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바보 할미의 손주 사랑(Ⅲ)

기사승인 2024.10.02  10:25:26

공유
default_news_ad1

- 장경애 사모 칼럼 (294)

장경애 사모 / 수필가

   

오늘도 바보 할미는 손주 사랑에 젖어 있다. 손주는 안 보면 하루가 다르게 몰라볼 만큼 쑥쑥 자라 있다. 거기에 비하면 할미의 속도는 느리다. 그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손주가 많이 성장해서 주름지고 늙은 나의 모습을 보고 싫어한다면 어찌할지 못난 고민에 빠져 보기도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칠순이 다되어 본 첫 손주이기에 어떤 의미의 남은 자존심인지도 모른다. 손주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화상통화를 자주 한다. 스마트폰 화면에 내가 나타나면 개구쟁이처럼 익살스럽게 웃으며 “나나, 보고파요”라고 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나도 익살을 떨며 동심으로 돌아가 그 어떤 때보다 더 밝고 환하게 웃는다. 그 모습을 보며 손녀는 ‘사랑해요’라는 말을 하며 양팔을 머리 위까지 올려 하트 모양을 보인다. 그러면 내 오감은 바싹 얼어버린다. 또 딸과 통화를 하고 있으면 옆에서 “나나 보여줘”라고 쫑알대며 끼어든다. 그러면 얼른 손주와 나는 하나가 되어 서로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곤 한다. 손주 사랑은 영원한 짝사랑이라는데 다른 사람의 손주와 할미의 관계는 그렇다 해도 나와 내 손주의 사랑은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내 딸과 내 엄니, 즉 딸과 딸의 할미 사이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니 나와 내 손주도 그렇게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될 것을 믿는다.
 

이렇게 영상으로만 보던 손주의 모습을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날이 하루하루 다가온다. 그렇게 실제로 만날 날을 계수하다 보니 더디 가는 것만 같아 계수하지 않고 서늘해지는 가을만 기다리는 ‘손주 바라기’가 되어 버렸다. 여전히 나는 내 친구의 말처럼 ‘손주교의 광신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손주는 자기 일에 푹 빠져 내가 전화를 해도 관심이 없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딸에게 손주를 보여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면 딸은 손주에게 "나나가 너 보고 싶대요"라고 말한다. 그래도 손주는 듣는 둥 마는 둥 자신의 일에만 집중한다. 자기 엄마가 반복해서 말하면 몰두하던 것을 멈춘다. 그러면 딸이 전화기 속의 나를 손주가 보도록 가까이 대 준다. 그러나 손주는 본척 만척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일을 방해해서인지 "나나 싫어"하면서 어디론가 뛰어간다.
 

나는 안다. 이 말이 정말 할머니가 싫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굳이 설명하자면 발달심리학에서는 만 두 돌이 지나고 나면,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되는 시기로 독립심도 형성되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래서 ‘하지마, 싫어, 아니야’라는 등의 부정적으로 보이는 말을 많이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린아이지만 나름의 진지하게 하는 일을 방해한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어디론가 피하는 모습조차 너무 귀엽고 우습고 제대로 자라는 것만 같아 감사하고 기쁘다.


“손주는 올 때 반갑고, 갈 때는 더 반갑다”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도 그런지 나보다 훨씬 먼저 손주가 생긴 친구나 성도들에게 물었다. 아니라는 대답을 기대하면서… 그런데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같았다. 아직 내가 손주교 광신도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말에 100% 긍정이 되질 않는다. 실제로 손주를 돌봐 주러 미국에 갔다가 몸이 너무 안 좋아 예정일을 앞당겨 귀국할 때의 내 마음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두 돌도 되기 전의 그 어린 손주를 두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정말 수만 톤의 쇠뭉치를 발목에 감아 놓은 듯 무겁기만 했었으니까 말이다.


또 요즘에는 “손주 사랑은 3년이요, 손주 뒷바라지는 30년이다”라는 말도 들었다. 나는 이 말도 수긍할 수가 없다. 내 손주를 정말 30년 정도 사랑하려면 내가 백수를 해야만 하기에, 하루하루가 안타까운 할미라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엄니의 손주 사랑을 생각하면 저 말에 조금은 고개가 끄덕여진다. 내가 내 딸에게 베풀지 못할 시간이나 여건이 되면 나의 엄니는 나를 대신해 내 딸(손녀)에게 해 주던 것이 생각난다. 그런데 즐겁게 하는 일은 힘들어도 싫지 않은 법이니까 손주 뒷바라지가 바로 그런 것일 것이다.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 속담에 <두 불 자손 더 귀엽다>는 말이 있다. 한마디로 아들보다 손주가 더 귀엽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말이 아니다. 유대인의 격언에도 <한 사람의 손자는 세 사람의 자기 자식보다 더 귀엽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내 딸이 있기에 저렇게 귀여운 손녀가 있는 것이니까 딸의 존재와는 일직선 상에 놓고 비교할 수 없다. 둘 다 내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귀한 존재들이다.
 

딸은 내게 손주의 노는 모습이나 먹는 모습, 심지어는 자는 모습까지 동영상으로 찍어 보내온다. 좀 뜸하게 보내면 나는 재촉 내지는 독촉할 정도로 손주의 또 다르게 변화된 모습을 그리며 산다. 이 나이에 내 친구들의 손주는 중학생 혹은 고등학생도 있는 것에 비하면, 나의 손주는 너무 어린 3살도 안 된 아기 손주지만 이 손주는 나에게 아주 유능한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다.
 

나와 친분 있게 지내는 지인 중에 속상하거나, 우울하거나, 짜증이 날 때에는 내 스마트폰을 본다고 한다. 내가 스마트폰에 올려놓은 내 손녀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 어느새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사라지고 얼굴엔 미소와 함께 마음이 가벼워지기 때문이란다.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이 한 명이 아니고 여러 명 있다. 얼마나 기분 좋은지 모른다. 나 역시도 그러니까 말이다. 기운이 없어 아무것도 하기 싫거나 의욕이 없을 때 손주의 동영상을 보면 의욕이 생기고 기분이 한층 좋아진다. 그러고 보면 초로의 노인에게 있는 우울증이나 무력증은 손주가 정말 최고의 의사라는 말이 맞다.
 

 

나를 '나나'라고 부르는 사랑스런 손주 로이

 


내 손녀의 부모가 다 목사라 그런지는 몰라도 손녀는 뭔지 영향을 받은 듯한 행동을 보인다. 영상으로 대화할 때도 자기가 보기에 내가 좀 쳐지게만 보여도, “나나! 아퍼?”라고 하면서 말하지 않아도 기도한다. “하나님! 나나가 아파요. 낫게 해 주세요”라고 하면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은 단숨에 빠르게 하고는 "아멘"으로 기도를 맺는다. 이제 겨우 30개월 된 아기의 순수한 기도 모습이다. 또한 찬양하자고 하면 잘 알아듣지도 못할 가사를 얼마나 열심히 되뇌며 부르는지. 하나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것이 틀림없다.
 

비록 손녀를 위한 기도를 많이 하지는 못하지만, 예수님처럼 자라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손녀가 되기를,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데 쓰임 받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내일도 할 것이다. 아니 주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할 것이다.
 

그나저나 나는 언제까지 손주 사랑에 빠진 바보 할미로 살게 될까? 

 

장경애 webmaster@amennews.com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교회와신앙> 후원 회원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은행 607301-01-412365 (예금주 교회와신앙)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