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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보다 더 큰 절망”

기사승인 2021.10.28  15: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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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동섭 교수의 잠언의 영성 5

방동섭 교수/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역임, 글로벌 비전교회 담임
 

   
▲ 방동섭 교수

잠언을 묵상할 때 그저 “좋은 말씀이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다!”라고 하면서 쉽게 넘어가면 안 된다.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에 경청하고 그 초대에 응해야 한다. 잠언 기자는 많은 사람들이 ‘지혜’가 “불러도 듣기 싫어하며 손을 내밀어도 돌아보지 않는다”고 하였다(잠 1:24). 사람들이 ‘지혜의 초대’를 거절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찾을 수 있다.

어떤 임금이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였지만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의 밭으로 일하러 가고, 하나는 자신의 비즈니스를 위해 갔다”고 하였다(마 22:5). 그들이 임금의 초대를 거절한 이유는 단순하다. 자기 일에 분주하기 때문에 초대에 응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끝없이 밀려오는 일들에 노예가 되어 살고 있기에 ‘하나님의 지혜의 초대’에 응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에 사탄은 사람들을 넘어뜨리게 하기 위해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기회도 없이 그저 이 일 저 일로 바쁘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너무 바빠 때로 연로하신 부모가 고독하게 죽어가도, 또 자녀들이 사춘기에 방황하며 죽어가도 돌아볼 겨를이 없이 만드는 것이 사탄의 전략이다. 더 나아가 인간의 본분이라고 할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의 말씀을 따르는 일은 사는 동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하고 어느 날 자신의 인생이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다.

인생의 토네이도

   
 

잠언은 ‘지혜의 초대’를 거절하며 사는 자들에게는 ‘엄청난 재앙과 두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은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같이 임하겠고, 너희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는 근심과 슬픔이 임할 것”이라는 하신 것이다(잠 1:27). ‘지혜의 초대’를 거절하며 사는 인생에 미치는 재앙은 마치 미국 중남부 지방에서 갑자기 불어오는 ‘토네이도’(tornado)와 같다. ‘토네이도’라는 단어는 라틴어 '토나레‘(tornare)에서 유래한 것으로 ’돈다‘는 뜻이다. ‘토네이도’(tornado)는 바람이 나선형으로 돌면서 강하게 공중으로 올라가는 가늘고 긴 깔때기 모양의 ‘회오리바람’을 뜻한다.

토네이도는 태풍과는 달리 바람의 수평방향의 규모보다는 수직방향의 규모가 훨씬 크다. 이러한 ‘토네이도’가 불어오면 그 지역의 모든 것이 순식간에 다 쓸려가는 것이다. 나무, 집, 자동차 모든 것이 바람에 휩쓸려 마치 전쟁의 참화가 지나간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고 초토화되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1931년 미국 미네소타주에서는 이 ‘토네이도’ 바람이 117명을 실은 83톤의 객차를 갑자기 공중으로 감아올렸다고 한다. ‘토네이도’는 인생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쓸어갈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의 초대’를 거절하며 사는 자들에게는 엄청난 재앙이 ‘토네이도’처럼 인생에 불어 닥칠 수 있는 것이다.

절망보다 더 큰 절망

그러나 잠언은 인생이 이런 어려움에 직면하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재앙보다 더 큰 재앙’은 인생이 재앙을 만나고 두려운 일을 당하면 누군가 구조하기 위해 달려와야 되는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또 주변에 도와줄 수 있는 자가 없는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누구에게나 절망스러운 일을 당하여 결정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때에 그 누구도 그를 도와줄 수 없다면 그것은 그가 직면하고 있는 절망스러운 일보다 더 큰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것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혜의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이 이런 재앙을 만나게 될 것을 경고해주시고 있다. 하나님은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을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잠 1:26).

시편에는 하나님에 대해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하였다(시 46:1).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사람들이 재앙을 만나고 두려운 일을 만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그저 비웃고 계시는 것인가?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비웃고 외면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지혜의 초대’를 거부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 큰 문제는 그러한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너희 인간들아! 너희가 그렇게 똑똑하고 잘났으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보라”고 비웃는 것이다.

잠언이 보여주는 ‘지혜’는 인생이 직면하게 되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도움을 주기 위한 모든 해결책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을 거부한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해결책 모두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약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신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핵심을 보여주는 것이며,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완전한 길이며 최후의 길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그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요 14:6).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예수님을 거절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제공하신 최후의 살길을 거절한 자에게 하나님이 도울 수 있는 길은 더 이상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심판이 기다릴 뿐인 것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이 세상 모든 일에는 때가 있음을 모르는 자들은 없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믿는 것도 때가 있는 것이다. 성경은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하였다(전 12:1). 인생이 모든 여정을 끝내고 죽기 전까지는 기회가 있지만 특히 젊을 때 그 기회는 강하게 찾아오는 것이다. 잠언은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의 초대’를 거절하고 때를 놓쳐버린 사람들이 나중에 그 ‘지혜’를 찾는 것은 너무 늦을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에는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라”고 하신 것이다(잠 1:28).

그렇다면 왜 하나님 그들을 이렇게 외면하시는 것인가? 그들이 “지식을 미워하고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그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그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잠 1:29-30). 다시 말하면 그 원인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기회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기회를 그들이 거절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 스스로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을 멸시하고 때로 그에게 주시는 책망도 거절하면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그러한 기회를 거절하는 자는 그 모든 책임에 대해서도 스스로가 담당해야 하는 것이다.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부모가 자녀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자녀들에게 많은 것을 주는 것보다도 그들이 절망스러운 일을 당했을 때 절망을 뚫고 일어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다. 자기를 돌보아 주던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더 이상 의지할 소망이 없는 절망의 상황에서도 자녀들이 이 세상 한복판에 당당하게 서 있기를 원한다면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반드시 해야될 것이 있다. 그것은 자녀들이 절망 속에서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다(시 49:15). 의지하던 모든 것이 다 사라진 그 절망스러운 시간에 그가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수 있는 있다면 그는 진정한 축복을 받은 것이다.

잠언은 어리석은 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지혜’를 거절하고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잠 1:32). 그러나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고 하였다(잠 1:33). 여기 ‘나를 듣는 자’라는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지혜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그가 제공하신 해결책을 수용하는 것을 뜻한다.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지만 잠언은 ‘진정한 축복’은 고통이나 어려움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통의 한복판에서도 ‘평안’을 누리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고통의 한복판에서 ‘평안’을 누리는 길은 하나님께서 제공해주신 ‘지혜의 초대’를 전적으로 수용하고 인정할 때 찾아오는 것이다.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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