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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의료 선교사, ‘다말 드류’(2)

기사승인 2024.03.22  14: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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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은수 교수의 역사 현장 탐방

최은수 교수/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Ph.D), IME Foundation 이사장, 아르메니아 조지아 연구소(AGSI)와 남장로교 연구소(SPSI) 대표
 

최은수 교수

알렉산드로 다말 드류(Alessandro Damar Drew, 유대모) 의사 선교사는 미 남장로교회가 최초로 파송한 의료선교사였다. 필자가 ‘최초의 의료 선교사, 다말 드류’(1)를 통해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공개하면서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왔다. 드류 선교사에 대하여 연구를 위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명확한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가운데 다양한 추측들이 있어 왔던 것이 현실적인 한계였다. 이 글 이후에, 필자는 드류 선교사의 해외 독립 유공자 선정을 위한 연구들을 통하여 영국 잉글랜드의 케임브리지 대학과 버클리 대학 등을 다니면서 관련 자료들을 찾아 공개해 오고 있는 중이다. 이번 글을 통해서는 그동안 잘못 알려져 왔던 사실들을 바로잡고, 새롭게 드러난 내용들에 대하여 나누고자 한다.
 

첫 번째로, 부친 토마스 드류 목사는 영국 잉글랜드에서 정통 감리교회(The Primitive Methodist Church) 목사로, 미국으로 이민온 후에는, 미 남장로교회 목사로 72년 동안 사역했다. 드류 선교사는 부친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부친 토마스 드류 목사(Rev.Dr. Thomas Milton Damar Drew, D.D.)

이같은 사실은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다. 영국 잉글랜드에서 정통감리교회가 소수 교파 중 하나였기 때문에, 여타의 소수 교단 출신 목사들처럼, 토마스 드류 목사도 신대륙으로 이주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미 남장로교회로 교단을 변경하였다. 사실, 영국 잉글랜드의 청교도는 90%이상이 장로교도였기 때문에, 그런 배경에서 자라고 사역했던 목회자들이 미 남장로교회로 이동하는 것이 전혀 생소한 일은 아니었다.
 

두 번째로, 드류 선교사가 군산을 호남 복음화의 전초기지로 강변한 배경에는, (1) 그가 영국 잉글랜드의 채널 아일랜드의 섬들중 하나인 건지섬(Isle of Guernsey) 출신이며, (2) 이민 온 버지니아주 멕클렌버그 카운티가 호수, 강, 바다를 끼고 있는 지리적 환경, 그리고 (3) 한국과 호남 지리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실제적으로 가장 탁월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드류 선교사의 파송 교회와 고향 교회들을 밝혀낸 것이다.
 

드류 선교사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 연관된 교회들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최근에서야 필자는 드류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가 체이스 시티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Chase City, VA)라는 점과, 그의 가족과 긴밀하게 연결된 교회가 클락스빌 장로교회(Clarksville Presbyterian Church, VA)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드류 선교사는 1893년에 체이스 시티 장로교회에서 미 남장로교회 최초의 의료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미국으로 이민 온 드류 선교사의 가족이 정착한 곳은 체이스 시티였고, 당시에 부친 토마스 드류 목사가 이 두 교회를 동시에 담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교회들이 드류 선교사의 고향 교회였다. 이 두 교회 역사에서 부친 토마스 드류 목사는 가장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목회자였다.
 

드류 선교사는 고향에서 알렌(Allen) 또는 알리(Alli)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존경받는 목사의 아들로 성장하였다. 부친 토마스 드류 목사는 클락스빌 장로교회(The Clarksville Presbyterian Church)의 담임목사로 사역하면서, 현재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클락스빌 장로교회도 드류 선교사 가족과 깊은 유대를 형성하던 고향 교회였다. 드류 선교사는 고향에서 성장하면서, 1875년에 모친인 앤 드류가 급작스럽게 죽었던 일과, 1880년에 여동생 아넷이 죽었고,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여동생 에바를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드류 선교사의 고향인 체이스 시티에는, 미 남장로교 교단 전체에서도 명망이 대단했으며, 버지니아주에서도 존경을 받았던, 부친 토마스 드류 목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드류 길(Drew Street)과, 여동생 호르텐스의 교육과 각 분야에 미친 영향력을 기념하는 호르텐스 길(Hortense Street)이 있다.
 

필자와 교류 하고 있는 체이스 시티 장로교회의 필리스 요크 장로와 클락스빌 장로교회의 린다 풀리암 장로 모두 이같은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현재 체이스 시티 장로교회는 교회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상태이며, 반면에 클락스빌 장로교회는 매우 활동적이며 흥왕하고 있는 중이다. 이 두 교회가 극명하게 대별되는 것이 흥미롭다.

   
부친 토마스 드류 목사가 건축한 클락스빌 장로교회

네 번째로, 1902년에 안식년차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드류 선교사는 간절하게 고향으로 가고 싶었던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다.
 

기록에 의할 것 같으면, 드류 선교사는 천신만고 끝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은 하였지만,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만큼 병세가 위중하였다. 그는 체이스 시티와 클락스빌의 고향 교회에서 목회하던 부친 토마스 드류 목사에게 요청하여 자신이 갈 수 없으니 대신 방문해 달라고 간절히 청하였다. 하지만, 당시 부친 토마스 드류 목사는 교회 사역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일들이 산적해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만큼 드류 선교사의 상태가 심각하였다.
 

다섯 번째로, 1903년에 부친 토마스 드류 선교사는 또 다시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아들 드류 선교사를 만나기 위해 오클랜드 셋집을 방문하였다.
 

미국으로 안식년 차 귀국한 후에도, 드류 선교사는 건강이 악화되어 고향을 방문할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 부부와 오클랜드 셋집에서 함께 생활할 무렵인, 1903년 10월 25일 어간에, 드류 선교사는 삶과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 정도로 위중한 상태에 있었다. 부친 토마스 드류 목사처럼 온몸을 불태워 사역을 펼쳤던 드류 선교사의 건강이 한계에 다다랐던 것이다. 아들인 드류 선교사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재차 전해 들은 부친 토마스 드류 목사가 버지니아주 멕클렌버그 카운티의 체이스 시티에서 출발하여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셋집까지 대륙을 횡단하는 고단한 여정을 거쳐서, 77세의 노구를 이끌고 몸소 방문하였다. 이미 가족중 부인을 비롯하여 두 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던 부친 토마스 드류 목사는 장남인 드류 선교사마저 사경을 헤메게 되자, 만사를 제쳐두고 먼 길을 달려왔던 것이다.
 

여섯 번째로, 드류 선교사 가족은 1908년 6월 15일에 학수고대하던 고향 교회들을 방문하였고, 파송교회인 체이스 시티 장로교회에서 뒤늦은 선교보고를 하였다.

   
1893년 드류 선교사를 미 남장로교회 최초의 의료 선교사로 파송한 체이스 시티 장로교회

드류 선교사는 선교보고를 통해서, 한국을 ‘떠오르는 태양의 땅’이라고 소개하였고, 한국의 군산에서 수많은 고난과 환난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잘 극복할 수 있었다고 간증하여 큰 감동을 주었다. 드류 선교사는 한국에서 가져온 다양한 물품들을 전시하여 교회당을 가득메운 청중들로부터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일곱 번째로, 드류 선교사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박물관에 한국에서 가져온 42개가 넘는 동전들과 한국어로 쓰여진 마가복음서를 기증하였다.
 

여덟 번째로, 드류 선교사와 부인 루시 드류 선교사 모두 자신들의 시신을 의학의 발전을 위해서 해부학용으로 기증하였다.
 

필자가 이전에 쓴 글을 통하여, 드류 선교사 부부가 당시에 흔하지 않았던 화장을 택하여 먼지가 되어서라도 군산 선교지로 날아가고 싶은 간절함을 눈물로 기술한 바 있다. 최근에 필자는 관련 문서들을 뒤지다가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드류 선교사 부부는 단순히 화장만 한 것이 아니라, 의학의 발전을 위해서 해부학용으로 자신들의 시신을 기증함으로 이땅에서 마지막까지 전부를 나누었다. 이 사실에 직면한 순간, 필자는 생각이 멎어 버리고 충격의 파고가 거침없이 밀려드는듯 그냥 굳어 버렸다.

미국에서 시신 기증에 대한 인식이나 제도가 1960년대나 되서야 정비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드류 선교사 부부의 시신 기증은 시대를 훨씬 앞서가는 거의 독보적인 행보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 미국에서 1920년대와 1930년 어간에 의학용 시신이 부족하여 각 의과대학들마다 고충이 이루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당시 해부학용 시신은 가족을 찾을 수 없는 무연고자, 부랑자, 정신병자, 노숙자 등의 것들이 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품귀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사실에 입각해 볼 때, 전문직 종사자이면서 엄연히 가족들이 있었던, 드류 선교사 부부의 시신 기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파격적인 헌신이었다. 드류 선교사 부부는 이땅에서 자신들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고 떠났던 것이다. 아울러, 드류 선교사 부부의 시신은 의학의 발전을 위하여 사용 된 후, 화장하여 재의 일부를 바다에 뿌림으로 흘러흘러 군산으로 가고자 하는 염원을 실현하였고, 먼지가 되어 바람에 날려 군산으로 가고자 하는 평생의 소원도 이루면서, 그 일부가 오클랜드 추모관에 안치되어 있는 것이다.
 

   
영국과 미국에서 72년 동안 목회하다 97세에 별세한 부친 토마스 드류 목사

필자는 드류 선교사를 연구하면 할수록 새로운 사실들이 충격적으로 드러나서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설레인다. 요즘 필자는 드류 선교사가 아프리카의 탐험가요 의사 선교사였던 데이빗 리빙스턴과 너무나도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리빙스턴처럼, 드류 선교사도 서양 의술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한국과 호남의 지리에 대한 이론적 지식도 탁월하고, 실제적 경험도 풍부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2024년 올해 12월 11일이면 드류 선교사의 98주기가 된다. 필자는 드류 선교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드류 선교사 98주기 기념 예배가 엄숙하게 드려지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바이다. 아울러 가칭 ‘드류 박사 기념 사업회’(Dr. Drew Memorial Society)가 결성되어 그의 숭고한 삶과 신앙이 현재와 후대에게 전달되어 계승 발전되기를 일심으로 염원하는 바이다.

 

최은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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