쁨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존하심에 대한 고백과 대적자들에 대한 속 시원한 호통과 경고,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에 대한 통찰, 거룩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악인들에 대한 그의 심판,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의 지극한 권세에 대한 진술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녀의 기도가 예언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녀의 기도에는 시편의 메시야 예언시 같은 요소들이 엿보인다. 즉, 그녀의 기도는 기쁨과 감사와 찬양을 넘어서 예언적 특징을 보여준다. 이 사실은 성경신학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한나의 찬양과 신약의 마리아의 찬가(눅 1:46-55. “Magnificat”[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라고 불리는 본문) 그리고 사가랴의 찬가(눅 1:67-79. “Benedictus”[축복]라고 불리는 본문)와의 유사성에 의해 확인될 수 있다. 나는 한나의 찬양이 이 두 신약 본문과의 유사성 외에도 회상적으로 모세의 홍해 도하(渡河) 찬가(출 15:1-18)와도 부분적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고, 여러 출애굽 기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사실들은 한나가 얼마나 깊은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고 어떠한 영적 안목을 갖고 신앙생할을 하며 자신의 시대를 살아갔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한나의 찬양 기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찬양이 기도로 분류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나는 그 내용상 기도의 요소가 충만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독백처럼 드린 찬양이라고 하는 점에서 기도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에 큰 무리가 없다고 본다.
 

1) 기도의 서언(1절)

이 도입부는 아래와 같은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1) 하나님, 저는 가슴이 터질 듯이 즐겁습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한나는 하나님이 자기의 서원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 것을 생각할 때 가슴 벅차도록 즐거웠다. 자신의 불임은 자신에 대한 브닌나의 모욕적 행위의 원인이었고, 가정불화의 원인이었으며, 우울함의 원인이었고, 경건생할의 장해요인이었다. 그러나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문제가 하나님의 응답으로 통쾌하게 해결되었으니 한나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는 자신의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한나에게 기쁨을 안겨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무엘의 출생이다. 하지만 한나는 하나님이 그 기쁨의 근원이 되심을 고백하며 즐거워한다. 그녀는 하나님이 자기의 애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자기의 태의 문을 여셔서 자기에게 아들을 주신 사실을 생각할 때 너무도 기뻤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지금까지 수없이 응답해 주신 일들을 헤아리며 감사하고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시 136:1-26). 또한 우리는 한나처럼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응답의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밀착되어 있는 사람이다. ,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의 탑을 높이 쌓아 올리고 오만에 빠지거나 다른 사람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2) 하나님, 저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니 저의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한나는 사무엘을 출산함으로 달라진 자기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브닌나뿐 아니라 자기를 향해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라며 모욕하던 여인들의 수근거림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언약의 하나님이 자기의 서원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심으로 자기의 위상이 현저히 높아진 것을 알 수 있었다. “, 권세를 상징한다.

(3) 하나님, 그동안 마음에 간직해 두었던 말들을 원수들을 향해 속 시원히 쏟아내고 싶습니다.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이는 한나가 기도 응답의 기쁨으로 인해 원수들을 향해 그동안 참았던 말을 쏟아내겠다는 선언이다. 이 선언은 단지 브닌나에게 복수를 선언하는 말이 아니다. 만일 브닌나 한 사람을 생각했다면 단수 “원수”를 썼을 것이다. 한나는 “원수들”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다수의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나가 브닌나에 대해 분노의 감정을 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한나는 브닌나를 분명 “적수”로 여겼다(삼상 1:6).

따라서 “원수들”에 브닌나가 포함되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한나는 브닌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마치 저주받은 여자인 것처럼 뒤에서 수군거리며 모욕감을 주었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한나가 그러한 비방자들에 대해 감정이 좋았을 리가 없다. 당시 사회는 결혼한 여자가 자식을 낳지 못하면 수치와 모멸을 감수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브닌나는 한나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냈고,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한나에게 모멸감을 주었다. 한나는 자기의 불임이 자기 책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억압적 사회 관습 속에서 죄인처럼 취급되었고, 그녀는 이 상황에 대해 무어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사무엘을 낳고 젖을 뗀 후에, 태어날 아기에 대해 나실인 서원을 했던 대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고, 당당한 마음으로 입을 열어 그동안 참았던 말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한나는 원수들을 향해 자기가 입을 크게 열게 된 것은 주의 구원으로 인한 기쁨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나가 사무엘을 낳은 것은 그녀에게 구원이었다. 성경에서 “구원”은 항상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한 죄 사함과 의롭다 칭함과 영원한 생명 얻음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이같은 구원론적 의미 외에도 일반은총 차원에서 절박한 상황에서 구출됨, 악한 환경으로부터 벗어남, 막힌 것이 뚫리고 온갖 고통으로부터 해방받음 등을 뜻하기도 한다. 한나에게 불임은 마치 버림받은 것과 같은 상태였다. 그러나 사무엘의 출생은 불임으로 인한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였다. 그것은 한나에게 자기를 격동시키며 짓누르던 모든 분노와 슬픔, 우울, 억압, 수모(羞侮)로부터의 구원받은 것을 뜻하였다.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은 한나에게 큰 기쁨을 주었고, 기쁨은 용기를 주었고, 용기는 자신감을 주었고, 자신감은 닫혀 있던 그녀의 입을 열어 열변을 토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녀는 그동안 담즙을 짜듯 온갖 격정을 참으며 다져온 자기 영혼의 샘에서 분출되는 언어들을 쏟아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2) 하나님 고백(2절): 언약의 하나님, 당신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한나는 앞 절에서 자기가 칭송한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한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한나의 “여호와” 호칭 사용은 그녀가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녀의 하나님 고백은 하나님의 언약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한나는 하나님 여호와를 “거룩하신 이”라고 부른다. 사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처음으로 언급했던 인물은 모세다. 모세는 홍해 도하(渡河) 찬가에서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출 15:11)라며 수사학적 질문을 던진다.

모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모든 신들 중에 뛰어나신 분이시며, 거룩함 가운데 영광스러운 분이시며, 또한 이적을 행하심으로 찬송할 만한 위엄을 갖추신 분이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거룩함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호렙산 떨기나무 불 가운데 임하시어 모세를 부르실 때 말씀하시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5-6)라고 하셨다. 이 장면은 하나님이 두 가지 사실을 선언하신 것을 의미한다.

첫째, 나는 거룩한 자다, 그러므로 내가 임한 이 장소도 거룩하니 세상의 먼지를 밟으며 더러워진 네 신을 벗으라. 둘째, 나는 네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놀라운 약속을 주고, 대대로 그 약속을 확인해 주며, 신실하게 그것을 지켜 온 언약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모세의 체험은 그 이후에도 역사의 중요 지점마다에서 반복되었다. 모세는 하나님이 출애굽 후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거룩한 백성”(출 19:6)이 되게 하리라고 약속하실 때, 호렙산에서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되살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그는 자신을 시내 산꼭대기로 부르실 때마다 당신이 임하신 그 산에 백성이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게 할 것을 경고하신 일(출 19:23)도 생생히 기억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자기의 생애 마지막 지점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느보산으로 불러 자기가 그곳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시며, 그 이유는 가데스바네아 물가에서 당신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백성 중에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을 때(신 32:48-52),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되뇌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된 모세의 체험 역시 반복적이고 지속적이었다. 하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사역하는 동안 아브라함 때부터 주신 언약을 거듭 거론하시며 당신께서 그 언약을 신실히 이행하고 계심을 확인시켜 주셨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시내 광야에 도착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시내 꼭대기로 따로 불러 십계명과 율례들을 주셨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모세는 율법이 제사장 나라 언약의 재확인이며 동시에 그 나라의 통치 원리라는 사실을 더욱 더 확신할 수 있었다.

한나가 하나님을 “거룩하신 이”라고 고백할 때, 모세의 구원 찬양(출 15장)이 그녀의 고백에 얼마나 직접적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한나가 고백하는 “거룩하신 하나님”은 모세가 호렙산에서 대면하였고, 그가 홍해 도하 후에 고백한 “거룩하심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한 개념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나의 “거룩하신 하나님” 고백은, 그녀가 영적으로 모세 라인(line)의 서 있는 한, 그 고백은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뜻을 함의할 것이다. 한나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구원의 일들을 통찰하고 있는 한, 그녀는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 실현의 한 중요한 지점에 서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나가 하나님을 “거룩하신 이”라고 부를 때 그녀는 특히 2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
첫째, 그녀는 하나님이 유일무이한 존재시라는 고백을 마음에 품고 있다.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라는 한나의 고백은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 신(神)이십니다”라는 뜻이다. 한나는 자기 민족의 역사를 회고해 보면서,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과 신실한 이행에 있어서, 존귀하심과 권능, 권세, 진실, 성실, 공의, 인내, 자비, 성결, 판단에 있어서, 영원하심과 영광, 부요, 위엄, 지식, 지혜, 다스리심에 있어서 그 누구/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분이심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그녀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의 반석이시라는 고백을 마음에 품고 있다.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라는 한나의 고백은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의 구원의 반석이십니다”라는 뜻이다. 이 고백은 한나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노정 중에 있었던 가데스 바네아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목말라 아우성칠 때 하나님은 모세로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치게 하여 거기에서 솟아나는 물로 그들을 해갈시켜 주었다. 광야 여정 중인 이스라엘에게 반석은 구원의 상징이었다. 그 반석은 구원의 생수의 원천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믿는 자들은 구원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터져 나오는 성령의 생명 강수(江水)를 흡족히 마심으로써 영혼의 완전한 해갈을 체험할 수 있다(참조. 7:37-39; 비교. 47:1-9).
 

3) 대적자들에 대한 경고(3-5절): 입조심 하고, 힘자랑하지 말며, 인생 반전을 주목하라

드디어 한나는 원수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식을 낳지 못한다고 자기를 업신여기며 비웃던 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한나가 개인적으로 불쾌한 감정을 품었던 자들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왕국 건설을 훼방하는 자들이었다. 곧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제사장 나라로 세워 그들을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뜻을 저지하는 대적자들이었다. 한나는 활짝 열린 영안(靈眼)으로 사사시대 말기의 혼란상을 직시하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의 굴절을 안타깝게 여기는 경건한 여인이었다. 이제 한나는 대적자들을 향해 몇 가지 경고의 말을 한다.

(1) 하나님 나라 운동의 훼방자들아, 교만한 말과 오만한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말라(3).
한나는 대적자들에게 심히 교만한 말과 오만한 말을 발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 두 종류의 말은 거의 유사하나, 교만한 말은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자 곧 스스로 고상하고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내뱉는 말을 뜻하고, 오만한 말은 자존감이 지나쳐서 다른 사람을 얕잡아보는 자가 내뱉는 말을 뜻한다. 교만한 자들과 오만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 건설의 최악의 훼방꾼들이다. 우리는 언어생활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 무슨 말이든 나의 말이 입안에 있을 때와 입 밖으로 나왔을 때는 완전히 다르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엎질러진 물과 같다. 그러기에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2, 6)라고 교훈한다. 우리는 잠언 기록자가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니라”(잠 25:11)라고 하는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나는 대적자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언행심사를 다 알고 계시며 그들을 판단하실 것이라고 경고한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하나님은 사람들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다 알고 계신 분이시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당신의 저울에 달아 경중을 확인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다윗은 원수들(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의 공격으로 인해 심히 괴로울 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한탄하듯이 이렇게 독백하였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라”(시 62:9).

(2) 하나님 나라 운동의 훼방자들아, 힘자랑하지 말라(4절).
다음으로 한나는 대적자들에게 힘자랑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이 절은 원문을 따라 “용사들의 활은 부러졌으나 넘어진 자들은 힘으로 띠를 띠었도다”라고 읽으면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것 같다. “용사들”은 한나를 대적하던 자들을 가리킨다. 한나는 자신을 비웃던 자들이 용사들처럼 무섭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활은 부러졌다. “활”은 공격용 무기로 “무력, 권세, 힘, 권력”을 상징한다. 구약시대에 자식은 마치 화살통에 담긴 화살처럼 여겨졌다(시 127:4-5). 대적자들이 아무리 화살이 많이 가졌어도 그들의 활이 부러졌으면 화살들은 더이상 무익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돈과 조직, 지식, 군대, 경력, 정보, 소유, 학문, 정치 권력을 자기들의 힘으로 삼고 이것을 악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해치고 학대한다. 믿는 자들은 세상 세력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결코 억압해서는 안 된다. 높은 빌딩을 지어놓고 그것을 자랑하며 과시하는 자들은 바로 옆에 비교 불가한 높은 산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넓은 땅을 소유하고 그것을 자기 힘으로 삼는 자들은 무한대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활은 부러졌다”라는 말은 한나가 사무엘을 출산함으로써 대적자들의 공격 무기가 파손되어 버렸다는 것을 뜻한다.

한나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넘어진 자들은 힘으로 띠를 띠었도다”라고 말한다. 한나가 자식을 갖지 못해 대적자들의 조롱을 받으며 위축되어 있을 때는 그녀가 마치 넘어져 있는 자와 같았다. 그러나 사무엘의 출생으로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권능의 상징이었다. 아들이 없던 한나는 이제 힘을 갖추게 되었다. 그녀가 사무엘을 낳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녀와 함께하심을 의미한다. 그녀는 자기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띠로 삼아 허리를 동이고 당당하게 설 수 있었다. 한나는 자신의 인생 역전을 증거로 대적자들에게 거만한 행위를 멈추라고 경고할 수 있었다.

(3) 하나님 나라 운동의 훼방자들아, 소유가 많다고 자랑하지 말라(5절).
한나는 계속 교만하고 오만한 자들에 대한 경고 기조(基調)를 유지하면서 인생 역전에 대한 진술을 조금 더 진전시킨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한나는 당시 기준으로 두 가지 예로써 경고한다.

첫째, 많은 물질을 가졌다고 자랑하지 말라. 한나가 세상을 관찰할 때, 먹을 것이 풍족하여 배부르던 사람들은 빵을 얻기 위해 날품을 팔고, 가난하여 굶주리던 사람들은 다시 배가 고파 굶주리는 일이 없게 된다. 오늘날 우리도 이러한 물질 소유의 역전을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많이 가졌을 때나 갖지 못했을 때나 항상 초연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교훈한다: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30-31).

둘째, 아들을 많이 두었다고 자랑하지 말라. 한나는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기서 “일곱을 낳았고”는 한나 자신이 낳은 자녀의 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포함하여 4남 2녀를 두었다(삼상 2:20-21). 따라서 한나의 말은 단지 자기 경험담이라기보다 자기가 관찰한 세상 현상에 대한 것이다. 지금보다 인간 수명이 다소 길었던 한나 시대에 임신하지 못하던 여인이 뒤늦게 여러 자식을 두는 일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한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인데, 사실 한나가 사무엘 외에 3남 2녀를 더 낳은 것은 그녀가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라고 진술한 이후의 일이다. 이는 한나의 찬양이 얼마나 영감에 찬 진술이었는지를 반영한다. 아무튼 하나님이 태의 문을 열어주시면 불임 여인도 여러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인생 역전이 가능하다. 반면, 한나가 살필 때, 본래부터 많은 자녀를 낳고 힘을 과시하며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을 비웃던 여인은 나중에 보니 병들어 쇠약하게 되었다. 한나의 뜻은 자식들을 포함하여 세상의 것들로 다른 사람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지 말라는 것이다.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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