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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내한 셀리나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와 배 선 여사

기사승인 2024.03.25  11: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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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은수 교수의 역사 현장 탐방

최은수 교수/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Ph.D), IME Foundation 이사장, 아르메니아 조지아 연구소(AGSI)와 남장로교 연구소(SPSI) 대표
 

최은수 교수

미 남장로교회가 1892년에 한국선교를 결정하고 7명의 개척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그들 가운데 가장 먼저 한국에 내한했던 선교사가 셀리나 리니 풀커슨 데이비스(Selina Linnie Fulkerson Davies)였다. 독신 여성 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았던 셀리나 리니 데이비스는 작은 아버지인 제임스 알리슨 데이비스 목사의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사역을 모델로 삼아 선교의 현장에서 온몸을 불사르는 사역을 펼쳤다. 필자가 데이비스 선교사의 가정적, 신앙적, 선교적 동기에 대한 글을 발표한 이후, 다양한 형태의 반향들이 일어나서 큰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이 글은 데이비스 선교사의 사역이 미국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함이다.
 

배 선 여사는 누구인가?

   
셀리나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이채연 부인’, 즉 ‘Mrs. Ye’라고 알려진 여성이었는데, 일반 역사에서도 많은 부분이 여전히 베일에 싸여진 상태로 연구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더군다나 미 남장로교 파송 최초의 내한 선교사인 셀리나 리니 데이비스와의 구체적인 관계는 사실상 처음 소개되는 것이다. 이채연은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의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제4대 공사를 역임하였던 인물이다. 한국으로 귀임 후에는 지금의 서울특별시장의 직책인 한성 판윤으로 봉직하였다. 이채연이 미국 외교가에 등장한 시점에 동행한 부인이 성주 배 씨였다. 이채연의 부인 배 선 여사(Mrs. Ye Cha Yun)는 미국에서 ‘이화선’이라는 사내아이를 출산하였는데, 두 달이 조금 지나서 질병으로 죽었고, 워싱턴 근교에 안장되었다. 미국의 속지주의에 입각하여 ‘이화선’은 출생과 동시에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고, 미국 역사상 한인으로는 ‘최초’였다. 죽은 아이의 이름이 ‘이화선’인 것을 볼 때, 모친인 배 선(Mrs. Shon Ye Bae) 여사의 ‘선’을 따서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채연 서리공사(좌측), 이채연의 부인 배 선 여사(두 명 중 오른쪽)

셀리나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의 미국 사역
1892년 7월경, 데이비스 선교사는 이미 파송이 확정되어 출발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던 현직 선교사였다. 이채연의 부인인 배선 여사가 미주 한인 최초의 세례 교인이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알만한 사람은 알 수 있는 정도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었는지조차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인 것도 부인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배 선 여사가 워싱턴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버지니아주의 시골 도시인 살렘(Salem)까지 와서 살렘 장로교회를 통하여 세례를 받게 되는 모든 과정과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가 주도하여 결실을 맺었던 것이 그녀의 ‘선교 사역’이었다는 점은 최초로 밝혀진 것이다. 한국 선교지 현장에서 본격적으로 사역하기 이전에 셀리나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는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구령의 기쁨을 체험하였다. 데이비스 선교사가 경험한 선교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셀리나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가 이채연 서리공사와 그의 아내 배 선(Mrs. Shon Bae Ye) 여사를 버지니아주 살렘(Salem)으로 오게 했다는 사실이다.

배 선 여사가 미주 한인 최초의 세례교인이라는 사실을 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하필 버지니아의 시골 마을인 살렘?’ 이라고 의구심을 표해 왔다. 기록에 의할 것 같으면, 미 남장로교회가 한국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한 7인의 개척 선교사들의 신상을 워싱턴 주재 공사관에 제출하였고, 서리공사로 재직 중이던 이채연이 자신의 아내인 배 선 여사와 관련하여 의논할 일이 있어서 데이비스 선교사를 워싱턴으로 초청했었다. 남녀유별이 분명했던 한국적 상황에서 한국으로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던 데이비스 선교사가 배 선 여사와 관련된 일을 의논하고 협력을 구하는 데 있어 가장 확실한 적임자라고 외교관 부부는 생각하였던 것이다. 지혜롭고 총명하며 선교적 열정이 탁월했던, 데이비스 선교사의 명망에 대하여 그들 또한 전해 들었을테니 말이다.
 

데이비스 선교사와 이채연 부부가 상호 연락을 취하면서 그 부부는 어느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는 마음이 비밀, 즉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진심을 데이비스 선교사에게 드러내 보였음이 확실하다. 언뜻 보기에는, 이채연 서리공사 부부의 워싱턴 방문 초청에 대하여 데이비스 선교사가 개인 용무를 이유로 거절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부부와 더불어 기독교 신앙과 연관된 대화를 충분히 하면서, 데이비스 선교사는 세간의 주목을 덜 받는 살렘(Salem)으로 그 부부를 인도하려고 이런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데이비스 선교사와 이채연 부부 모두 살렘으로 갈 만한 충분한 구실이 마련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이채연 서리공사와 부인 배 선(Mrs. Shon Bae Ye) 여사는 당시 일본 공사관 서기관으로 봉직하던 사토로부터 동양인들에게 호의적인 로어노크 대학(Roanoke College at Salem)에 대하여 긍정적인 정보를 듣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무렵에 로어노크 대학의 총장인 줄리우스 드레허(Julius Dreher)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그가 일부러 한국 공사관을 찾아와서 동양 학생들에 대한 큰 관심과 유학에 대하여 적극성을 보이며 이채연 서리공사 부부의 방문을 제안했었다. 이 정도 명분이면 아무런 의심도 없이 이채연 부부가 살렘을 방문하여 로어노크 대학도 방문하고, 시 관계자와 주민들도 만나고, 궁극적으로는 데이비스 선교사와 만나서 원래의 방문 목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데이비스 선교사 본인이 직접 살렘 장로교회를 통해서 이채연 서리공사의 부인 배 선 여사가 비밀리에 세례를 받도록 모든 준비를 했다는 사실이다.

   
버지니아주 살렘 장로교회

당시 한국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선교의 결실들이 맺어지고는 있었으나, 국가적으로는 여전히 유교와 민간차원의 불교 등이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채연 서리공사와 배 선 여사는 외래 종교인 기독교 신앙을 빌미로 정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인식공격을 가해 올 것에 대하여 깊이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채연 서리공사 부부는 데이비스 선교사의 안내에 따라서, 공식적인 일정을 표면상 내세우며, 세례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공식화 하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이 모든 과정이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채연 서리공사와 배 선 여사 부부는 1892년 7월 7일 목요일부터 7월 14일 목요일까지 일주일 간 살렘(Salem)과 로어노크(Roanoke) 등 주변 지역을 방문하였다. 배 선 여사(Mrs. Ye Cha Yun) 부부는 살렘에 있는 루체른(Lucern) 호텔에 데이비스 선교사와 더불어 머물렀다. 이 부부는 데이비스 선교사가 아빙돈(Abingdon)에서 살렘까지 오는 교통비와 체류비 등 모든 비용을 부담하였다. 배 선 여사 부부는 표면적으로 로어노크 대학 방문, 시 관계자 만남, 그리고 주변 지역 탐방 등 공식일정을 소화했다.
 

그러는 사이에 데이비스 선교사는 배 선 여사 부부가 살렘까지 오게 된 원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배후에서 치밀하게 움직였다. 이채윤 서리공사 부부와 충분한 대화를 나누었던 데이비스 선교사는 1) 워싱턴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해리슨 부부가 다니던 언약장로교회를 통하여 배 선 여사가 공식적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경우, 미국의 모든 언론에 쉽게 노출되고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되는 위험 부담, 2) 공식적으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한국에 알려졌을 때, 이채연 서리공사 부부가 받게 될 정치적, 관습적 비판에 대하여 깊이 유념하고 있었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살렘이 워싱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외진 곳이고, 주요 신문 기자들이 여기까지 와서 취재하기는 쉽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비밀보장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당시 살렘 장로교회의 담임이었던 브릿지(J.R. Bridges)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버지니아주 워싱턴 카운티의 아빙돈에서 명망이 자자했던 데이비스 가문에서 최초의 해외 선교사가 된 셀리나 리니 데이비스와 역시 가문에서 최초의 목사가 된 제임스 알리슨 데이비스 목사의 영향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비밀유지가 가장 큰 관건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브릿지 목사는 최소한의 인원만 참석하는 세례문답과 세례식을 갖기로 동의하였다. 1892년 7월 12일 화요일 밤에 목사관에서 브릿지 목사의 집례로 세례식이 비밀리에 거행되었다.
 

이 역사적인 자리에는 브릿지 목사, 당회원들, 이채연 서리공사, 데이비스 선교사, 그리고 당사자인 배 선 여사가 함께 하였다. 브릿지 목사는 배 선 여사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고, 배 선 여사는 ‘나의 주시며 나의 구원자’라고 확신에 찬 고백을 했다. 그녀의 신앙 고백을 들은 모든 이들이 파도처럼 몰려오는 은혜와 감동에 사로잡혔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신앙을 견지한 배 선 여사는 브릿지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살렘 장로교회의 정식 교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셋째로, 데이비스 선교사는 전킨(W.M. Junkin) 선교사도 살렘으로 초청하여 이채연 부부의 신앙 성장에 도움이 되도록 배려하였다.

   
전킨 선교사

전킨 선교사의 고향이 살렘과 지근거리에 있는 크리스찬버그(Christianburg)여서 방문하기도 용이하였고, 신앙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이채연 부부를 위해서도 목사요 선교사인 전킨과의 만남은 여러모로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아울러 전킨 선교사도 한국 정부를 대표하여 미국에 나와 있던 외교관을 만나서 교제하는 것이 향후 전개될 한국 사역을 위해서도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데이비스 선교사가 마련한 전킨 목사 선교사와의 만남이 이채연 부부에게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는 마치 군산 선교부에서 협력자가 되어 선교 사역을 펼치게 될 전킨 선교사와 데이비스 선교사의 팀 사역을 미리 보는 것과 같았다. 1892년 7월 12일 화요일 밤에 이채연 서리공사의 부인 배 선 여사가 세례 받았음을 상기할 때, 데이비스 선교사의 주선으로 전킨 선교사가 그 날 오전과 오후 내내 이채연 부부와 시간을 보냈다는 것은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넷째로,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가 배 선 여사의 세례 사실을 비밀로 해 줄 것과 이명증서 발급을 요청하였다는 사실이다.

셀리나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는 이채연의 부인 배 선 여사의 세례식을 위한 모든 일정을 주관하면서, 당사자가 현재와 향후 맞닥뜨리게 될 상황들에 대하여 배려하며 대비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미국에서는 이채연의 부인이 외향적이고 사교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명사였지만, 유교국가인 한국에서는 그녀의 이런 행보가 어떤 위험을 초래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형국이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부탁으로 살렘 장로교회의 브릿지 목사도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했으며, 약 3년 여가 지난 후에야 이런 역사적인 사건을 공개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데이비스 선교사는 임시로 귀국하는 배 선 여사를 위해서 살렘 장로교회로부터 이명증서를 받아서 가도록 조치하였다. 살렘 장로교회는 비밀리에 배 선 여사에게 세례를 주고 정식 교인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녀를 한국의 장로교회로 이명토록 배려했다.

   
이채연 서리 공사의 아내 배 선 여사의 세례 기록(살렘 장로교회)

다섯째로, 셀리나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는 목회적 차원에서 배 선 여사를 인도하여 한국땅을 밟았으며, 미 남장로교회 파송 7인의 선발대 중 가장 먼저 내한하는 기록을 남겼다.

배 선 여사의 세례를 위해서 데이비스 선교사가 감당했던 모든 일들은 영혼구령을 위한 목회사역 그 자체였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이제 막 세례를 받고 신앙의 걸음마를 시작한 배 선 세례교인을 어린 양을 돌보듯이 인도하는 목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이채연 서리공사도 사랑하는 부인을 믿음직하고 사려깊은 데이비스 선교사에게 목회적 돌봄 하에 둘 수 있어서 든든하였다. 그렇게 배 선 세례교인과 데이비스 선교사는 목자와 양의 관계가 되어 한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록에 의하면, 데이비스 선교사와 배 선 세례교인은 대륙을 횡단하여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옥시덴탈(Occidental) 호텔에 투숙하였다.
 

이때가 1892년 9월 16일 경이었다. 미 남장로교 파송 7인의 개척 선교사 중에 루이스 테이트(최의덕)와 매티 테이트(최마태) 남매도 같은 호텔을 이용하였다. 옥시덴탄 호텔은 샌프란시스코 항을 통해 한국을 오갔던 내한 선교사들이 주로 머물렀던 숙소였다.
 

일반 역사학계에서도 이채연 서리공사와 부인 배 선 여사에 대하여 연구가 미진하거나 잘못 기술한 부분도 있다. 이를테면, 배 선 여사가 살렘에 있는 로어노크 대학과 연관이 있다고 서술하면서, 그녀가 이 대학에서 수학했다고 언급한 부분이다. 당시 로어노크 대학이 남학생들만을 위한 인문학 중심의 학교였다는 사실만 알았어도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오류들이 바르게 정립되기를 바라면서, 이번 글을 통해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의 미국 사역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앞으로도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이 사필귀정 되어 오늘과 내일을 위해 빛을 발했으면 한다.

      

최은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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