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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부르짖는 기도(1)

기사승인 2021.08.19  13:3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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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훈 교수의 기도 본문 해설

김정훈 교수 / 영국 글라스고(Glasgow) 대학교 신약학 박사, 백석대학교 신약학 은퇴 교수, B and C Mission Center 현대표
 

   
김정훈 교수

 다윗의 기도(3)(시 51:1-19)

 이 시편은 다윗이 지은 시편으로, 전체 150개의 시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일곱 개의 회개시 중의 하나다(나머지 여섯 개는 시편 6, 32, 38, 102, 130, 143편). 다윗은 자신이 범한 죄 앞에 정면으로 마주 서서 죄의 끔찍한 결말을 절감하면서,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회개하며 하나님께 구원을 부르짖는다. 다윗은 자기의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고 자신의 뼈와 영혼이 전율하는 것을 느꼈다(시 6:1-2).

오늘날 인간의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인식하더라도 죄를 아주 가볍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가 인간을 얼마나 비극적으로 만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비극이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잔학무도한 범죄들이 다반사로 발생할 뿐 아니라 탄식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거의 속수무책이다. 법(法)은 최소한 피해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해야 하나 오히려 피해자를 사지로 몰기도 한다. 소위 법기술자들의 사법적 판단은 사람들의 보편적 법의식과 동떨어질 때가 많아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기기도 한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저 유명한 다윗의 회개시는 우리에게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회개가 얼마나 긴급한 것인지 일깨워 준다.
 

1) 기도의 정황

시편 51편의 배경에 대해서는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라는 표제가 충분한 암시를 준다. 어떤 학자들은 다윗의 저작권도 부인하며 이 표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나 설득력이 별로 없다.

표제 내용을 신뢰하는 한, 이 기도의 배경을 다윗의 범죄 행위(삼하 11장)와 그 행위에 대한 나단 선지자의 책망(삼하 12장)에서 찾는 것이 당연하다.
 

(1) 다윗의 범죄(삼하 11:1-27)

   
 

다윗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백향목 궁을 지은 후 성전건축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계획을 승인하지 않으셨다. 대신 하나님은 그에게 소위 “다윗 언약”이라 불리는 언약과 함께 그와 그의 후손에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까지 내다보는 장대(長大)한 언약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따라 다윗에게 복을 주셨고 그가 통치하는 이스라엘을 여러 주변국 가운데서도 강대한 나라로 우뚝 세워 주셨다. 다윗은 주변국들과 전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직접 출전하지 않고 왕궁에 머물며 낮잠을 청할 수 있을 만큼 안정된 세월을 보낼 수 있었다(삼하 11:1-2).

하지만 우리는 안락할 때 영혼의 잠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다윗에게서 얻게 된다. 다윗은 부하들이 전쟁터에 나간 어느 날 늦은 오수(午睡)에서 깨어나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이웃집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삼하 11:2). 다윗의 눈에 그 여인은 심히 아름답게 보였다. 그녀는 다윗의 시각을 자극하였고, 다윗은 마음에 이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사람을 시켜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였다. 그녀는 엘리암의 딸이며,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다. 이방 민족인 헷 족속은 본래 함(노아의 아들)의 아들들 중의 하나인 가나안의 둘째 아들 헷의 후손들이다(창 10:6, 15; 대상 1:13). 이들은 B.C. 2000년경 소아시아에 도시 국가를 건설한 인도-유로피안 족속들로 알려져 있고, B.C. 1800년경에는 지금의 터키 지방에 헷 제국을 건설한 족속들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보다 먼저 가나안 땅에 들어와 주로 헤브론과 중앙 산지를 거주지로 삼고 살았다.

음욕이 발동한 다윗은 전령을 보내어 밧세바를 자기에게 데려오게 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월경을 마치고 목욕을 한 것(“부정함을 깨끗하게”[4절]. 참조. 렘 15:19-24)을 확인하고는 그녀와 동침하였다. 이 행위는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은 왕의 지위를 이용하여 밧세바를 강간하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것이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다윗이 왕의 지위에 있었으니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이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다윗은 나단의 신탁을 통해 받은 하나님의 약속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자체 그분의 큰 뜻이 담긴 명령 또는 법규와도 같은 것이었다. 더구나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왕조를 견고히 세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실 때 그것은 단순히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하나님의 복된 약속을 받고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삼하 7:19)라고 고백할 때, 이는 하나님이 자기 왕조를 통해 영원한 제사장 나라를 성취하시려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가슴 깊이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윗은 사람이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이해하고 그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사람의 대강령(大綱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그가 순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자기 부하의 아내를 강간하였다는 것은 자기를 통해 위대한 일을 이루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숭고한 뜻을 발로 차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이렇게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이해하고 흠모하면서도 자기의 욕정을 채우기 위해 그분의 뜻을 내동댕이쳐 버릴 수 있는 부패한 존재다. 로마서 7장에 진술된 바울의 고민이 바로 이러한 인간 자아의 분열에 관한 것이 아닐까?

다윗의 범죄가 더 심각한 것은 범죄 행위를 멈추지 않고 매우 계획적으로 더 전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죄악된 일을 계획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처럼 사악한 행위는 없다. 다윗과 동침한 밧세바는 바로 임신하였다. 그녀는 사람을 보내어 다윗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다윗으로서는 이 사실이 드러날 경우 여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언약궤를 모실 성전건축의 열망을 드러내며 가장 경건하고 하나님의 율법에 가장 충실한 자처럼 행세하며, 백성의 추앙을 받고 있는 왕이 남의 아내를 강간하고 임신시켰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스스로 실추시키는 행위였다.

다윗은 자신의 악행을 은폐하려고 강간 못지않은 악독한 음모를 꾸몄다. 그는 전장(戰場)에 나가 있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에게 복귀 명령을 내렸다. 다윗의 계산은 그로 자기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게 하여 태어날 아이가 그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윗은 우리아에게 전장의 상황을 두루두루 묻고는 집으로 내려가서 쉬라(“발을 씻으라.” 8절)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다윗의 부하들과 함께 잠을 잤다(9절). 이는 다윗의 음모가 불발된 것을 의미한다.

다윗은 우리아가 취한 행동에 대해 소문을 들었다. 불안한 다윗은 우리아를 다시 불러 왜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이에 우리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얼마나 충직한 군인인가! 우리아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전쟁터 나가 있는 것과 남북 연합부대(이스라엘과 유다)가 큰 전쟁을 치르며 야영하고 있는 것, 총사령관 요압 장군과 왕의 부하들이 찬 바람 부는 거치른 들판에서 진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집에 가서 편히 쉬고 맛 있는 음식을 먹으며 아내와 동침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아 타입의 군인은 다윗으로서는 가장 필요하고 신뢰할 만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죄는 회개하지 않는 한 또 다른 죄를 잉태한다.

다윗은 우리아의 충직을 칭찬하기는커녕 자신의 범행을 감취기 위해 또 다른 음모를 꾸몄다. 다윗은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 장군에게 보냈다. 그 편지는 사실 그의 생사를 가를 무서운 편지였다. 다윗은 잔인하게도 우리아의 목숨을 끝장낼 명령을 써서 그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냈던 것이다. 편지의 내용은 우리아를 가장 치열한 격전지 최전방으로 보내 그로 맞아 죽게 하라는 것이었다. 다윗은 하나님 섬김의 외적 경건과 하늘까지 높아진 명예, 사람들의 극진한 존경의 가림막 뒤에서 잔학하기 그지없는 살인을 계획하고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의 친서를 요압은 우리아에게 한 마디도 묻지 않고 그를 최전선에 보내어 전사하게 하였다. 우리아는 자신이 얼마나 억울하고 처참한 죽음을 죽는 줄도 모르고 목숨을 잃었다. 아마도 우리아가 다윗에게 소환되어 갔을 때 다윗 앞에서 보인 충직성은 그가 소환되기 전 요압 장군 곁에 있을 때도 일관성 있게 보여주었을 것이다. 아마도 요압은 우리아에게 필경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며 우리아는 결코 왕 앞에서 죽음에 이를 만한 죄를 지었을 리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왕과의 충돌을 피하고 왕의 명령을 무조건 이행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한계를 본다. 후에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가서 그의 잔학한 행위를 지적하기 전에 요압이 왕의 명령 수행을 일단 보류하고 정확한 진상 파악을 위해 노력했더라면 하는 비통한 아쉬움이 남는다.

요압은 전령을 다윗에게 보내어 왕의 부하들 몇 사람이 죽었다는 전장 상황을 보고하면서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다고 보고하였다(24절). 이에 다윗은 칼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이 사람 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다고 태연하게 말하면서 더욱 힘써 싸워 적군의 성을 함락시키라고 독려하였다. 우리아의 전사 소식은 그의 아내 밧세바에게도 전해졌다. 그녀는 소리 내어 슬피 울며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마친 후에 다윗은 그녀를 왕궁으로 불러 자기 아내로 삼았다. 이때 다윗의 양심 상태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일단 모든 일이 다윗의 완전범죄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윗이 사람을 속일 수는 있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27절 하). 하나님은 다윗의 겉모습 뒤에 숨겨진 흉포한 마음과 더러운 음모를 꾸미고 있는 부패한 뇌, 살갗 밑에 가려진 가증한 위장(僞裝)을 보고 계셨다. 다윗의 죄는 사람에 대한 것이기 이전에 하나님께 대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의 범행을 보고 계셨고 또한 악하게 여기셨다.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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