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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는 영성(3)

기사승인 2021.04.01  14:5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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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동섭 교수의 선교 논단

방동섭 교수/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역임, 글로벌 비전교회 담임
 

   
▲ 방동섭 교수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사람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 반드시 배워야 할 교훈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상식적인 판단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상식을 무시해서는 안 되고 상식적인 판단을 하면서 일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상식으로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부딪혔을 때는 상식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수직적인 초자연적 계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던 바울의 경우 상식적으로 본다면, “이제 우리는 다 죽는다.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을 준비를 하자”고 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다”(행 27:22)고 했는데, 이것은 그 당시에는 아무도 인정할 수 없는 상식을 넘어서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는 죽어야 할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초자연적 도우심으로 모두 살아났다.

사실 우리는 영적으로 볼 때, 상식을 무시하고 살다가 상식으로는 해결 안 되는 매우 처참한 상황에 이를 때가 많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한계 상황에 부딪힐 때도 있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다. 이 말은 우리가 계룡산이라도 올라가 '무슨 특별한 계시를 받으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간섭과 말씀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도우셔야만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엎드려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이 무슨 말씀하시는지 기다려야 하고, 그 말씀을 의지하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영성이다.

또 한 가지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하나님은 역사를 진행하시되 언제나 그의 백성 중심으로 끌어가신다는 것이다. 사실 '유라굴로' 광풍 중에서 꼭 살아나야 할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다. 누구인가? 로마에 가서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할 바울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만 살리신 것 아니라, 그와 함께 한 모든 자를 다 살려주셨다. 즉 바울 때문에 그 배에 탄 모든 사람을 살리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이 어느 때 보다 중요한 시기에 와 있다. 한국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는 믿는 자들의 삶에 달려 있다. 우리 민족이 사는 길은 오직 한 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나는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살아나면 이 민족은 자연히 우리와 같이 살게 된다. 그 길밖에는 없다. 그래서 이 민족이 교회를 향하여 “너희 때문에 우리가 살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한국의 가장 큰 자산이다

   
 

그동안 우리는 지나치게 정치와 경제인의 손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왔다. “아무개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는 잘 살 것이다” 선거 때만 되면 우리는 흥분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시간이 지나 결과를 보면 언제나 대통령 측근의 몇 사람 외에는 아무도 덕을 본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미래는 결코 힘 있는 몇 사람의 정치인, 경제인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그들에게 얼마나 속았는데 또 그들 손에 한국의 미래를 맡기겠는가? 나는 누가 뭐래도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한국의 가장 큰 재산이라고 믿는다. 구한말 쓰러져 가는 조선의 미래가 소수 기독교인들의 손에 있었던 것 같이 21세기 한국의 미래도 그들 손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먼저 수직적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하고, 깨달은 후에는 그 말씀을 가지고 살아야 하고, 그 후에 다른 사람에게 외치는 일이 필요하다.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을 것이다”(행 27:22).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울처럼 이렇게 세상에 나가서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안심을 주고 위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 막연하게 “염려하지 마세요. 앞으로 잘 될 거예요!”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세상 사람들도 그 정도는 다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메시지가 필요하다. 광풍이 불어 닥치는 컴컴한 죽음의 바다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바울처럼 우리도 매일 매일 당하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매일의 기도 중에 깊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 깨달음이 우리에게 먼저 주어지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면 우리 민족은 반드시 살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은 전 세계를 섬기는 큰 일 하는 민족으로 세워질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절대 자유

유라굴로 광풍 사건이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하나님의 백성은 잠시 어려운 고난 중에 매이고 고통을 당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광풍 속에 매어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광풍 속에서도 매이지 않고 그에게 수직적으로 임하여 그를 통해 수평적으로 증거되고 있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온 땅에 통하고 세계 끝까지 간다(시 19:4). 구원의 여망이 사라지고 죽음의 순간이 다가온 칠흙같이 어두운 지중해 한 복판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바울을 찾아왔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안에도 매이지 않고, 신학적인 도그마에도 매이지 않고, 설교자나 그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절대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 말씀은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의 현장으로, 죽어가는 자의 병상으로, 우리 민족의 절반이 사는 북녘 땅으로도, 미전도 종족을 향하여서도 어디든지 자유롭게 가게 된다. 무엇인가에 매어 있는 말씀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인간의 언어일 뿐이다. 사도 바울은 그 캄캄한 밤, 모두가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배 위에서 “안심하라 너희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 배에 탄 사람 모두를 죽이려고 몰아치는 광풍의 위력 앞에 그는 굴하지 않고 사람들을 축복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겼다. 그는 무엇에도 결코 메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도 바울은 절대 자유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평생 증거하며 살다가 그가 자신의 생을 마감할 때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되었다. “내가 복음 때문에 죄인처럼 메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메이지 않았습니다”라는 고백이었다(딤후 2:9). 그는 선교의 현장에서 수없이 많은 투옥의 경험을 했지만 그 감옥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오히려 전혀 매이지 않고 엄청난 장벽을 넘어가는 것을 너무 자주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가끔 우리는 “예수 믿고 한 번 부자가 되어 잘 살아봅시다!”라고 하면서 전도한다. 이것은 정확한 메시지가 아니다. 이런 식의 전도는 더 이상 해서는 안 된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믿는다면 이건희 씨 같은 부자는 예수가 절대로 필요 없는 사람이다. 죽을 때까지 지겹도록 부자로 살아 왔는데 뭐 얼마나 더 잘 살겠다고 예수를 믿겠는가? 우리가 혹시 이건희 씨 같은 부자에게 전도하기를 원한다면 “이제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예수 믿고 제대로 인생을 사셔야지요!”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 주변 에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그에게 그렇게 전도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예기는 듣지 못했고, 그는 예수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하고 가 버린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경제인으로서 그의 화려한 인생에 대해 '한국을 먹여 살렸던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의 죽음을 보면서 “그가 마지막 순간에 얼마나 쓸쓸한 고독과 슬픔을 느꼈을까”를 생각해 본다. 아마 그는 세상을 떠나던 그 밤에 그가 그렇게 귀하게 여겼던 모든 것이 “실제로는 별것 아니구나”라는 고백을 하고 세상을 하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 나는 바울의 삶을 통해 그것을 발견한다. 바울의 삶을 정리해본다면 그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배에 태워져 끌려가다가 항해 중에 광풍을 만나게 되었고, “이제는 마지막이구나”라고 할 수 있는 최후의 순간까지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 누구에게도 원망하지 않았다. 또한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그 순간에도 생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영적 민감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도 살고 주위의 모두를 살려내는 축복의 말씀이었다. 애매하게 고난 받으며, 원치 않는 광풍이 노도같이 달려들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바울의 믿음은 광풍에 씻겨 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빛이 났던 것이다.

만일 어려움이 조금씩 찾아올 때마다 우리의 믿음이 조금씩 씻겨 내려간다면 인생 마지막에는 다 쓸려나가고 우리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신앙인은 고난을 피해 가는 사람이 아니다. 또한 고난이 면제된 사람도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 탔던 배에도 여전히 광풍은 불었으며, 그가 가는 곳마다 고난은 예외 없이 그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광풍이 왔다 가고, 시련의 바람이 불었어도 바울의 믿음은 약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굳세어졌다. 또한 위기의 때에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도 일어나고, 남도 살리는 삶을 살게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대로 사는 길이며 기독교 영성이 추구하는 바른 길이다.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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