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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른인가?

기사승인 2021.02.24  14:4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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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자 세상읽기 25/ 미하엘 <미성숙한 사람들의 사회>

<교회와신앙> 장운철 기자】  미성숙한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네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혹, 나 자신도 그 가운데 하나에 속할 수 있다. 이제 그 미성숙의 한계에서 벗어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찾아 나아가보자.
 

* 미성숙한 사람들

41세 남성 A씨. 그는 회사 생활이 버겁다. 업무량도 많고 또 인간관계가 쉽지 않다. 무섭다고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는다.

   
▲ 미하엘 빈터호프의 책 <미성숙한 사람들의 사회>

35세 여성 B씨. 그녀는 회사 생활을 잘하려고 애쓴다. 맡은 프로젝트 발표 날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또한 다른 이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하지도 못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눈물 뚝뚝 흘리며 울고만 있었다.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한참을 울고만 있었다. 보는 사람도 민망할 정도로 말이다.

45세 남성 C씨. 그는 회사 부장이다. 그는 직원들의 성과를 독려하지 않는다. 잘못한 일에 지적도 하지 않는다. 담당자에게 책임추궁도 하지 않는다. 그는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이후 남아서 직원들의 일 뒤처리를 하느라 바쁘다.

25세 여성 D씨. 그녀는 수습기간 동안 퇴사를 했다. 그것도 2번째다. 그녀는 직장 생활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녀는 집에서 어린이 TV프로 보는 게 즐겁다. 인형을 끌어 앉고 침대에 누워 그렇게 생활하기를 원한다.

초등학생 E군. 그는 축구부 부원이다. 메시처럼 유명한 축구선수가 그의 꿈이다. 그는 경기 도중 억울하다며 심판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그로 인해 3경기 출전 금지를 당했다. 그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부모가 왔다. 그들도 자신의 아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에게 잘못했다는 말을 하라고 시키지 않는다.

몸은 이미 어른인데 아이 같은 모습, 즉 성숙하지 못한 이들의 예를 들었다. 그러한 어른 밑에서 자란 아이의 불균형적인 모습도 살펴보았다. 이 시점에서 스스로 자신에게 질문 한 번 던져보자.

‘나는 어른인가?’

우리나라 법적 성인의 기준은 나이 만 19세다.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고, 또 신용대출을 받을 수도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의 선거에 투표를 할 수 있으며, 부모의 동의 없이 결혼도 할 수 있다. 그럼 나이 만 19세만 넘으면 누구나 어른이 되는 것일까?

<미성숙한 사람들의 사회>(미하엘 빈터호프, 추수밭, 2016)는 몸은 이미 어른인데 성숙하지 못한 이들, 즉 미성숙한 사람들의 모습을 잘 정리해 놓았다. ‘그들은 왜 세상 모든 게 버거운 어른이 되었나’가 부제다. 성숙하지 못해 세상살이가 버거운 이들의 예다.

F씨는 늘 사랑 받고 싶어한다. 자신이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여겨지면 견디지를 못한다. 누군가로부터 꾸중 듣는 것이 그에게는 고통 그 이상이다. 그는 ‘상처 받았다’는 말을 자주한다. 사람들로부터 위로 받고 싶어하고, 중심이 되기를 원한다. 그는 자신의 자녀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웃 어른들에게 지적받는 것을 참을 수 없다.

G씨는 책임감이 없다.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맡은 일을 매우 소극적으로 한다. 조금이라도 책임질 일이 생기면 일단 피하고 본다. 또한 많은 핑계거리를 미리미리 준비해 둔다. 그에게 책임은 ‘남의 것’이다.

그 외에도 얼마든지 우리네 주변에서 찾을 수 있다. 결정을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 사람, 주관 없이 늘 대세만 따르는 사람, 어려움을 견딜만한 의지가 부족한 사람, 다른 이가 방향을 제시해 줄 때까지 계속 기다리는 사람, 원하는 바가 당장 이루어지지 않으면 감정이 폭발하는 사람 등이다.

위 책의 저자 미하엘 빈터호프는 소아정신과 의사다. 말 그대로 어린아이의 정신 문제를 취급하는 의사다. 그는 어린아이가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 대부분은 어른 때문이라고 말한다. 미성숙한 어른, 즉 부모에 의해서 어린아이가 힘들어한다는 의미다. 저자는 아이가 아닌 부모를 치료해 주는 게 대부분이라고 한다.

너무도 산만하다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찾아온 부모의 예다. 5살, 3살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육아에 매우 지쳐 있다. 이를 본 남편이 아내를 위해 가능한 일찍 퇴근해서 집안 청소와 설거지 등을 돕고 또 중요한 일, 즉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도 잘 해주고 있다. 그런데 왜 문제일까? 정말 어린 아이들의 정신 문제일까?

저자는 아빠의 모습에 보다 깊이 관심을 기울였다. 일찍 귀가해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노력은 훌륭했다. 그러나 남편은 수시로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회사 업무 때문이다. 아이들과 놀다가도 자주 전화기를 들고 나갔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놀이의 흐름이 깨지고 자기 멋대로 난장판을 만들곤 했다.

저자는 치유책으로 전화기, 텔레비전, 인터넷을 과감히 끄라고 조언한다. 아이들과 온전히 그리고 조용한 시간을 자주 가지라고 조언한다. 다만 위의 가정만을 위한 게 아니다. 일반적인 처방전이다.

저자가 언급한 어른의 기준이 마음을 찌른다. 독자 제위께서도 조용히 판단해 보기를 바란다.

‘나는 신뢰받고 있는가?’이다. 내가 속한 각각이 공동체로부터 말이다. 가족으로부터 신뢰받고 있는가? 내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계획하고 행동하는 것들에 대해 가족들은 신뢰하는가? 가족의 범위를 조금 키워서 친인척까지 가면 어떤가? 그 다음은 직장에서다. 직장 생활에서 나는 동료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나? 또 하나의 공동체가 있다. 바로 교회다. 나는 교회에서 신뢰받고 있는가?
 

* 성숙한 어른으로

   
▲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걷고 있다

성경에서는 어른에 대해서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가? 성숙한 어른은 어떤 모습이며, 또한 그 어른이 누리게 되는 기쁨은 무엇인가?

히브리서는 어린아이와 어른의 모습을 잘 구분해서 말해주고 있다. 히브리서 본문을 통해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찾아가 보자.

1. 선과 악을 분별

먼저 히5:12-14절의 말씀이다.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2-14)

성경에 어린아이라는 단어가 몇 차례 등장한다. 주로 순수하고 깨끗함, 겸손함을 언급할 때 어린아이의 모습을 빗대어서 표현한다. 예를 들어보자. “천국에서 누가 큰 자입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답을 하셨다(마18:1-2). 무슨 말인가? 겸손함을 의미한다.

반대 의미도 있다. 어린아이는 성숙되지 못하였고, 사리분별과 선악의 분별이 부족함을 뜻할 때 사용된다. 위 본문이 그 예다. 신앙생활을 한 지 꽤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이제는 마땅히 선생이 되어 이웃을 섬기고 사랑함으로 하나님 나라 확장시키는 일을 해야 할 터인데, 아직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며 지적하고 있다. 계속해서 자기만 사랑해 달라고 ‘징징’거리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자’라고 언급했다.

우리는 삶에 많은 것들을 결정하며 살아간다.
직장생활에서 업무에 관한 일, 인간관계, 물질관계, 시간관리, 승진 유무, 부서 이동 또는 직장 이동, 앞날의 비전 등이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부부 관계, 양가 부모와의 관계, 수입 지출 문제, 건강문제, 자녀의 이모저모 문제, 이웃과 친척과의 관계 등이다. 교회에서도 모든 일들이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보통 하루에 2만 가지를 결정하며 산다고 한다. 그중 90%는 무의식 중에 결정하고, 10%인 약 2천 가지는 의식을 하는 가운데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판단과 결정에 있어서 어린 아이와 어른의 모습은 상반된다. 어린아이일수록 자신의 기분에 따라 결정을 한다. 자신의 감정이 결정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말이다. 기분이 나쁘면 말이 거칠고, 일처리도 대충한다. ‘이익’도 어린아이의 빼놓을 수 없는 기준이다. 즉,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판단하고 결정을 하게 된다.

이에 반해 어른은 다르다. 또 달라야 한다. 자신의 감정이나 이익 등으로 사리를 판단하고 결정하기보다, 무엇인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를 먼저 따질 줄 안다. 때로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수도 있다. 손해를 볼 때도 있다. 그럼에도 선과 악을 구분하여 판단과 결정을 내린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참다운 어른, 거룩한 어른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가’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 그 길이 지혜의 길이요, 평안의 길이다. 하나님께 칭찬받는 길이다. 당장은 힘들고 불편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가신 그 발자국을 그대로 밟고 따라가는 게 진리가 된다.

성숙한 어른은 지혜와 평강을 누린다. 진정한 만족을 맛보며 살아가게 된다. 마치 잔잔한 호수와도 같다. 종종 돌멩이들이 떨어지지만 ‘퐁당’ 소리만 낼뿐 이내 다시 평온한 호수가 된다. 큰 돌멩이가 떨어져도 마찬가지다. 어린아이와 같은 호수는 그렇지 않다. 작은 돌멩이 하나만 떨어져도 ‘풍덩’소리를 내며 곧바로 파도처럼 출렁거린다. 어느 정도 큰 크기의 돌멩이가 떨어지면 해일 수준의 파도가 요동을 치게 된다.

최근에 결정한 것들을 돌아보자. 어린아이처럼 결정한 것이 무엇이며, 또 어른과 같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각양의 은사를 허락하셨다. 그중에 ‘영분별의 은사’도 있다(고전12:10, 요일4:1 등). 필자는 그 은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에게나 허락되어진 것이라 본다. 예를 들어보자.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 아니다. 나를 믿어도 구원을 받는다,’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고 해보자. 실제로 대한민국에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이 꽤 있다. 위와 같은 소리를 들었을 때 올바른 기독교인들이라면 ‘가짜’, ‘이단’ 등으로 평가를 할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위 주장을 들려주면 그는 꽤나 다른 평가를 내릴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는 유한 결론을 내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왜 그럴까. 바로 영분별의 은사 때문이다.

문제는 그 은사의 감각이다. 어떤 이는 그 감각이 뛰어난 반면에 어떤 이는 무뎌진 칼날과도 같다. 어떻게 하면 그 감각을 날카롭게 할 수 있을까? 두 개의 성경구절이 도움을 준다. 먼저는 로마서 12장 2절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무슨 뜻인가? 이 세대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시편 119:9-11절을 계속 살펴보자.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9-11)

어떤 교훈을 주는가? 우리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또 범죄하지 않기 위해서 ‘주의 말씀’을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그 말씀을 따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성숙한 어른, 거룩한 어른은 선악을 잘 분별하여, 참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사는 이를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그 말씀대로 지키며 따르는 이다.
 

2. 하나님 중심의 삶

‘세상의 중심’.

어린아이와 어른을 구분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다시 말해 ‘세상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어린아이는 ‘나’라고 답한다. 세상의 모든 게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여기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이가 바로 어린아이, 미성숙한 이다.

반면 어른이 되어 갈수록 세상의 중심이 ‘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이는 세상의 중심이 ‘너’, 즉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자신이 기뻐하는 이유도 너 때문이며, 슬퍼하는 이유도 바로 너 때문이다. 무슨 옷을 입을까의 기준도 너 때문이며, 어디로 여행을 갈까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기준이 온통 ‘너’ 때문이다.

부모가 되면 그 ‘너’가 자식으로 바뀐다. 이사 가야 하는 이유, 반찬 종류가 바뀌어야 하는 이유, 돈을 모아야 하는 이유 등이 모두 재조정 되고 만다. 자신 인생의 기쁨과 슬픔의 이유도 역시 뒤집어진다. 이때 종종 남편은 서운함을 느낀다.

물질만능주의에 ‘푹~’ 빠진 사람은 ‘돈’이 세상의 중심이 된다. 돈만이 그를 웃고, 울게 한다.

취미생활에 극하게 빠진 이도 다르지 않다. 지인 중에 최근 마라톤에 미친(?) 이가 있다. 그의 생활은 온통 마라톤이다. 직장, 휴가, 의복 심지어 결혼도 모두 마라톤과 관련되어 있다. 그의 세상의 중심은 마라톤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성숙한 어른, 거룩한 어른은 세상의 중심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이가 진정한 어른이라는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 사랑하는 사람, 자녀, 돈, 취미 등과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다. 내 삶에 진정한 기쁨은 하나님께로부터 옴을 고백하고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진짜 화를 내는 이유도 하나님 때문이며, 나를 슬프게 하는 이유도 하나님 때문이고, 나를 참으로 만족케 하는 이유도 하나님 때문임을 인정하고 그 길을 따르는 자를 말한다.

한 번 되돌아보자. 최근 내가 화내고 짜증내고, 또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게 무엇 때문이었는가. ‘나’ 자신 때문이었는지, ‘너’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하나님’ 때문이었는지 말이다.

히브리서 6장은 5장에 이어 계속해서 어린아이와 어른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다. 히6:1-2절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6:1-2)

무슨 말인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 즉 죽은 행실 등을 이제는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가자고 권면하고 있다. 오늘 주제로 다시 말해보자면, 참된 어른의 길을 가자는 말이다. 히브리서 6장이 말하고 싶은 어른은 어떤 모습인가. 히6:19-20절을 한 번 더 살펴보자.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6:19-20)

바로 ‘예수=영원한 대제사장’임을 믿고 그 믿음의 길로 담대히 가자는 말이다. ‘예수를 바라보자’고 강조한다(히12:2). 예수님의 대제사장되심은 히브리서가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 중 하나다. 예수님이 친히 완전한 제물이 되셨고 또한 단 한 번으로 영원까지 미치게 하는 대제사장으로 완벽한 제사를 드리셨다는 의미다. 그 믿음이 우리의 참된 소망이며, 위로이며, 평안이다.

성숙한 사람과 미성숙한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서 나타난다.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반면 미성숙한 사람은 주변 사람으로부터 위로를 받으려고 한다. 지혜, 평안, 용기 등도 마찬가지다.

성숙한 어른은 성경말씀을 깊이 묵상함으로 진정한 위로를 받는다. 그것으로 다시금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는다. 현실에선 사막을 걸어야 하고, 자갈밭을 헤쳐나가야 한다. 참된 어른은 ‘징징’거리며 주변 사람을 찾지 않는다. 예수님을 똑바로 바라보며 힘과 용기를 얻는다. 기쁨과 평안함을 누린다. 그리고 징징거리는 이의 손도 잡아준다.

멋진 어른, 성숙한 어른으로 나아갑시다.

장운철 기자 kofking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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